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네가지 집착에서 벗어나라-하

  • 해외
  • 입력 2015.04.27 11:41
  • 댓글 0

“생생한 꿈같은 현실 세계에서 깨어나십시오”
티베트 사캬 티진 초청강연
세첸코리아·봉인사·법보신문 기획

 
우리 모두가 구해야 할 목적은 일체중생의 완전한 깨달음입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은 원인 없이 일어나지 않고 불완전한 원인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바르지 않은 인(因)과 연(緣)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 볍씨를 심는다면 바른 씨앗을 심었다 하더라도 벼는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밀씨를 뿌렸다면 벼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벼가 자라려면, 볍씨가 필요하고 적절한 온도와 습기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른 인과 연이 모두 있어야만 합니다.

밀씨 뿌리면 벼 자라나지 않듯
깨달음에도 바른 인연 있어야
대자비와 보리심·방편행 필요

수행으로 보리심 개발해도 부족
안팎의 현상 붙잡으려 하기 때문
사마타와 위빠사나로 극복 가능

인연 따라 나고 사라지는 현상
실재 없다는 진실의 뿌리 봐야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에도 바른 씨앗, 바른 인, 필요한 모든 연들이 요구됩니다.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르고 참된 깨달음(正等覺)의 인은 대자비(大慈悲)이다. 깨달음의 연은 보리심(菩提心)과 방편행(方便行)이다.”

근본 인과 연을 지니고 방편을 행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 세가지를 성취하려면 자애, 연민, 보리심을 명상하고 보살의 계율을 수지해야 합니다.

네번째 게송인 “파악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그대는 아직 지견(知見)을 얻은 게 아니다”는  수행을 바탕으로 상대적 보리심을 개발했더라도 여전히 안팎의 현상을 붙잡거나 파악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상을 붙잡거나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극복하려면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를 수행해야 합니다.

번뇌를 제거하는 실제적인 방편은 위빠사나 수행에 있습니다. 하지만 위빠사나를 수행하기 전에 먼저 사마타의 토대를 마련해야 합니다. 네번째 게송의 수행은 모두 합쳐서 세 단계로 나타납니다. 바로 사마타 명상, 위빠사나 명상, 둘을 조화시키는 명상(止觀均行)입니다.

위빠사나를 수행하기 전에, 사마타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에 마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념으로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사마타 명상은 귀의, 보리심과 같은 예비수행(加行)으로 시작하세요. 정근은 평소에 하시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할 수 있다면 금강좌로 앉아 두 손은 선정인을 하고 혀끝은 가볍게 입천정에 대고 척추는 바로 세우고 눈은 반쯤 감으세요. 이처럼 올바른 자세로 명상하세요.

사마타를 수행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초보자에게는 외적 대상을 응시하는 것이 더 쉽고 적절합니다. 응시할 수 있는 많은 외적 대상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의 상입니다. 부처님의 모습을 응시함으로써 사마타를 계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큰 공덕자량도 쌓게 됩니다.

부처님의 심상(心像)을 명상하게 된다면 연꽃 좌대 위 달 방석에 앉아계시는 황금빛 석가모니 부처님을 관상합니다. 그의 오른손은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으로 무릎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구족계를 받은 승려의 삼의를 걸치고 있고 금강좌(金剛座)로 앉아계시고, 두 발은 양편 무릎 위에 올려져 있습니다. 불상을 바라보든 아니면 선명하게 관상을 하든 일반적으로는 몸을 바라보고 특수하게는 양미간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흰색의 털이 나선형으로 꼬여있습니다. 이제는 불상, 혹은 심상의 다양한 색이나 모습을 바라보지 마시고 마음과 눈, 호흡을 한데 모아 흔들림 없이 그 미간에 집중하고 계세요.

사마타 명상을 계발하는 동안에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가지 결점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이 다섯가지 결점을 바로잡을 수 있는 여덟가지 처방이 있습니다. 명상을 도와주는 아홉가지 방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다섯가지 결점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에 대한 처방은 사마타 명상이 주는 이득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 명상을 하면 물리적인, 정신적인 평안함과 환희와 같은 세속적인 성취 그리고, 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진실한 믿음을 계발하도록 하세요. 요지부동한 자세로 명상의 대상을 떠나지 않는다면 눈을 깜박거리지도 않고 몸을 구부리지도 않는다면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상념이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실상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념은 항상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평상시에 다른 행위로 바쁘다보니 알아차리질 못했던 것입니다. 앉아서 대상을 응시하고 있으면 상념들이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상념이 일어남을 보는 것은 긍정적인 징조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마세요.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을 계속하다보면 상념의 수가 조금씩 줄어들 겁니다. 결국 어떤 사념도 일어나지 않고 한결같이 완전한 적정(寂靜)속에 남아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마타의 성취입니다.

