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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 (6)

“도망칠 묘수가 있었군, 이 노련한 도적아”

▲ 조주 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는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다. 중국에서 백수(柏樹)는 측백나무다. 의미는 달라질 게 없다. 백림선사 관음원 앞 측백나무 너머로 조주탑이 보인다.

<본칙> 승이 말했다.
“화상은 모르신다면서 어째서 명백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착어 ← 자,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무 꼭대기까지 쫓아갈 거야.)

제자의 눈 뜨게 하려는 조주
‘똑똑한’ 수행승 머리만 굴려
자기 세계에 갇혀 계속 간택
묻고 물어도 망상의 연속뿐
가슴 찡한 배려도 눈치 못채

번뇌·깨달음 없는 무소유 ‘가난’
맨몸 나무 ‘그대로’ 바람 맞듯
가난과 하나 된다면 간택 멈춰

미(美)를 간택하는 마음은 이미 추(醜)다. 스스로 ‘추’인 ‘추’는 어디에도 없다. 이 수행승은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따져서 물으면 묻는 만큼 간택이라는 것을 모른다. 간택을 간택인 줄도 모르고 간택하는 놈에겐 자유는 언제까지나 영원한 이상향이다. 말의 논리로 자승자박하고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다.

수행승은 “나도 모른다”의 위력이 벽력같이 내지르는 ‘할’이나 억수같이 쏟아지는 ‘방’보다 세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모른다” 이 한마디의 비할 바 없는 무한한 가치를 알 때, 그때 비로소 제자의 눈을 뜨게 하려는 조주 선사의 가슴 찡한 배려도 알 것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는지?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원오 선사는 이 구절에 대해 “자,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나무 꼭대기까지 쫓아갈 거야”라는 착어를 붙였다. 이렇게 말꼬리만 잡고 늘어지는 놈을 더 이상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질척이는 진흙탕에서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수행승은 어디로 간들 끝까지 쫓아올 것이다. 막다른 곳에 이르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죽을 수밖에 없다. ‘대사일번(大死一番)’, 지금까지의 ‘나’가 완전히 죽는 것이다. 이때 ‘지극한 도’의 경계는 저절로 나타난다.

<본칙> 조주 화상이 말했다.
“질문은 그것으로 되었다. 절하고 물러가라.” (착어 ← 도망칠 묘수가 있었군. 이 노련한 도적아!)

“질문은 그것으로 되었다.” 묻고 또 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망상의 연속일 뿐, 남는 것은 피로밖에 없다. 시간이 생명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은 꿈을 꾼다. 죽은 그가 염라대왕 앞에서 자신의 죄를 판결 받는데 그 죄가 ‘시간을 낭비한 죄’라는 꿈이다. 시간을 낭비하여 죽이는 놈은 살생죄를 범하는 것과 같다. 살생의 죄보다 큰 것은 없다. 망상이나 졸음, 무기에 빠져서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지 말고 확실히 참구하라.

“절하고 물러가라.” 이 말은 궁극적 한마디, 곧 말후(末後)의 일구(一句)다. 더 이상 오를 바 없는 마지막 경계이다. 부르면 대답하는 메아리 소리. 메아리는 머리를 굴리거나 억지로 대답하지 않는다. ‘무심(無心)’으로 대답한다. 자연스럽고 즉각적이다. 온 천지에는 그 소리만 있는데 아무런 걸림이나 장애가 없다. 메아리는 한 소리가 아니다. 이 골짜기에서는 이 소리, 저 골짜기에서는 저 소리. 울린 뒤에는 흔적도 없다.

참다운 선자(禪者)는 메아리와 같이 답하고 보고 듣는다.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무심의 묘용(妙用)이다. 이것이 참다운 선자의 대자유이며, 창조적인 삶이다. 조주 선사가 “절하고 물러가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무심의 묘용에서 나온 말이다.

“절하고 물러가라”는 선 수행자가 꿰뚫어야 할 하나의 관문이다. 당신은 절할 때 무슨 생각으로 절하는가? 절할 때 무엇이 있는가? 진리는 바로 내 발밑에 있다. “절하고 물러가라.” 진정으로 절하고 물러갈 때 무심의 창조적인 삶을 산다.

원오 선사는 이 구절에 대해 평창에서 이렇게 제창하고 있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부분 대답에 궁할 뻔했다. 그러나 조주 선사는 막힘없는 거장이었기에 ‘질문은 그것으로 되었다. 절하고 물러가라’고 그에게 말했을 뿐이었다. 이 승은 전과 다름없이 이 노인네를 어떻게도 못하고, 원통한 생각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수행승은 조주 선사가 “나도 모른다” 하고 ‘이것(這箇)’을 그대로 보여 주었을 때 보지 못했다. ‘저개(這箇)’ 곧 ‘이것’이란 선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당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수행승은 자기 세계에 갇혀 간택만 계속 하며, 그렇게 해서 나온 질문만 던졌다.

조주 선사가 “절하고 물러가라”고 하며 재차 ‘이것’을 보여 주었다. 이쯤 되면 선기(禪機)가 있는 수행승은 뭐라고 한마디 한다. 그런데 이 ‘똑똑한’ 수행승은 여전히 머리만 굴리고 있다. 원오 선사가 “이 승은 전과 다름없이 이 노인네를 어떻게도 못하고, 원통한 생각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고 제창한 것에서 수행승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원오 선사의 안타까운 심기가 묻어난다.

