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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처럼 말하기

기자명 서재영
  • 법보시론
  • 입력 2015.04.13 11:22
  • 수정 2015.06.11 10:47
  • 댓글 2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 중에 하나가 산수유다. 아직은 쌀쌀한 3월이면 산수유는 입술을 앙다물고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겨우내 갈색이던 숲에서 피어나는 노란 산수유는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매섭던 바람도 산수유가 피고나면 하루하루 훈훈한 봄바람으로 변한다. 그래서일까 ‘삼국유사’에는 산수유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신라 48대 경문왕이 임금으로 즉위하자 갑자기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두건을 만드는 장인(匠人)만은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 비밀을 잘 지키다가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 대숲에 들어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驢耳)!”라고 소리쳤다.

그 날 이후로 바람만 불면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자신의 비밀이 퍼지는 것이 싫어서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대신 산수유를 심었다. 그때부터 바람이 불면 “임금님 귀는 길다(耳長)!”라는 소리가 났다.

‘여이설화(驢耳說話)’로 불리는 이 내용은 진실은 숨길 수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대나무와 산수유가 상징하는 바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대나무는 매서운 추위에도 그 푸름을 잃지 않기에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타협하지 않는 강고한 성격을 ‘대쪽 같은 성품’으로 비유한다. 여기서도 대나무는 장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발설하는 일에는 위험이 따른다. 결국 대나무는 모두 베어져 버렸고, 더 이상 부는 바람에 진실을 퍼뜨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산수유는 ‘임금님의 귀는 길다’라고만 했다. 물론 산수유는 대나무처럼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짓을 말을 한 것도 아니다. ‘길다’는 표현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당나귀 귀’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좀 길다’고만 느낄 수도 있다. 산수유는 듣는 이에게 주체적 해석이 필요하도록 은유 속에 진실을 담아냈고, 임금도 산수유를 베어내지는 않았다.

대나무는 사실을 발설했지만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탓에 제거해야할 표적이 되었다.

그와 함께 대나무가 알고 있던 진실도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 산수유는 적절한 은유 속에 진실을 담아냄으로써 듣는 이들의 반문과 되새김질을 요구했다. 덕분에 산수유는 바람이 불 때마다 진실을 계속 발설할 수 있었다.

지금 종단 안팎을 돌아보면 온통 대나무처럼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격앙된 감정은 절제되지 못하고, 거친 말들이 여과 없이 쏟아진다. 감정이 배어나는 날카로운 말로 몰아붙이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비수 같은 비난이 난무한다. 언론도 덩달아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거친 표현과 선정적인 내용으로 감정의 과잉을 부채질한다. 격앙된 감정이 상품이 되고, 분노가 소비되는 대목이다.

우리도 산수유처럼 말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삭이고 완곡하게 표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나무처럼 말하면 발언할 때는 시원하겠지만 상대방의 감정만 상하게 하고, 말하려는 뜻은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다. 반면 산수유처럼 부드럽게 말하면 하고 싶은 말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상대방을 설득하여 대화의 장으로 끌어낼 수도 있다.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을 정의로 생각하고, 조롱하는 것을 용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표현은 스스로 자기 감정을 절제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는 언어는 설사 사실적 발언일지라도 문제를 푸는 열쇠는 될 수 없다. 감정을 절제하고 완곡한 표현으로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대화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 여이설화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가 미묘한 향”이라는 문수동자의 게송을 다시 일깨워준다. 너무 강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실을 외면하지도 않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puruna@naver.com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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