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명상센터 호두마을-중
위빠사나명상센터 호두마을-중
  • 최호승 기자
  • 승인 2015.04.20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 안에 내가 있으면 자신의 화를 볼 수 없다”

▲ 대수행홀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느린 화면처럼 움직이거나 정지했다. 경행하거나 좌선하는 수행자들 마음은 달랐다. 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번뇌를 좇았고, 더러는 번뇌에 시달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위빠사나명상센터 호두마을 대수행홀 공기는 새벽 4시면 기지개 켰다. 정적 속에 잠들었던 공기가 수행자들 발걸음에 부산히 몸을 일으켰다. 좌복이 제 주인 다 찾으면 지도법사 아신 빤딧짜 스님은 법석에 올라 새벽예불을 함께 올렸다. 그리고 짧은 수행법문이 이어지고 바로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공양이 끝나고 경행, 초심자 그룹 인터뷰, 경행, 좌선, 점심공양, 경행, 법문, 구참자 개별 인터뷰, 휴식, 좌선, 경행, 좌선이 반복됐다. 하루 수행일과였다. 뻑뻑한 일정이지만 수행자들 누구도 불만이 없었다. 몸과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과 이론 공부에 쫓겨 해는 금세 기울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좌선·경행 등 실참
휴식에도 묵언하며 사띠 챙겨
근기따라 사마타와 위빠사나
오후불식으로 식탐 줄여나가

담마야나선원장 빤딧짜 스님
집중수행 동안 2차례씩 법문
초심자·구참자 그룹 수행면담


수행기간 중 묵언은 필수였고 점심공양 뒤엔 오후불식이었다. 씹는 음식물이 입과 위에 들어가는 것을 금했다. ‘비라삼매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때 아닌 때에 먹지 않으면’ 5가지 이익이 있다고 했다. 탐욕을 제거하고 잠이 줄며, 정신이 맑아 상쾌해지고 복과 수명이 늘어나 깨달음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빤딧짜 스님은 “필요한 만큼만 먹자는 뜻이며 식욕, 즉 식탐을 덜어내는 일”이라며 “하루 두 끼 외에는 식탐이 먹는 셈이다. 한 끼를 줄여도 살 수 있고 그 시간에 수행할 수 있다”고 오후불식을 권했다.

▲ 법문 시간만 되면 으레 필기도구가 등장했다. 수행자들은 한 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마음을 열었다.

법문 시간만 되면 으레 필기도구가 등장했다. 스님 입에서 나오는 부처님 지혜를 종이에 옮기고 되새겨보기 위해서였다. 녹음도 했다. 방에 돌아가 자기 전이나 휴식 시간에 들으며 곱씹었다. 다시 한 번 수행법문을 되새김질하며 좌선이나 경행에 임하는 수행자들이 적지 않았다.

위빠사나는 팔리어 ‘위(Vi)’와 ‘빠사나(Passana)’의 복합어다. 빤딧짜 스님에 따르면 위(Vi)는 ‘특별하게, 특별한’이며 빠사나(Passana)는 ‘봄’이다. 흔히 ‘특별한 봄’이나 ‘뛰어난 관찰’ 혹은 ‘통찰’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빤딧짜 스님에 따르면 위빠사나라는 단어가 지닌 본래 의미는 ‘지혜’다. 쉽게 말해 ‘지혜로써 관찰한다’는 뜻이 위빠사나다. 위빠사나는 사념처인 몸, 느낌, 마음의 상태, 여러 가지 법을 있는 그대로 마음을 챙겨 관찰함으로써 무상, 고, 무아라는 삼법인을 꿰뚫어보는 수행이다. 대개 경행하면서 발바닥과 접촉하는 대상에 마음을 두고 사띠(관찰 혹은 알아차림)를 챙기거나 들숨날숨의 경계를 사띠하면서 몸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한다. 수행이 익으면 저림, 아픔, 가려움 등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각과 망상, 기억, 분노, 행복 등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박소정(64·가명)씨는 코 주변에 바람이 많이 불고 많은 공기를 느꼈다. 잠깐 생각이 끊긴 듯 했다. 잠들었다는 의식은 없었다. 기억도 없었다. 다시 호흡에 집중했다. 그러나 ‘조금만 더…’라는 집착에 시달렸다. 유튜브에서 빤딧짜 스님의 위빠사나 지도 영상을 보고 혼자 집에서 수행하다 호두마을을 찾았던 터였다. 번뇌가 사라지며 일순 마음이 편안했던 기억이 그를 괴롭혔다. 다음 단계를 보고 싶다는 ‘탐(貪)’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빤딧짜 스님은 “잤다”며 웃었다. 사띠를 끌어올리라 조언했다. 들숨날숨할 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에서 번뇌 뿌리를 찾는 게 위빠사나로 얻는 지혜라고 했다. 사띠를 끌어올리라고 당부했다. 사마타를 권했다. 사마타는 들숨날숨을 위주로 사마디(선정 혹은 삼매)로 밀어붙이는 수행이라고 했다. 초심자 그룹 인터뷰 시간은 수행에서 만나는 장애와 경계를 해소하는 법석이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차이가 궁금했다.

