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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5)

“때려눕히려 했더니, 삼천리 밖으로 멋지게 도망쳤네”

▲ 조주 스님 향훈이 깃든 백림선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대작불사로 지금의 사격을 갖췄다. 전각들 너머로 8면 7층의 조주탑이 솟아있다.

<본칙> 그때 한 승이 물었다.
“이미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착어 ← 한 방 먹여야 한다.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

꼼짝 못하게 만들려던 수행승
이미 삼천리 밖에 있는 조주

조주와 수행승 사이 문답에는
진리와 허구 언어표현 드러나
잔꾀로 모방한다면 금세 들통

조주의 ‘나도 모른다’는 대답
말을 초월한 말 이전의 소식
달마대사의 ‘모른다’와 상통

그물에 걸리면 자유롭지 못하다고 그렇게 일러 주었는데도 달려드는 놈은 어쩔 수가 없다. 조주 선사는 ‘지극한 도’는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되나, 이 내용을 말로 정립·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간택이고 고정화된 ‘명백(깨달음)’이 될 뿐이라고 부정했다. 이어 자신은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밝히고, “너희들은 명백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가?” 하고 물었다. 말하는 순간 어긋난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계속 말을 이어간 까닭은, 다시 말해 자기모순까지 범하면서도 계속 말하여 가르친 까닭은 상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 수행승이 “이미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하며 응수하고 나왔다. 조주 선사 같은 거장 중의 거장에게 법거량을 하겠다고 나서는 자체가 참으로 용기있는 행동이다. 금고에 돈이 없으면 지킬 것도 없듯이,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에 소중히 여길 것도 없다는 대응이다. 흠잡을 데 없이 지당한 말이다. “그렇게 당연한 걸 왜 묻습니까?” 하는 느낌까지 묻어 있어, 질문한 조주 선사를 도리어 무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원오 선사는 이 수행승의 용기 있는 행동에 대해 “잘 해냈다. 조주 선사라도 한 방 먹어야 할 부분이다”하는 식으로 착어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구나”라고 덧붙였다. 이런 놈에게는 아무리 언설이 자유자재한 조주 선사라도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다고 농을 던진 것이다. 세간의 상식에 맞추어 원오 선사는 이렇게 놀아 주고 있다.

그런데 이 수행승의 질문을 과연 잘했다고 칭찬할 수 있을까? 이 수행승은 소위 ‘똑똑하고 명석한 사람’이다. 이 수행승을 통해 세상에서 ‘똑똑하고 명석하다’고 하는 것의 진상을 알아보자.

말은 어떤 의미를 표시한다. ‘김칫독’이라는 말은 ‘김치를 담아 두는 항아리’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김칫독’이라 불리는 그것은 그 의미대로 실제로 김치를 보관하는 작용을 한다. 만약 ‘김칫독’이라는 말이 없다면 우리는 생활에 큰 불편을 겪을 것이다. 이처럼 말은 필요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말의 의미에 부합하는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칫독’이라 불리는 저것은 그 말 의미대로 원래부터 ‘김치를 담아 두는 항아리’가 아니며, 영원히 변치 않는 그것도 아니다. 거기에 용변을 보면 요강일 뿐이며, 어린애에게는 장난감일 뿐이다. 만약 의미에 부합하는 영원불변의 뭔가가 있다면, 그것을 ‘실체(實體)’, ‘아(我)’ 또는 ‘자성(自性)’이라 부른다. 그러한 실체·자성이 없다는 것이 ‘공(空)’이다.

이와 같이 ‘일체개공(一切皆空)’, ‘모든 것은 공(空)하다’는 것이 진실이다. 다시 말해, 말의 의미에 부합하는 영원불변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언어습관을 통하여 말이 가리키는 사물에 그 의미대로 실체가 있다고 보는 습성을 부지불식간에 지니고 말았다. ‘김칫독’이라 불리는 것을 언제나 ‘김치를 담아 두는 항아리’로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어린애가 가지고 놀아도 ‘김칫독을 장남감으로 가지고 논다’고 보지, 이미 그것은 김칫독이 아니라 장남감이라고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집착이다.

나아가 어떤 것을 ‘장난감’이라 하는 순간에도 그것의 진실은 장남감이 아니다. 이것을 ‘장난감은 공하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말이 의미하는 바대로 세계가 실제로 그렇다고 보면 큰 착각이다. 따라서 말의 의미에 맞추어 따지고 추구하는 것으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말의 통상적인 의미 연관에 따라 알려고 해서는 결코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언어표현이 매우 명석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통상적인 의미 연관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질문한 수행승과 같이 논리정연한 말과 추궁을 한다고 해서 깨달음에 가까워졌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조주 선사와 수행승 사이에 전개되는 문답에는 언어표현의 두 가지 차원이 잘 나타나 있다. 말의 통상적인 의미 연관에서 자유로운 언어표현과 그것에 묶인 언어표현. 말을 하면서도 말에서 자유로운 언어표현과 말의 질서·논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언어표현. 말을 통해 진리를 보여 주는 언어표현과 말의 허구적인 의미에만 매달리는 언어표현. 전자의 언어표현은 조주 선사의 말이고, 후자는 수행승의 말이다.

