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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잔인함과 ‘기억’

기자명 함돈균

다시, 어느새, 4월이다. 현대시의 한 장을 열었으며, 매우 난해하지만, 한국에서는 상투적이고 손쉬운 방식으로 일반에게 알려지고 소비되는 엘리엇의 한 시를 적는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기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메마른 뿌리를 흔든다/ 겨울은 따뜻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작은 목숨을 마른 뿌리로 부지시키면서’(T.S 엘리엇 ‘황무지’ 중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이 유명한 시구는 이 단락의 결론이다. 이 결론은 그 뒤를 따르는 몇 개의 시구들이 지시하는 정황에 따라 중층의 역설을 포함하고 있다. 고도의 상징이 내포되어 있어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은 내용을 그래도 아주 단순하게 말하여 본다면, 이 단락은 두 개의 내용으로 나뉘어 있다.

①겨울 땅속에서 “마른 뿌리”가 “작은 목숨”을 부지시키고 있으며, ②4월은 보이지 않던 그 “목숨”이 땅 위로 올라와 개화와 생명의 약동을 가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얘기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부분은 왜 생명의 계절을 ‘잔인하다’고 말하는가이다. “작은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저 “마른 뿌리”가 실은 ‘말라붙은 과거’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것이 부활한다는 기독교적 순교나 늙은 것이 어린 생명을 키운다는 모성적 비유라기보다는, 목숨의 유지와 성장·개화가 ‘죽음’으로 상징되는 ‘반생명’과 맺는 변증법적 관계에 대한 암시라고 봐야 한다.

이 시를 이해하는 데에 열쇠가 되는 대목은, 겨울의 대지가 ‘따뜻했던’ 이유를 “망각의 눈(snow)”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반대로 겨울 죽은 땅 속 메마른 뿌리를 흔드는(깨우는) “봄비”가 “기억과 욕망”의 이미지라는 데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의미심장한 아이러니를 내포하는데, 겨울의 대지와 마른 뿌리, 곧 ‘반생명’을 상징하는 그것들의 실체가 “망각”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그 뿌리를 흔들어 꽃을 개화시키는 것은 “기억과 욕망”이라는 뜻이다.

망각은 목숨을 부지하게 하고, 그 안에서 목숨의 연명은 “따뜻”하다. 망각은 ‘목숨’을 둘러싼 건조하고 끔찍한 것으로부터 ‘목숨’ 그 자신의 시선을 돌려세움으로써, 안전한 ‘겨울잠’을 보장한다. 그러나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기르”고 ‘겨울잠-망각’의 늙은 뿌리를 흔드는 “봄비”는 “기억과 욕망”이다. 하지만 생명을 약동시키는 “봄비”는 겨우 살아가는 “작은 목숨”들에게는 또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가. ‘깨어난다’는 것은 세계의 참상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요, 목숨을 연명시키는 안전한 것의 품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니까.

이 얘기를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꽃피울 것인가. 그것은 메마른 뿌리의 품속에서 계속 잠잘 것인가, 봄비를 맞으며 깨어나고 흔들릴 것인가 하는 질문, 망각과 각성에 관한 ‘잔인한’ 물음이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인의 전언은, 이제 우리에게는 ‘4월의 기억은 잔인하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러나 ‘기억하라’라는 말이 넘쳐나는 가운데, ‘기억’이라는 말은 또다시 여러 상투어와 다르지 않은 무감각한 말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저 시를 떠올려 보자.

그에 따르면 ‘기억’의 본질은 어떤 특정 내용의 회고에 있다기보다는, ‘안전’하지만 나태한 정신에 의지해 목숨의 연명만을 지상 목표로 사는 죽은 삶으로부터 ‘깨어남’을 뜻한다. 참된 생명으로 사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불가에서 ‘깨달음’의 장애요인으로 불리는 ‘삼독(三毒)’, 즉 ‘탐진치(貪瞋癡)’에서 벗어나는 일도 결국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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