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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3)

“눈앞의 이것은 무엇인가? 삼조 대사가 아직 있군”

▲ 인도 영취산에서 부처님은 설법을 기다리는 대중 앞에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릴 뿐 말이 없었다. 간택만 없으면 온 천지가 한 송이 꽃이고 내가 한 송이 꽃이다. 완벽한 설법이다.

[참구]
<본칙>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至道無難). (착어 ← 어렵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唯嫌揀擇). (착어 ← 눈앞의 이것은 무엇인가? 삼조 대사가 아직 있군.)

간택은 취하거나 버리는 행위
매달리거나 거부하면 속박 돼
한 생각도 일지 않는 일념불기
오직 화두만 성성할 때와 같아

부처님이 든 꽃 한 송이 설법
‘나’ 놓고 꽃 자체 될 때 들려

‘간택’은 취사선택 곧 ‘취하거나 버리는 것’이다. ‘지극한 도’를 얻는 길은 간단하다. 취하거나 버리거나, 매달리거나 거부하는 ‘간택’만 그만 두면 된다. 시비(是非)·선악(善惡)·득실(得失)·미오(迷悟, 어리석음과 깨달음) 등을 따져서 그 어느 쪽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면 ‘지극한 도’는 그 자리에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행복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고 있다면, 행복을 바람직한 것이라 여겨 좇거나, 반대로 행복은 집착의 대상이라 하여 멀리 하려 한다. 둘 중 어느 쪽의 행동을 취하든, 다시 말해 어느 쪽을 간택하든 마음은 그쪽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어떤 판단을 바탕으로 간택, 곧 취사선택하는 순간 ‘완전한 것’에서 멀어지고 만다. ‘지극한 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간택을 해서는 도달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것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고 간택하지 않는다고 하면 꼼짝도 않고 멍청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저녁놀을 보게 되었다. 저녁놀을 좇으려고도 멀리 하려고도 하지 않을 때, 즉 그 어느 쪽으로도 간택하려 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의도적으로 저녁놀을 보지 않으려는 것은 간택이다. 할 일은 않고 저녁놀만 보려고 하는 것도 간택이다. 전자는 저녁놀에 대한 거부이고 후자는 그것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간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 어떤 것일까?

‘금강경’에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머무는 바가 없이’는 ‘집착함이 없이’를, ‘마음을 내라’는 ‘생각하고 행동하라’를 각각 뜻한다.

“집착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라.” 우리는 ‘집착하지 마라’고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부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숫제 공부를 하지 않으려 하고, 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돈 버는 일을 그만 두려고 한다. 그런데 “집착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라”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하지 마라’가 아니라 ‘해라’이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열심히 벌라는 것이다. 단 ‘집착함이 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

‘집착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간택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선에서 ‘일념불기(一念不起)’, 즉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함은 액면 그대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가 아니다. 생각을 하되 그 생각에 어떤 집착도 없는 것이다. 이 상태가 철저할 때 그 당사자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물론 그에게는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없다.

좌선을 체험해 보지 않으면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이 잘 와 닿지 않을지도 모른다. 화두를 들어 보라. 화두는 그것에 집착하려고 해도 집착할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화두이다. 화두 삼매에 들어 일체의 잡념이 사라지고 화두만 성성할 때, 그에게는 화두조차 없다. 화두만 성성하여 화두조차 없는 그와 같은 상태를 일념불기라 한다.

일념불기의 상태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간택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 성성히 있는데 간택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저녁놀에 대한 어떤 생각도 없는 상태에서 저녁놀만 만나는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이다.

‘월천담저 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는 게송이 있다. “달빛이 연못 바닥까지 비추고 있으나 물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네”라는 뜻이다. 달빛이 물을 관통하고 있으나 물에는 달빛의 흔적이 없다. 비추나 비춘 흔적이 없는 달빛, 있으나 없는 것 같은 달빛. 온통 달빛뿐이나 달빛으로 인한 저항이나 걸림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바로 일념불기의 상태이고, 집착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며, 간택하지 않는 경지이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唯嫌揀擇).”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만약 그 견처로 “집착함이 없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라든가, “일념불기의 상태로 밥 먹고 일합니다”고 답한다면 통렬한 죽비만 맞을 것이다. 입시문제에 대한 답으로는 합격점일지 모르나, 부처를 뽑는 선불장(選佛場)에서는 가차 없는 죽비와 호통만 뒤집어쓸 쓰레기 같은 답변이다.