조주 선사가 “절하고 물러가라”고 말했을 때 수행승이 간택만 하지 않았으면 원통하고 말고도 없었을 것을. 지극한 도는 바로 거기에 있었는데. 간택을 간택인 줄 알아채지 못하고 원통해 하는 수행승. 이것은 이 수행승만의 일이 아니다. 깊이 새겨 반성할 일이다.

원오 선사는 “질문은 그것으로 되었다. 절하고 물러가라”에 대해 “도망칠 묘수가 있었군. 이 노련한 도적아!”라 착어했다. 역시 조주 선사는 역량 있는 종사이다. 무의미한 토를 달지 않고 본분사(本分事)를 바로 내보여 수행승의 분별지(分別知)와 끝맺음을 지었다는 뜻이다.

머리 굴리면 굴릴수록 지극한 도와는 멀어진다. 절이나 하고 물러가라. 절하고 물러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지 않은가? 이 얼마나 예리한 한 방인가? 조주 선사는 말로써 수행승의 말을 빼앗아 그 수행승을 대자유의 길로 인도했다. ‘탈적창살적(奪賊槍殺賊)’, 빼앗은 적의 창으로 적을 죽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조주 선사의 이 뛰어난 역량, 참으로 노련한 도적이다. 조심조심. 적이 적을 안다.

‘조주록’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한 승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가난한 자가 왔습니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가난하지 않다.” “화상께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 줄 수 없겠습니까?” “오직 가난과 함께하라.”

한 수행승이 조주 선사를 찾아와 간청했다. “가난한 자가 왔습니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조주 선사 같은 거장을 찾아와 자신의 심경을 ‘가난한 자’라고 거침없이 표명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은 아니다.

그는 “가난한 자가 왔습니다.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무일물(無一物)의 경지를 기세 좋게 내보였다. 번뇌도 깨달음도 없는 무소유의 ‘가난한 자’, 청정무구해서 구제의 손길조차 뻗칠 수 없는 ‘가난한 자’이다. 이 질문에는 천하의 조주 선사라 한들 “이렇게 가난한 자를 무슨 수로 구하시겠습니까?” 하는 저의가 숨어 있다.

조주 선사는 곧바로 “가난하지 않다”고 말했다. 가난하다고 말하는 한 아직 진짜 가난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게송이 있다. “‘거년빈 유추무지(去年貧有錐無地)’, 지난해의 가난함은 송곳은 있으나 꽂을 자리가 없더니, ‘금년빈 무추무지(今年貧無錐無地)’, 올해의 가난함은 꽂을 송곳조차 없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진짜 가난함이 아니다. ‘꽂을 송곳조차 없다’고 말하는 한 아직 ‘있다’의 그늘 속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승은 구제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오직 가난과 함께하라”고 했다. 가난에 대해 이런저런 관념의 집을 짓고는 거기에 틀어박혀 있지 마라. 그것이 간택이다. 잎사귀 하나 없는 나목이 맨몸으로 ‘있는 그대로’의 바람을 맞듯이, 그렇게 가난과 하나가 되라. 그때 가난은 더 이상 가난이 아니다. 간택을 멈추고 “오직 가난과 함께하라.” 이것은 가난에 생긴 흠집을 치유하는 한마디인 동시에, 온갖 것에 흠집을 내고 마는 간택을 치유하는 한마디이다.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의 송(頌)은 다른 칙의 송과는 달리, 게송 대부분이 전통적으로 화두로 참구되고 있다. 이것은 이 칙의 송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제2칙에 나오는 설두 선사의 송 전체는 물론, 이에 대한 원오 선사의 착어와 평창도 함께 다루기로 했다.

<송과 착어>
(송은 굵은 글씨로 표기했고, 송의 각 구절에 대한 원오 선사의 짤막한 코멘트인 착어는 ( ) 속에 넣었다.)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 삼중의 공안이네. 입에 서리를 가득 머금고 무얼 말하겠는가?)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것이다. (←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는 법. 산산이 흩어져서 아련하구나.)
하나에 여럿 있고, (← 분석하는 것이 좋다. 똑같기만 해서는 매듭을 지울 수 있을까?)
둘에 둘은 없다. (← 4, 5, 6, 7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겠군. 아무리 말을 해 본들 무엇 하나?)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 (← 눈앞에 나타나 있네. 머리 위에도 끝이 없고 발아래도 끝이 없다.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은 금물.)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 (←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해골은 의식이 다해 감정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 널 속에서 눈을 딱 부릅뜨고 있군. 노(盧) 행자는 그의 동문이네.)
고목은 용처럼 울음소리를 내니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 이것 참! 고목에 다시 꽃이 피니, 달마대사께서 동토(東土)에 노니시네.)
어렵구나 어려워. (← 삿된 법은 유지할 수 없다. 뒤집어서 말하고 있을 뿐. 여기를 어디라고 생각하여, 어렵다느니 쉽다느니 하는가?)
간택이든 명백이든 그대 스스로 보라. (← 눈먼 이. 남에게 떠맡겼는가 생각했더니, 고맙게도 스스로 본다고 하는구나. 내가 알 바 아니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4호 / 2015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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