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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장엄

기자명 신대현

처음 봉안 그대로 출토된 사리장엄…백제 공예미술의 정수

▲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병, 사리호, 사리함 등 사리장엄.

불교공예 중에서 가장 손길이 많이 가고 정성스럽게 만들게 되는 것이 사리장엄(舍利莊嚴)이다. 사리장엄이란 탑에 봉안된 불사리를 담은 용기들을 말하는데 병·호·합·상자 등 여러 형태로 만들어진다. 불교공예 대부분 공양이나 예불을 올릴 때 사용되는 공양구(供養具)로서 그 자체가 불상이나 불화 같은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

2007년 발굴된 온전한 사리장엄
백제의 수준높은 미술문화 증명
“무령왕릉 이후 최고 발굴” 평가

유리 아닌 금제 사리병 주목받아
청동제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은
해석 차로 연대논쟁 불러 오기도

백제 자체 기술로 제작된 유물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 의미도 커

하지만 사리장엄만큼은 가장 존귀한 대상인 부처님의 사리를 담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공양구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사리장엄은 가능한 한 최고의 기술과 노력으로 만들려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의 공예 수준을 가늠하는데 가장 좋은 척도가 되기도 한다. 사리장엄을 ‘사리구(舍利具)’라고도 많이 썼다. 이 말은 ‘도구’를 연상시켜 어감이 안 좋은 편이다. ‘사리갖춤’이라는 말도 ‘사리구’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불교미술에 있어서 ‘장엄(莊嚴)’이란 장식(裝飾)이라는 말로는 다 담아내지 못하는 깊고 웅장한 의미가 있으니 ‘사리장엄’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나은 것 같다.

▲ 왕흥사지 발굴 현장 전경.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리장엄이 전하는데, 미술품으로서의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볼 때 왕흥사 사리장엄은 감은사 및 미륵사 사리장엄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리장엄’의 하나로 꼽을 걸작이다. 백제의 고도 부여(扶餘)의 왕흥사 절터를 수년째 발굴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목탑지에서 사리장엄을 발견한 것은 2007년 10월, 이때 온전한 상태의 사리장엄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백제 유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처음 봉안한 그대로 출토된 백제 사리장엄은 처음이었고 이를 통해 백제의 수준 높은 미술과 문화를 알 수 있었기에 사람들을 흥분했고, 고고학자들은 ‘무령왕릉 이후 백제 최고의 발굴’이라고 환호했다.

왕흥사지는 부여군 규암면 신리, 부여 읍내에서 바라보면 백마강 건너편의 울성산성 남쪽 기슭에 자리한다. 아주 오래 전에 폐사되어 드넓은 절터만 남아 있었는데 1934년 ‘왕흥’이라는 이름이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이곳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제의 대표적인 명찰 왕흥사 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전부터 이곳을 ‘왕언이 부락’이라고 부른 것도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왕흥사는 ‘삼국사기’에 백제에 불교를 널리 전한 법왕(法王) 시절인 600년 1월에 창건을 시작했다고 나온다. 절을 지을 때는 주변의 입지를 아주 신중하게 고르게 마련인데 특히 왕흥사 같이 국책사업으로 만드는 대찰은 절터 선정에 더욱 고심했을 것이다. 왕흥사는 ‘삼국유사’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하고 있다(附山臨水)’고 표현되었을 만큼 배산임수의 전형으로 꼽힌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시선이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왕궁터와 거의 일직선상으로 연결되는 점도 흥미롭다. 왕실과의 밀접한 관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실제로 창건 이후 왕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와 이곳서 향화를 올리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러 자주 다녀갔다고 ‘삼국사기’에 나온다.

왕흥사 사리장엄은 탑 맨 아래에 놓인 기둥 돌인 심초석의 중앙을 파내 마련한 공간에 봉안되어 있었다. 청동 사리함 안에 은제 사리호가 있고, 이 사리호 안에 금제 사리병이 담겨 있었다. 금·은·동의 3대 귀금속이 모두 등장한 것인데 그만큼 사리장엄을 귀중하게 여겨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국내의 모든 사리병은 유리로 만들진 데 비해 왕흥사에서는 금으로 만든 게 특이하다. 국내에서는 처음 확인된 금제 사리병이었다. 유리가 아니라 금으로 사리병을 삼은 것은 기술적으로 유리용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하지만 이는 백제의 공예를 과소평가한 말이다. 사리장엄과 함께 발견된 수백 개의 유리 중 상당수가 백제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서다. 사리병은 외관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늘씬하다기보다 아담하고 적당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을 백제 미술의 특징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높이 6cm로 사리병보다 조금 큰 사리호는 99%이상 순은으로 분석되었다. 공을 연상케 하는 둥근 몸체에 꼭대기에는 보주형 손잡이가 달려 있고, 그 아래는 음각으로 8잎의 연꽃무늬를 아주 섬세하게 새겨 넣었다. 연꽃은 불교미술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장식인데, 신라에서는 볼륨감이 넘치고 윤곽선이 뚜렷한 데 비해 백제의 연꽃은 과장되지 않고 둥그스름한 게 특징이다. 은제 사리호의 연꽃 장식에서도 역시 백제 미술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청동제 사리함도 사각이 아닌 원통형으로 곡선미가 강조된 디자인을 하고 있다. 성분은 구리와 주석으로 합금된 청동이다. 뚜껑 위에 연봉형 꼭지가 있고, 꼭지 아래로 여러 개의 접합흔적이 남아 있어 처음에는 여기에 꽃 장식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몸체 겉면에는 사리를 봉안한 배경을 적은 글이 있다.