노쇠한 팔로 있는 힘을 다해 죽비를 내려치는 스승, 대갈일성 호통 치는 그 목소리에 담긴 뜨거운 자비를 느낀 적이 있는가?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부모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그 은혜, 화두 뚫는 것보다 더 나은 보은은 없다. 자, 견처를 보여라. 머리로, 느낌으로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어림잡아서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 스스로 참구하여 체득한 살아 있는 것이라야 한다. 당신의 영혼이 담긴 당신만의 견처를 스승은 보고 싶어 한다.

원오 선사는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에 대해 “눈앞의 이것은 무엇인가? 삼조 대사가 아직 있군”이라는 착어를 붙였다. 눈앞의 이것은 무엇인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꿈이라는 생각도, 현실이라는 생각도 없다. 꿈인 줄도 모른다. 꿈뿐일 때 꿈은 없다. 현실도 없다. 거기에는 꿈과 현실 사이의 취사선택도 없고 꿈에 대한 거부나 집착도 없다. 꿈뿐인 곳에, 온전히 그것만 있는 곳에 간택은 없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개개의 사물 어느 것 하나 ‘지극한 도’ 아닌 것이 없다. 눈앞의 이것 모두가 그대로 ‘지극한 도’이다.

▲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한 곳.

영취산에서 석가모니는 설법을 기다리는 대중 앞에 흔한 금파라 꽃(金波羅華, 일종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릴 뿐 말이 없었다. 한 송이 꽃을 들어 보이는 순간, 보는 나에게 일념의 잡념도 없으면, 곧 간택만 없으면 온 천지가 한 송이 꽃이고 내가 한 송이 꽃이다. 이 이상 더 완벽한 설법이 있을까? 눈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설법이 아니고, 귀를 가졌다고 들을 수 있는 설법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한 송이 꽃 그 자체가 될 때 듣는 설법이다.

“영산일회, 엄연미산(靈山一會, 儼然未散), 영취산에서는 석가모니가 아직 설법 중이다”(‘법화경연의’ 권1)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꽃 한 송이 들어 보인 설법을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들어 보라는 것이다. 자기를 방하하고 방하하여 온 천지와 하나가 되면 영취산에서의 석가모니 설법을 지금 이 자리에서 듣는 것은 물론, 3조 승찬 대사와 같은 차원의 삶을 살아간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너와 나의 대립도 없고, 시간과 장소의 구애도 없다. 언제 어디서나 이런 경지에서 보고 듣는 자, 그는 바로 삼조 대사이자 나 자신이다. 간택하지 않는 곳에 삼조 대사는 늘 있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삼조 대사가 아직 있군”이라는 착어를 붙였다.

‘조당집’ 권6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 장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내용 가운데 나오는 ‘가상(家常)’이라는 말은 탁발할 때 외치는 소리로, ‘평상시에 먹는 음식을 청합니다’는 뜻이다.

탁발할 때, 우리나라의 경우는 탁발승 한 사람이 어느 집 문 앞에서 요령을 흔들거나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면 그 집주인이 공양물을 시주한다. 우리와 같은 간화선을 종지로 하는 일본 임제종의 경우는 선방의 거의 모든 수행승이 함께 탁발을 나간다. 길 가장자리를 따라 일렬종대로 앞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줄을 지어 “법우(法雨)”라고 외치면서 간다. 온 천지에 진리의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시주하고자 하는 사람은 길로 나와 공양물을 시주한다.

미얀마의 경우도 단체로 나가 일렬로 줄을 지어 침묵한 채 탁발한다. 신자들은 공양물을 준비하여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시주한다.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할 때 중국 송대의 선종에서 행해지던 탁발은 지금의 일본 임제종과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탁발을 나간 한 수행승이 발우를 들고 “가상(家常)!”이라 외쳤다. 어느 재가신자가 물었다.

“상좌께서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간택할 것이 있겠습니까?”

재가신자는 잡초를 들고 와서 발우에 가득 채워 주면서 말했다.

“상좌께서 한마디 바르게 말씀하시면 공양을 올리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하면 그냥 가십시오.”

그 수행승은 아무 말도 못했다.

탁발 나온 수행승에게 주인이 어떤 공양물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수행승은 간택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인은 잡초 한 움큼을 발우에 넣어 주면서 한마디 해 보라고 한다. 당신이 그 수행승이라면 어떻게 대하겠는가?

위 이야기에 이어지는 ‘조당집’의 다음 내용을 보라.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동산 선사에게 말했다. 동산 선사가 그 수행승을 대신해서 말했다.

“이것은 간택한 것이니, 간택하지 않은 것을 가져오시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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