“위빠사나는 대상에 따라 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의도’를 알고 변화까지 아는 지혜다. 염불이나 정근은 사마타로 볼 수 있다. 마음을 한 대상에 묶어둔다. 그러나 사마타든 위빠사나든 모두 사띠가 있어야 한다.”

다시 좌선과 경행이었다. 수행자들은 돋보기(사띠)를 만들고 있었다. 현상만 쫓았던 흐릿한 눈 밝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돋보기를 현미경처럼 예리하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김가윤(29·가명)씨는 좌선하는 동안 허리 세우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강했다. 앉으면 새소리 들리고 딱딱한 느낌이 들며 몸이 아팠다. ‘깨어있나?’ 수십번 묻고 되물었다. 처음엔 분석하고 답하면서 재밌었다. 그러다가 불편했던 기억들이 올라왔다. 미래 계획들이 두서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또 이 생각이네.’ 짜증마저 일었다. ‘네가 왔구나’하면서 대화가 시작되면 마음이 시끄러워졌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했다. ‘이건 번뇌야’라며 스스로에게 제동도 걸어봤다. 그러면 명치가 답답해지기 십상이었다. 사띠는 저만치 달아나고 없었다.

“불편함을 통제하다보면 스트레스만 생긴다.” 빤딧짜 스님은 불편함이 심리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했다. 몸은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프지 않다는 것. 불편함은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번뇌였다. 그 뿌리는 ‘몸을 아프게 하는 불편함이 싫다’였다는 설명이었다. ‘좋다, 싫다’는 의도(아상, 我相)가 들러붙었다는 얘기였다. 어리석음이라고 충고했다. “제동을 거는 의도 안에 ‘나’가 있다. 탐진치(貪瞋癡)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통해 인지하는 대상과 거리를 두고 객관화시켜야 한다.”

▲ 집중수행 동안 지도법사 빤딧짜 스님은 새벽과 오후 등 매일 2차례씩 법문으로 수행을 독려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경행하거나 좌선하는 수행자들 마음이 그랬다. 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번뇌를 좇느라 분주했다. 더러는 번뇌에 시달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호두마을에서 단기출가를 마음먹은 심미정(가명)씨는 불현듯 일어나는 나쁜 생각이 두려워 사띠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에게 빤딧짜 스님이 당부를 남겼다.

“수행은 아는 것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노력이다. 화가 났을 때 자신은 그 화를 제대로 못 본다. 스스로가 화 안에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들리면 ‘시끄럽네’가 생기며, 거절하고 외면하고 싶은 의도가 올라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의도를 알아차리고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의도도 찰나다. 몸과 마음은 영화처럼 수많은 연속사진들의 결합이다.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 연속사진들 하나하나 볼 수 있는 시력을 길러야 한다.”

수행자들 마음에 ‘2배속 느리게’ 버튼이 작동했다. 호흡과 발바닥에 둔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바라봤다. 빠르게 지나가던 번뇌가 속도를 늦췄다. 대수행홀 공기가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

“수행은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순간순간”

부산 담마야나선원장 빤딧짜 스님

 
“1주일이라도 새벽부터 일어나 마음닦는 시간은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그 기간 동안 지혜를 계발하고 그만큼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면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순간순간입니다.”

6박7일간 집중수행을 지도한 아신 빤딧짜 스님 생각은 그랬다. 수행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이며, 수행자는 걸음마를 뗀 아이와 같다고 했다. 집중수행을 회향하고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수행이 지속돼야 한다는 점을 당부했다.

“우리 마음은 평상시에 좋아하는 형상, 소리, 냄새, 맛, 성욕에 착 달라 붙어있다. ‘취착(取着)’이다. ‘탐(貪)’이 마음을 어떤 대상과 끈적끈적하게 밀착시킨다. 위빠사나가 아닌 다른 수행일지라도 탐을 줄여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탐이 줄면 취착도 준다.”

일상에서 수행은 왜 어려울까. 빤딧짜 스님은 교도소와 비유했다. 스님은 “윤회 속에 가만히 있으면 그냥 고통 안에서 사는 것과 같다”며 “여기서 벗어나려는 노력, 즉 수행을 하다보면 장애는 당연히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교도소 안에서 살던 죄수가 탈옥을 시도한다면 온갖 방해에 부딪힌다”며 “대상을 취하려고 하려는 탐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성냄으로 변한다. 여기서 생기는 번뇌로 인한 고통이 곧 방해”라고 덧붙였다. 특히 스님은 “그러나 탐이 성취되고 그 기쁨에 도취되는 것도 고통이자 어리석음”이라며 “기쁨은 부족을 낳고 더 큰 기쁨을 추구하는 원인이 된다. 우리는 이 고통이 행복하다고 착각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일터로 가정으로 돌아가도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라고 했다. 입과 몸 그리고 마음에서 부처님을 그리워하라고 했다. 마음을 깨끗이 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위빠사나를 못하더라도 자애로운 글과 언행을 이어가라고 청했다. 그리고 이번 생에 윤회를 끝내지 못하면 다음 생에도 수행하는 인연공덕이 생기길 기원했다.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