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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응 스님에게 승려의 바른 길을 되묻다”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5.17 13:16
  • 수정 2015.05.17 13:19
  • 댓글 14

불교사회정책연구소장 법응 스님 비판

재가자 짐 덜어주는 것 같지만
불교 사회상 구현 재가에 전가
종단과 사찰들 재가육성 외면

한국 승려 병폐는 신념 부재
승려 수행 천착하며 지배등급화
출·재가자 역할 나누기 전에
승가 내부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법보신문에 기고한 ‘재가불자의 길을 묻다-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에서 오늘날 한국의 불자들이 승가에 편입되기를 희망하는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불교사회정책연구소장 법응 스님이 ‘현응 스님에게 승려의 바른 길을 되묻다’라는 제목으로 기고문을 보내왔다.

법응 스님은 기고문에서 “현응 스님의 주장은 재가불자들로 하여금 종단과 승려문제에 대해 짐을 덜어주는 것 같으나 불교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상 구현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재가자에게 돌리고 있다”며 “과연 그동안 종단과 사찰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도의 훌륭한 재가자들을 육성함에 얼마나 기여해왔는지도 의문”이라고 반박했다. 법응 스님은 특히 “현 한국불교와 승려의 병폐 중 하나는 신념 부재, 적당주의와 무책임성이다. 승려는 수행을 위한 수행에 천착하며 새로운 지배등급화 돼있다”며 “대승과 출재가자의 분상과 역할을 논하기 이전에 이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편집자

■다음은 법응스님 기고 전문

▲ 불교사회정책연구소장 법응 스님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법보신문’에 ‘한국 재가불자, 왜 승가에 편입되려 하나’라는 글을 기고했다. 현응 스님은 승려의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중차대한 위치다. 스님의 이력과 현재의 위치와 영향력이 지대하다. 이에 기고문 중 이해가 잘 안 되는 내용들이 있어서 의견의 제시와 더불어서 승려의 바른 길을 묻는다.

현응 스님의 글을 요약하면, 대승불교의 탄생 배경과 역사, 대승불교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승려와 재가불자의 한계와 역할을 명확하게 선을 긋고 상호간 침범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승려는 세상일에 전문적일 수 없기에 부처님의 혜명을 보전하고 찾아오는 재가자에게 불공과 법문을 하며, 선대들이 이룩한 불교재산을 관리하는 일이면 족하다고 했다. 재가자는 스님들의 영역인 수행체계나, 범계를 지적하지도 외호하려 들지도 말며, 세상에서 보살행을 구현하는 일에 전력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불교정신과 가치관이 작동되고 안 되고는 재가불자인 보디사트바(보살)의 책임이며, 현실에서 종단(승가)의 부족한 부분은 (월급을 받는)종무원의 역할 내에서 충분하니, 재가자는 승가의 일원이기를 바라지 말라하며 어쩌면 경고성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재가자가)출가자의 계율 준수를 감시하고 지적하는 그런 문제에 시간을 낭비하기는 너무 아까운 일이다”라는 대목은 특히 주목되고 있다. 근자 동국대학교 문제를 비롯하여 지난 수년간 재가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스님들의 범계 지적에 일대 경고성의 의미라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스님의 번다한 대승불교 설명이 결국 승려가 무슨 짓을 하던 재가자는 대승불교에 충실해서 세상을 맑게 하는 고유의 길이나 가라는 것에 귀착된다.

현응 스님의 ‘한국 재가불자, 왜 승가에 편입되려 하나’라는 글은 지난 5월13일 오후에 게재되었다. 같은 달 16일엔 광화문 광장에서 ‘광복 70주년 한반도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기원대회’가 개최된다. 스님은 “오늘의 첨단문명시대의 사회는 전문적인 학습과 각종 노력을 통해서 그 세부사항이나 전체 시스템을 알게 되는데, (중략) 승려는 사회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지 못한다”라 했다. 남북통일과 세계평화에 대한 문제역시 복잡하고 국제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이다. 우리 내부에서도 견해차이가 다양한데 승려가 섣불리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운운함도 해석하기 따라서는 전문영역이기에 주제 넘는 일이다.

그러나 복잡한 세상사라 해도 형법 ‘제1장 내란의 죄’에서부터 ‘제42장 손괴의 죄’까지 규정한 살인, 방화, 절도, 횡령, 환경 등 일상에서 지켜야하는 평범한 것들이다. 승려가 대승불교를 빌미로 세상사에 나서는 것도 결국 이 범주에서 산문 밖으로 한 발짝 내딛는 것에 불과하다.

환자를 수술하는 것이 전문가로써 의사의 영역이라 한다면, 가난한 환자를 수술 가능케 하는 역할은 의학에 비전문가인 승려에 의한 자비구현의 행동으로 충분하다. 현응 스님의 주장대로라면 승려가 정부와 사회의 각 기구와 기능에 참여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스님이 대승불교의 입장을 표명하려면 일차 주어로써 대상이 종단과 승려여야지 재가자는 아닐 것이다.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2014년 10월7일 '종단개혁 20주년 기념세미나' 기조발표문 ‘조계종단의 미래와 과제’에서 종단의 기본적 역할 중 하나는 “사찰과 종단을 기반으로 수도와 전법교화를 잘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일정한 수행력을 갖춘 스님들이 모임의 규모와 내용에 따라 사찰, 교구, 종단의 후원을 받으며 다양한 성격의 소규모 모임과 활동을 전국적으로 펼쳐간다면,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수행결사, 교학연구결사, 사회활동결사가 아니겠는가? 특성화 된 다양한 승가활동을 전개하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무가 된다.”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다양하고도 적극적인 교화를 펼치는 청빈한 무소유공동체인 조계종단의 승가가 있을 것이다”라 했다.