왕흥사 사리장엄이 중요한 것은 사리장엄 자체가 백제 공예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청동 사리함 겉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 29자의 짤막한 글이지만 아직도 해석이 분분할 만큼 내용이 함축적이고 다양한 각도의 분석이 필요한 문장이다.

“정유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지었다. 본래 사리가 2매였다가 사리를 봉납할 때 신령한 조화로 인해 3매로 바뀌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王昌 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

▲ 청동제 사리함의 명문.

앞 문장은 사리를 봉안한 시기와 인연을 말하고 있다. 정유년은 577년으로 이 해 2월에 ‘백제왕 창’이 먼저 죽은 자기의 아들을 위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창은 곧 위덕왕(재위 564~598)이며 그때까지 고구려와 신라에 눌리던 백제의 국격을 비약적으로 높였던 인물이다. 1991년에 발견된 창왕명(昌王銘) 사리감(舍利龕) 명문에도 그의 이름이 나와 사리장엄에 이름이 두 번 등장하는 역사상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왕흥사지 사리장엄에 새겨진 명문이 알려지자마자 커다란 논쟁이 일어났다. 577년이라는 창건연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600년보다 무려 23년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서가 일거에 부정확한 사료로 매도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그런데 명문 중의 ‘立刹’을 ‘절을 짓다’가 아니라 ‘탑을 세우다’로 읽으면 이런 의문이 해결되는 것 같다. ‘刹’을 사찰이 아니라 목탑의 찰주(刹柱)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다. 찰주는 목탑 내부 중앙에 세우는 기둥으로 석탑과 달리 목탑에서는 찰주가 구조상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탑을 세웠다는 것을 ‘立刹’이라고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렇다면 사리함 명문대로 577년에 탑을 먼저 세운 것이고,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23년 뒤인 600년에 절을 창건한 것으로 이해하면 앞뒤가 잘 맞는다.

▲ 공양품 일괄.

사리함 명문 중 뒷문장인 “본래 사리가 2매였다가 사리를 봉납할 때 신령한 조화로 인해 3매로 바뀌었다.”라는 대목도 흥미롭다. 사리 매수가 변하는 현상을 변사리(變舍利)라고 한다. 중국 육조시대(229~589년)에 쓰인 ‘관세음응험기’에 ‘백제국의 익산 제석사 목탑에서 발견된 사리병에서 사리 매수가 변하는 게 목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다른 고대의 기록에도 이런 이적(異蹟)은 자주 나온다. 왕흥사 사리장엄에 적힌 이 문장도 바로 이 같은 변사리의 이적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발굴 당시 왕흥사의 사리병에서는 사리가 발견되지 않았고 지하수로 추정되는 맑은 물만 가득 담겨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의아해 했지만, 처음 2매가 3매로 변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모습을 감추며 변사리 중인 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사리장엄과 더불어 금·은·옥기 등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이 나왔는데 한결같이 백제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금으로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는 실제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 왕흥사가 창건될 때 왕실에서 시주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 이른바 심엽형(心葉形), 곧 하트 모양을 한 허리띠 장식은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귀걸이 장식과 아주 비슷해 왕실 미술이라는 공통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 백제 유적에서는 드물었던 유리옥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도 백제 공예미술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왕흥사 사리장엄은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사리장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라는 데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 또 그 동안 여러 유적에서 사리장엄의 일부가 발견되어 오기는 했었지만 이처럼 사리장엄 일체가 온전하게 그리고 봉안한 처음 그대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로써 백제 문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결정적 자료로 삼을 수 있었다. 이 사리장엄들은 백제 자체 기술로 제작됐으며 그 수준이 대단히 높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보다 50년 가량 빠른 무령왕릉 출토품의 상당수가 중국의 영향이 보이는 데 비해 왕흥사 사리장엄에서는 백제 특유의 미술 감각이 잘 드러나 있다. 백제의 정치적 자주성과 문화적 성숙이 반영된 것이다.

왕흥사 사리장엄은 또한 부여 능산리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와의 연결고리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1993년 출토된 이래 이 향로는 그 뛰어난 조형성으로 인해 중국 제작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왕흥사지 사리장엄을 만들 만큼의 난숙하고 세련된 기술로 보건대 백제금동대향로 역시 백제 장인이 만들었다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백제는 높은 수준의 문화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은 신라에 비해 상당히 적은 편이었다. 또 백제의 고도 중에서도 부여는 공주의 무령왕릉, 익산의 미륵사지에 비견할 만한 비중 있는 유적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들을 왕흥사지 사리장엄이 한꺼번에 씻어 주었다. 백제의 불교미술은 왕흥사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새로 쓰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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