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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지하-초파일 밤

기자명 김형중

연등 보며 간절한 소원 빈 옥중시

꽃 같네요/ 꽃밭 같네요/ 물기 어린 눈에는 이승 같질 않네요/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 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벽돌담 너머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오색영롱한 꽃밭을 두고/ 돌아섭니다.

쇠창살을 등에 지고/ 침침한 감방 향해 돌아섭니다. /굳은 시멘트벽 속에/ 저벅거리는 교도관의 발자국 울림 속에/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고개 가로저어/ 더 깊숙히 감방 속으로 발을 옮기며/ 두 눈 질근 감으면/ 더욱더 영롱히 떠오르는 사월 초파일/ 인왕산 밤 연등, 연등, 연등/ 아아 참말 꽃 같네요. ‘초파일 밤’

그냥 순수한 그 마음으로
꽃처럼 아름답게 밝혀진
연등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원

김지하(1941~) 시인은 남쪽 항구 목포가 고향이다. 그는 ‘대설(大說) 남(南)’(1982)에서 시와 노래가 있고 그림이 있는 예향 목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고향을 예찬하고 노래했다. 판소리 형식을 빌어서 하나의 시 제목으로 시집 한 권을 읊었다. 고은의 ‘만인보’에 맞서는 대단한 내공이고 필력이다.

그의 대표적인 시 ‘오적’ 또한 고전에 나타난 ‘오두(五蠹)’에 근거한 것처럼 그의 시와 사상은 고전과 우리 민족의 사상, 멋 그리고 역사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유신독재에 항거한 저항시인으로서 젊은 목숨을 바쳐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한 것은 일제 강점기에서 항거한 민족시인의 업적만큼이나 위대하다.

출옥 후 ‘후천 개벽사상’을 부르짖는 것은 심오한 철학을 겸비한 사상가로서 훗날 역사가 평가할 현재 진행형인 작업이다. 그리고 변절 논란은 사람은 성인이 아닌 이상 공과가 있으니 과오가 있으면 과오대로 평가하면 된다. 시인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어 그것을 성취시키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사람으로 육신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우리 역사의 살아있는 희생물이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초파일 밤’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인왕산에 밝혀진 연등을 바라보며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빈 옥중시다.

보통 옥중시는 ‘초개와 같은 목숨 바쳐 조국을 구하고, 칼날 같은 굳센 마음 부서져도 귀신이 되어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비장함을 드러내는 것이 상례인데, ‘초파일 밤’은 미움도 원망도 없다. 목숨을 바칠 조국도 나라도 없다. 마음을 내려놓았다. “시란 아침 이슬처럼 맑고 순수한 것을 최고의 품격으로 한다”고 한 시론처럼 시인은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꽃처럼 아름답게 밝혀진 연등을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있다. 절창이다.

“캄캄한 내 가슴의 옥죄임 속에도 부처님은 오실까요 연등은 켜질까요” 하고 겸손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영어에 갇힌 몸이라 오늘 갈 수 없다면 “갈 수 있을까요 언젠가는 저기 저 꽃밭 살아 못 간다면 살아 못 간다면 황천길에 만은 꽃구경 할 수 있을까요 삼도천을 건너면 저기에 이를까요” 하며 죽어서라도 가보고 싶다 노래하고 있다. 부처님이 오신 뜻은 고통 받는 중생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덜어주기 위해서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자비와 지혜의 등불로 광명의 빛을 밝혀주시는 부처님이다.

가난한 여인이 부처님을 위해 밝힌 등불 공양이 연상되는 시다.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왕사성에 갇힌 빔비사라왕을 위하여 위제히왕비가 영축산에 계신 부처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옥중시다. 캄캄한 감옥에서 시인 스스로 밝힌 자등명(自燈明)이다. 이 시를 읽으면 온 세상이 꽃밭이 된다. 내가 지금 꽃밭에서 살고 있음을 깨우쳐주는 시이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294호 / 2015년 5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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