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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4)

“도적의 정체가 탄로나 버렸네, 어디로 갈 참인가?”

▲ 백림선사 정문 양쪽 기둥에 걸린 주련이 조주 선사의 주석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주련에는 ‘조주의 만리교를 마주 대하고 있다’는 뜻이 담긴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본칙>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간택이고 명백이 되어 버린다. (착어 ← 이랬다저랬다 교활하구나. 잘난 체하지 마라.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

‘신심명’의 ‘명백=깨달음’을
간택과 동격으로 부정한 조주
“깨달았으면 버려라” 가르침
깨달음 냄새 풍기면 어리석음

금고에 돈 넣어두면 쓸모없어
값지게 사용할 때 가치 있어
깨달음에 걸맞는 행동 없으면
고인 물이 썩듯 부패한 냄새뿐

‘간택’은 취사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명제를 정립하고 주장하는 것은 간택이다. 그 명제는 취하지만 동시에 그것에 반하는 명제는 거부하기 때문이다. 명제의 정립과 주장은 곧 ‘판단의 고정화’이다. 우리들이 내리는 판단은 대부분 고정화된 판단이며, 집착을 동반한 판단이다. “이것은 좋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것은 나쁘다”를 용납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판단은 간택이다. 판단은 언어표현이기에 우리가 하는 언어표현은 간택의 그늘 아래에 있다.

조주 선사는 말한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는 순간, 이 말의 내용도 간택이 되고 명백이 되어 버린다고. 다시 말해 그것이 명제로서 정립되고 주장되는 순간 그것은 간택이 되어 버린다.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조주 선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간택이 될 뿐 아니라 ‘명백’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신심명’의 원문에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 싫어하고 좋아하지만 않으면, 확연히 명백하다”로 되어 있다. 따라서 ‘신심명’에서의 명백은 간택이 없는, 진리의 직접 체험인 ‘깨달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 ‘신심명’의 명백을 조주 선사는 간택과 동격으로 부정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조주 선사가 말하는 ‘명백’, 즉 ‘깨달음’은 언어표현을 통해 명제로 정립되어 고정화된 깨달음이다. ‘신심명’의 명백도 일단 명제로 정립되고 고정화되면, 그것은 ‘불간택(不揀擇)’이라는 또 하나의 간택에 불과한 것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이렇게 제창하고 있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하는 순간 간택이고 명백이 되어 버린다’라고 말씀하신 그대로다. 옳다 그르다 하자마자 ‘지극한 도’는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렇게 쇠못을 박고 아교칠을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주 선사는 ‘간택이고 명백이 되어 버린다’고 했다. 오늘날 참선하여 도를 구하는 이들은 간택하지 않으면 명백에 주저앉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쇠못을 박고 아교로 붙여 고정시켜 놓듯이 어디라도 눌러앉는 순간 ‘지극한 도’는 스쳐 지나간다. 깨달음도 깨달았다는 냄새를 풍기면 어리석음이다. 부처의 세계에 자리 잡고 눌러앉아 또 다른 자기만의 동굴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라도 입으로 조금만 내뱉으면 간택이든 고정화된 깨달음이든 어느 쪽의 병에 떨어져 버린다. 어리석은 놈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만 간택하여 차별의 세계에 빠져 버리고, ‘반청반황(半靑半黃)’하여 깨달음의 냄새를 풍기는 놈들은 평등의 세계에 주저앉아 또 다른 집착의 소굴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눈 밝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선을 시작할 때 관점(見地)이 명확해야 한다. 아무리 뼈를 깎는 수행을 하더라도 관점이 애매하면 진척이 없다. 정견(正見)이 없으면 수행도 자기본위가 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 첫 한소식이 확실하지 못하면, 애만 쓰고 공은 없다(勞而無功). 한 걸음 한 걸음이 철저하고 바르도록 인도하는 것이 스승이다.

원오 선사는 이 구절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교활하구나. 잘난 체하지 마라.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는 착어를 붙였다.

조주 선사는 ‘간택’이니 ‘명백’이니 “이 말을 하는 순간 간택이고 명백이다”느니 하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길거리의 약장수가 이것저것 끌어대어 맞지도 않는 효능을 늘어놓으면서 약을 강매하는 꼴이다. ‘신심명’의 ‘명백’까지도 부정하면서 의기양양해 하는데 잘난 체하지 마라. 잘난 체하면 체한 만큼 추태다.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고, 새가 날면 깃털이 떨어진다.” 명백에 대해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어두워지고, 그만큼 흔적이 남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좋은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

조주 선사가 삼조 대사 ‘신심명’에 나오는 명백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를 쓰더니, 이번에는 원오 선사가 조주 선사가 남긴 말의 흔적을 지우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당신은 이제 원오 선사가 붙인 착어의 흔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그곳에 ‘지극한 도’가 있다. 일체의 비교를 멈추고, 일체의 취함과 버림도 그만 두고 ‘그냥’ 맨몸으로 조용히 앉아 있어 보라. 이파리를 다 떨군 나목이 가을바람을 맞고 있듯이.

