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름답게 치장된 말꼬리 잡기”

기자명 우희종
  • 기고
  • 입력 2015.05.04 11:36
  • 수정 2015.05.11 09:21
  • 댓글 28

우희종 교수, 다시 신규탁 교수 비판

우희종 서울대 교수가 동국대 구성원 및 조계종 집행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을 계기로 장영우 동국대 교수와 신규탁 연세대 교수 및 우희종 교수 사이에서 잇따라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신규탁 교수가 4월29일 우희종 교수에게 ‘잘못을 비판하면 되었지, 사람이나 단체를 공격해서야’라는 기고문을 통해 “본 사안에 대한 소모적이고 사실에 접근도 못한 논쟁은 여기에서 그친다”고 밝힌 가운데 우희종 교수가 5월4일 다시 ‘아름답게 치장된 말꼬리 잡기’라는 제목으로 기고문을 보내와 이를 전문 게재한다. 편집자 주

총무원식 화쟁의 문제점은
적당하게 분쟁없이 마무리

권력자 유리한 왜곡 주장
약자에겐 전혀 해법 안돼

신교수 본질 아닌 ‘말꼬리’
권력층 힘 실어주는 결과

양비론 접근으로 여론호도
정토학회장 주장도 초라해

 
굳이 이 말까지 하려하지 않았지만 신규탁 교수가 굳이 답 글을 주니 함께 나누고자 글을 쓴다. 세상엔 많은 논란과 의견 대립이 있다. 그러나 외견상으로 논란과 의견대립이라고 해서 다 유사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크게 보아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특정 상황이나 사건에 있어서 양측 모두 사안의 바람직한 해결을 위해 말하고 있지만 각자의 한계나 입장 때문에 한 면만을 말하거나 주장하게 되어 의견 다툼이나 논쟁으로 전개되는 경우고, 아니면 양측이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힘과 권력을 가진 측이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된 주장을 하고 있어서 다른 한 쪽의 옳은 주장과 대립하고 부딪치는 경우다.

전자의 경우가 원효가 말한 화쟁 방식으로 회통해야 할 상황이라면, 후자는 파사현정의 모습으로 풀어가야 한다. 종종 지적받고 있는 총무원식 화쟁의 문제점은 후자의 경우마저 화쟁이란 이름으로 접근하면서 서로 적당히 분쟁 없는 형태로 마무리해 버리기 때문에 결국은 권력자의 입장을 유지하게 하는 데 기여하고 정작 현장의 힘없는 이들에게는 전혀 해법이 이뤄지지 않는데 있다.

그렇기에 권력을 돕고자 하는 곡학아세의 글을 쓰는 이들은 언제나 내용을 직접 거론해 검토하기보다는 젊잖은 목소리로 ‘여러 이야기로 시끄러운데 서로 잘 해 봅시다’ 식의 논리로 사태를 호도시킨다. 다시 말하면 논란의 시시비비가 확실해지면 불리해지는 측이 종종 형식과 방법을 거론하면서 현재 대립되고 있는 양 측 주장에 같은 무게를 실어주는 행태다. 얼핏 보면 공정한 태도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왜곡된 주장을 올바른 주장과 대등하게 만들어 주고, 더 나아가 내용의 진위나 왜곡 여부는 불문하고 형식과 방법에 주목하게 하여 논란의 본질을 가려주는 전형적인 지적 사기에 가까운 방식이다.

사람들은 종종 논쟁이 있을 때 말문이 막힌 자들이 상대방의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경우를 접한다. 상대방 주장에 대한 자신의 견해나 입장을 명확히 밝혀 반론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말투가 맘에 안든다든지 기분나쁘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으로서 미숙한 사람들이 주로 보여주는 방식이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사람들은 말꼬리에 해당하는 ‘형식과 방법’에 천착하게 된다. 종종 학자들 중에도 이런 글을 볼 수 있으니 본질을 피해가는 비겁한 글쓰기라 부른다. 더욱이 그것이 권력을 가진 측에 왜곡된 입장을 비호하게 되는 경우, 권력에 아부하는 곡학아세의 비겁한 글쓰기가 된다.

그런 면에서 형식과 방법을 들고 나온 신 교수는 총무원 외압과 총장 후보 스님의 표절 여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던 중에 갑자기 형식과 방법이라는 말꼬리 잡기로 나온 것임을 알 필요가 있다. 스스로 말했듯이 외압과 표절이라는 논란 내용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고 형식과 방법을 이야기 한단다. 그럼 굳이 외압과 표절이 논란되는 이 시점에서 왜 내용과 상관없는 형식과 방법에 대한 글을 썼는지 묻고자 한다. 격조 높은 글쓰기를 가르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우아한 형식의 논란을 위해 도움주기 위한 사명감이었는가. 장 교수의 글을 언급하면서 장 교수 역시 내 글의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고 말한 것을 보니 신 교수의 글쓰기와 글 읽기가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설령 신 교수의 주장처럼 내용에 대한 논란 중에 단지 글쓰기 형식과 방법만을 말하고자 한 것이라 해도 두 사람의 논의가 마무리 되지 않고 진행되는 과정 중에 불쑥 글쓰기 이야기를 중간에 끌고 들어온 것은 생각이 전혀 없거나 그야말로 형식과 방법을 존중하는 이로서는 매우 무례한 글쓰기임을 알아야 한다. 총무원이라는 권력집단의 무리한 개입으로 발생한 대학 상식과 대학문화의 건강함을 훼손시킨 상황에서 그 상황의 내용 검토는 차치하고 방법과 형식을 이야기한다면서 양측의 입장을 대등하게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권력층의 왜곡된 주장에 힘 실어주는 것임은 교수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신 교수가 정작 본인도 수의학 운운하면서 글을 썼으면서 상대방의 문창과, 철학과 등의 표현을 지적하는 것을 보면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낯설다. 모두 유사한 맥락에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어쨌든 신교수가 나의 수의학 및 불교 관련 글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점에 있어서 본인의 지적이 뒷받침되는 것인지 명확히 거론하지 않았기에, 본인이 정토학 전공자에 비해 정토학회 학회장으로 더 적임자라는 논거로 겨우 본인 개인의 학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형식으로도 너무 초라하다는 관점을 수용할지 모르겠다.

끝으로 신 교수 스스로 자신이 언급한 ‘민주시민의 갖추어야 할 요소 중의 하나가 위에서 말한 사회 현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갖고, 그 견해를 표현하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지는 것이다’라고 한 말의 뜻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 말은 왜곡된 권력 행사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바로 잡기 위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이 힘에 근거해 왜곡된 내용으로 무리한 주장을 하면서 이득을 취할 때 이를 바로 잡기 위한 주장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런데 잘잘못의 논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회피하면서 외견상 격식 있게 형식과 방법이나 따지고, 경우에 따라서 양비론이나 양시론의 접근은 치열한 논란으로부터 사람들을 호도시키는 측면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혹시 그것을 건전한 논쟁으로 착각한다면 세상물정 모르는 책상 지식인이거나 아니면 그런 글쓰기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주의를 혼란스럽게 하여 권력을 비호하려는 비겁한 지식인들이라는 점을 새삼 밝혀둔다.

[1294호 / 2015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