사마타 명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를 위한 바탕일 뿐입니다. 위빠사나 없이는 번뇌를 뿌리까지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본수행은 위빠사나 프라즈냐(般若)인 겁니다. 이것은 아주 예리한 논리적 지성을 이용하여 외적인 현상과 내적인 현상의 궁극적인 실재를 관조(觀照)하는 것입니다. 일체현상의 궁극적인 실재는 긍정과 부정, 존재와 비존재의 두 극단을 떠나 있습니다. 그러한 지견을 얻는 것이 위빠사나의 성취입니다.

위빠사나는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외연(外緣)을 마음의 나타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이 보는 모든 사물, 매일 마주치는 광경이나 모습에 원인이 없다는 것, 외부적인 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모두 마음의 산물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는 습관은 잠재적인 경향으로서 마음속에 느낌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 결과 적절한 조건들이 서로 만났을 때 이러한 습기가 자신의 주위에 현상을 투영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러한 사물의 창조자는 자신의 마음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꿈의 현상과 비슷합니다. 꿈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봅니다. 다양한 지역이나 동물 그리고, 어떤 다른 것들을 말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꿈도 꾸고 슬픈 꿈도 꿉니다. 이러한 꿈들은 기쁨과 슬픔 따위들을 일으킵니다. 그렇더라도 외부의 대상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꿈은 그저 자신의 마음일 뿐입니다. 그러나 꿈꾸는 동안에는 그 꿈이 지금 이 순간처럼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험하는 이 삶도 꿈과 같은 것입니다. 꿈과 일상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꿈도 여러분이 경험하는 것이고 지금 이순간도 여러분이 경험합니다. 꿈도 다양한 느낌을 일으키고 일상도 다양한 느낌을 일으킵니다. 유일한 차이는 시간의 길이입니다. 꿈은 이생의 삶보다는 짧으니까요. 그것만 빼면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물은 실제로 자신의 마음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외부세계가 마음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면 사물의 성질이 모든 사람에게 항상 똑같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번째는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을 환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경전에서 “말이나 코끼리, 수레라는 마법사가 만든 다양한 환영체의 모습이 전혀 실재가 아닌 것처럼 모든 현상의 법이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러한 모든 현상은 마법과 같습니다. 마법사가 주문의 힘으로 특정의 원료들을 결합시켰을 때 우리는 코끼리나 말과 같은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는 어떤 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다양한 외연들이 마법의 환영처럼 나타난다고 합니다. 원인들이 서로 합쳐질 때 무엇인가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관찰해보면 아무 것도 파악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인과 연에 의존하는 이상,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게 됩니다. 본래부터 존재했던 것이라면 외적인 인과 연에 의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인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게 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모든 정신적인 현상이 마법사가 보여주는 환영과 같고 물에 비친 달과 같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부분을 계속 명상해 보세요.

세번째 단계는 모든 환영을 고유한 성품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관찰해보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어떤 것이 파악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외연이 그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외연으로 나타난 것은 내재된 성품이 없습니다. 모두 공성(空性)입니다. 공성이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성이란 실재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한 단어일 뿐입니다. 그것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의 표현을 넘어서 있습니다. 실재는 투명하게 확장되어 있는 것이자 ‘비어 있음’입니다. 하지만, 둘은 상반되지 않습니다. 현상과 공성이 상반된 것이 아니기에 둘이 아닙니다. 소리와 공성도 둘이 아닙니다. 자각과 공성도 둘이 아닙니다. 이것이 실제적인 위빠사나입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충분히 성숙시킨 뒤에 둘을 하나로 녹여서 조화롭게 합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모습(外緣)을 마음의 나타남으로 여기고 마음에 나타난 모든 대상을 환영으로 여기고 모든 환영을 고유 성품이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나서 공성을 자각하고 있고 표현을 넘어서 있는 마음이 시초부터 모든 극단을 넘어서 있는 실재와 융합되어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물이 물과 섞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자각을 직관하고 바람이 없는 등불처럼 흔들림 없는 상태에 머무르세요. 바람이 없을 때 등불은 매우 안정적이고 고요하고 매우 선명하게 빛을 냅니다. 이러한 상태를 명상하세요.

수행과 더불어 여러분은 점점 더 이 상태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절대적 진리에 가까워질수록 아직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향한 자비심이 더욱 더 많이 올라 올 것입니다. 자비와 공성을 자각하는 지혜를 결합함으로써 보이는 모든 모습이 지혜로 변형될 것입니다. 마침내 삼신(三身)을 수반하는 완전한 깨달음과 그침 없는 불사가 성취될 것입니다.

“이 덕있는 행위의 덕택으로 모든 중생이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소서.”

대보살이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을 회향하였듯이 자신의 공덕을 회향하고 그들이 간 길을 따르겠다는 원을 세우세요. 이것으로 네가지 집착에서 벗어남에 관한 법문을 마칩니다.

정리=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