스님이 주장한 내용 중 ‘전법교화’ ‘사회활동결사’ ‘우리사회에서 다양하고도 적극적인 교화’의 의미와 이번에 주장한 “(전략)출가자의 불교는 많은 제약과 한계 속에서 특수한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으며, 사회생활을 떠나 있기에 방관적이고 논평적일 수밖에 없다”라 한 주장과는 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은 “한국의 출가승려가 대승불교권에 살고 있어서 비록 대승경전을 많이 읽고 보디사트바의 길을 흠모하더라도 그 길을 걸을 수 없다. ‘빽빽한 중생계의 숲에 들어가 그 차별상을 잘 알아서 보시, 애어, 이행, 동사섭의 바라밀을 펼치면서 자비행을 한다는 것(화엄경 십지품)’은 그저 염불이나 설법으로서밖에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자칫 현 사회의 온갖 병리현상을 외면케 하며, 이로 인해 종단이나 승가를 무기력하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종단이나 승가가 완벽성을 구족한 후에 사회활동결사, 우리사회에서 다양하고도 적극적인 교화를 한다면 어느 세월에서나 가능할까? 세상은 동시성이다. 대승불교와 승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론과 설정에 대한 좀 더 명쾌한 경계와 설명이 필요하다.

스님은 “‘대승’은 높은 경지를 뜻하는 질적인 표현이 아니라, 소수가 아닌 ‘대중적’이라는 양적인 표현이다.”라 했다. 스님의 주장을 달리 표현하면 대승은 명품이 아니라 대중용 상품이라는 주장이다.

“일찍이 대승(큰 수레)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중생심)이다. 그리고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의 사물(세간법)과 관념(출세간법) 등이 그 존재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마음으로써 대승의 의미를 밝힐 수가 있는 것이라 했다. 너와 나 우리의 마음이 결코 다르지 않으니 번뇌나 행복이나 해탈도 나만의 일도 아니며, 남의 일이라 외면해서도 안 되기에 대승인 것이다.”라 했다. 스님이 언급한 불교에서의 높은 경지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필자의 이해 내에서 대승을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우리 7천만 인구는 각기 자신의 몸에 각자의 마음이 있는데 그 각각의 마음의 본성이 서로 다르지 않기에 오염된 마음은 버리고 자유와 평화, 화합의 공동선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대승은 인간사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이타적이며, 가장 불교적이고 숭고하기에 높은 경지마저도 초월한 그러면서도 어쩌면 가장 평범한 것이 아닐까 한다.

현응 스님은 글 종결 부분에서 “불자들은 이제 홀가분하게 사찰과 출가 승려를 떠나 대승불교의 현장인 사회현장 속으로 들어가 바라밀을 행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불교정신과 가치관이 작동되고 안 되고는 재가불자인 보디사트바에 달려있다”라는 주장은 재가불자들로 하여금 종단과 승려문제에 대해 짐을 덜어주는 것 같으나, 불교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상 구현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재가자에게 돌리고 있다. 과연 그동안 종단과 사찰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정도의 훌륭한 재가자들을 육성함에 얼마나 기여해왔는지도 의문이다.

“재가불자가 반야와 자비를 실현하는 장소는 사찰이 아니라 중생계인 사회현장이다.”는 주장은 승려가 뭔 짓을 하던 종단과 사찰이 어찌되든 개의치 말라는 소신을 대승불교의 예를 들어서 번다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결국 현응 스님의 이번 기고문은 범계로 병든 승가를 스님자신은 물론 내부적으로 정화는 못하면서 이를 바로잡으려는 재가불자를 질책한다고밖에 읽히지가 않는다.

승가와 재가에 대한 엄격한 선을 긋는 생각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론 현대의 사조에도 맞지 않으며, 자칫 남성과 여성, 인종과 환경에서 오는 차별과 역할에 대한 한계설정이 가능하다는데 심각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맡은바 역할이 있으나 유기적이어야 하는 세상사는 물론 융섭과 융합의 문화에도 반한다. 승가와 재가는 그 외형부터 다르기에 동일시 할 수는 없으나, 구태여 추구하는 바를 다르다고 하거나 경계를 설정 할 필요도 없다.

스님이 ‘조계종단의 미래와 과제’에서 “단일승가, 화합승가의 길에 손을 놓고 있으면 5년 이내에도 종단이 붕괴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는데, 재가자들의 종단이나 승가에 대한 지적이 결국 종단의 붕괴를 막으려는 한 행위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현 한국불교와 승려의 병폐 중 하나는 신념 부재, 적당주의와 무책임성이다. 승려는 수행을 위한 수행에 천착하며 새로운 지배등급화 돼 있다. 대승과 출재가자의 분상과 역할을 논하기 이전에 이 문제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 인류를 향도하는 천재들의 삶은 승려들의 그것보다도 더 엄격한 면이 있다. 즉 독신 승려의 삶이기에 홀가분하여서 적극적으로 구세대비라는 대승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승려가 사회의 이곳저곳을 기웃하며 온갖 기술과 기능을 습득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인류가 추구해야하는 보편적 가치인 자유, 인권, 환경, 복지 등의 문제에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세상에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대승적 노력과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승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

승려와 재가자가 구세대비라는 한 방향을 향해 각자의 역할과 장점을 잘 살려서 나갈 때 한국불교는 건강하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바로 설 것이다. 학교와 세상이 불타는데 선생님이나 학생 구분 없이 한 손에는 소화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교육원장 스님의 또 다른 생각이 궁금해진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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