<본칙> 나는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 (착어 ← 도적의 정체가 탄로나 버렸네. 이 늙은이, 어디로 갈 참인가?)

말하는 순간 간택이 되어 버린다고 조주 선사는 방금 말했다. 이것은 조주 선사 자신의 말도 부정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밝힌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주 선사는 침묵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또 “나는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말을 할까? ‘수사천척 의재심담(垂絲千尺, 意在深潭)’, 즉 “길고 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뜻은 깊은 연못 속의 대어에 있다.” 편한 침묵을 저버리고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까닭은 당신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함이다. 자기모순을 범하고 점잖지 못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눈만 뜰 수 있다면.

이렇게 조주 선사가 말을 계속 이어가는 자체가 “나는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 내용과 합치되는 행위다. 깨달음의 침묵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자유자재로 말하는 이 자체가 명백, 즉 깨달음에도 머물지 않는 증거이지 않는가?

깨달았으면 버려라. 겸허와 자비가 거기서 나온다. ‘지극한 도’를 체득한 자의 무애자재한 움직임은 언제나 칠전팔도(七顚八倒)다. 한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눌러앉아 있지 않는다. 과감히 동적(動的)인 세상으로 나아가 아침부터 밤까지 바삐 땀을 흘리며 활동한다. 세상없이 바쁜 속에서도 바쁨을 모른다. 그러나 깨달았다는 흔적, 성자의 티는 어디에도 없다.

원오 선사는 “도적의 정체가 탄로나 버렸네”라 착어했다. “나는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조주 선사는 마침내 ‘지극한 도’를 힐끗 보여 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머리는 숨겼지만 꼬리는 감추지 않았다. 이어서 원오 선사는 “이 늙은이, 어디로 갈 참인가?”라는 착어를 붙였다. 명백에도 머물지 않겠다면 ‘지극한 도’의 경지를 어디까지 끌고 가겠다는 말인가? 끝도 한도 없지 않은가?

“나는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전통적으로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입실하여 견처를 보이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방장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아직도 머뭇거리느냐? 이치는 알고 있어도 살아 있는 행동으로 나오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이치가 앞서면 이치에 맞도록 견처를 보이려 한다.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진짜는 반대다. 자신이 체험으로 확실히 알게 되면 얼마든지 내보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선에서는 본인의 체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기의 온 생명력을 다해서 결사적으로 부딪쳐라. 화두 참구의 요(要)는, 오직 자기를 방하하여 무애자재한 경지를 사는 데 있다. 처음 화두를 들 때 확실히 참구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반생반사(半生半死)’,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진짜로 살고 진짜로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철저히 참구하라.”

<본칙> 너희들은 명백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가?” (착어 ← 허점을 드러내었군. 만만찮은 놈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거야.)

조주 선사는 말한다. 어떠냐? 너희들은 깨달음을 보물처럼 잘 모셔 놓고만 있지는 않는가? 목숨 걸고 장사를 해서 큰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이 돈을 금고에 넣어 두기만 한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돈을 잘 굴리고 굴려서 값지게 사용할 때 목숨 걸고 장사한 보람이 있는 것이다. ‘명백’ 곧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깨달음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깨달음에 걸맞은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고인 물이 썩어버리듯이 깨달음도 부패하여 냄새만 풍기게 된다.

이 구절에 대해 원오 선사는 “허점을 드러내었군”이라는 착어를 달았다. 명백은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니라고 말한 이상 상대는 이미 그 뜻을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다시 “명백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가?” 하고 물으면, 돌아올 답은 뻔하다. 머리를 굴리는 자는 대번에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겠느냐고 응수하기 마련이다. 긁어 부스럼을 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것을 놓치지 않고 이 뒤에 승의 날카로운 반론이 이어진다. “만만찮은 놈이 한 명 정도는 있는 거야”라는 착어는 이 승을 두고 한 말이다.

한편, 원오 선사의 착어를 이렇게도 볼 수 있다. 조주 선사가 또다시 “너희들은 명백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가?” 하고 물어본 것은 참다운 스승의 노파심의 발로다. 명백에 주저앉는 것이 ‘지극한 도’가 아니라는 것을 재삼 확인시키는 노파심.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는 만큼 긁어 부스럼 내는 허점이다.

그러나 허점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는 만만찮은 사람이다. 조주 선사는 물론이고 이 공안을 본칙으로 가려 뽑은 설두 선사와 같은 만만찮은 위인도 한 사람 정도는 있는 법이다. 어디 이 둘뿐이겠는가? 깨달음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하품할 자가 있다면 석가모니나 역대 조사들도 망설이지 않고 허점을 드러낼 것이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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