주의할 점은 경지에 이르지도 못한 자가 섣불리 조주 선사와 같은 언어표현을 흉내 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잔꾀로 모방하여 본인이 그러한 언어표현을 한다면 금세 들통이 나 실소만 자아낼 뿐이다. 자기 수준에서 액면 그대로 그 언어표현을 받아들인다면 독사를 잘못 잡은 것처럼 그 자신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본칙> 조주 화상이 말했다.
“나도 모른다.” (착어 ← 이 늙은이를 때려눕히려 했더니, 삼천 리 밖으로 멋지게 도망쳤네.)

‘말을 초월해야 한다’, ‘깨달음은 말을 초월해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대단히 매혹적인 말이다. 그런데 일단 말의 그물에 걸려들면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렵다. 말은 우리를 칭칭 얽어맨다. 어떻게 말에서 초월할 것인가? 화두를 들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전기 철학 시대에 말했다. 그러나 선에서 스승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이라고 제자들을 다그치고, 본인 스스로도 보인다. 반드시 언어표현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몸짓과 같은 신체적 표현을 하기도 한다. 조주 선사는 여기에서 “나도 모른다(我亦不知)”라는 언어표현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 있다. 과연 ‘구순피선(口脣皮禪)’의 달인이다.

여기서 “모른다(不知)”는 제1칙 ‘무제와 달마의 문답’에서 “짐과 마주한 그대는 누구요?”라는 양무제의 물음에 달마대사가 “모릅니다(不識)”라고 대답한 것과 상통한다. “이미 명백에도 머물지 않는데 무엇을 소중히 여기겠습니까?” “나도 모른다.” 이때의 “모른다”도 제1칙에서 설명했듯이 ‘모른다’라는 말을 초월한, 말 이전의 소식이다. 다시 말해 조주 선사의 “모른다”는 ‘안다’의 반대인 ‘모른다’가 아니다. ‘지극한 도’의 경지는 당신이 알고 있는 ‘모른다’라는 의미의 연장선상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세계이다. 이것은 당신이 ‘안다’고 해도 틀리고 ‘모른다’고 해도 틀리는, 어디에도 발붙일 틈이 없는 그런 “모른다”의 세계다.

조주 선사는 ‘말할 수 없는 세계’, 간택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지극한 도’를 “모른다” 한마디로 온통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조주 선사가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 그의 언설은 자유자재하여 ‘설두무골(舌頭無骨)’, 혀에 뼈가 없었다. 온 천지에 드러나 있는 ‘지극한 도’를 모두 내보였다.

원오 선사는 “나도 모른다”에 대해 평창에서 이렇게 제창하고 있다.

“조주 선사는 결코 방(棒)이나 할(喝)을 퍼붓지 않고, 단지 ‘나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다. 만일 이 노인네가 아니라면, 수행승에게 이렇게 한방 먹으면 갈팡질팡할 이들이 많다. 이 노인네는 변화무쌍한 자재함을 갖추고 있었기에 이렇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작금의 선승들도 질문을 받으면 ‘나도 모른다, 알 수 없다’고 대답하건만. 어이 하랴! 가는 길은 같아도 가는 방식이 다르니.”


임제의 ‘할’이나 덕산의 ‘방’에 비견하여 조주 선사의 선풍을 ‘구순피선(口脣皮禪)’, 즉 ‘유연한 입술로 상대의 어리석음을 통렬히 깨우치는 선’이라 한다. 원오 선사도 “조주 선사는 결코 방이나 할을 퍼붓지 않고, 단지 ‘나도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그의 ‘구순피선’을 인정하고 있다. 단지 일상의 언어만으로 어떤 수행자도 자유자재로 교화한 조주 선의 원숙성·소탈함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그러고는 허물어져 가는 선방의 실태를 원오 선사는 개탄하였다. 임제의 ‘할’·덕산의 ‘방’, 조주의 ‘구순피선’ 등으로 서슬 시퍼렇던 총림의 기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선승들은 조주 선사의 “모른다”를 앵무새처럼 흉내만 내고 있다고. 이렇게 같은 길을 걷고 있어도 그 마음가짐이나 수행의 철저함이 다르니, “나도 모른다”고 말은 비슷하게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당사자의 차원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이것은 원오 선사 당시만의 일이 아니다. 선 수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들은 모름지기 깊이 반성하고 각성해야 할 부분이다.

원오 선사는 “나도 모른다”에 대해 “이 늙은이를 때려눕히려 했더니, 삼천리 밖으로 멋지게 도망쳤네”라고 착어했다. 수행승이 날카로운 질문으로 조주 선사를 꼼짝 못하게 하려 했으나 이미 조주 선사는 삼천리 밖에 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승은 “모른다” 이 한마디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삼천리 밖에서 조주 선사는 말의 논리에 갇힌 채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행승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조주 선사의 다음과 같은 심정이 읽히지 않는가? 자네, 제발 “모른다”는 이 한마디를 통로로 말의 굴레에서 뛰쳐나가 보시게. 이놈~!

장휘옥·김사업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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