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병균 교수, ‘불교가 자꾸 위축되는 이유는?’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5.17 18:11
  • 수정 2015.05.17 18:14
  • 댓글 126

불교 자비는 생명에 대한 절대존중
대승은 ‘일천제 사상’까지도 부정
“절재산 관리” 주장이 불교 위축
실천 어렵다고 핵심교리 포기하면
그 종교 기다리는 것은 ‘멸종’뿐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한국 재가불자, 왜 승가에 편입되려 하나”라는 주장과 관련해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가 ‘예수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보내왔다. 강 교수는 예수와 양, 트롤리 딜레마 등을 길게 설명한 뒤 “부처의 자비는 절대생명에 대한 절대존중이며, 이것은 일천제(一闡提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못난 중생) 사상을 부정하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이라며 “(현응 스님의 주장은) 승려들은 절재산 관리나 하고 살겠다는 것이다. 이 일만도 벅차다는 것이다. 불교가 자꾸 위축되는 이유다”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어 “실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핵심교리를 포기하는 순간 그 종교를 기다리는 것은 멸종뿐”이라고 비판했다.   편집자 주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기고 전문

▲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예수는 100마리의 양 무리를 벗어난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나머지 99마리는 어찌 될까요? 한 마리를 찾으러 간 사이에 99마리에 일이 생기면 어쩌나요? 산에서 들에서 무리에서 분리되면 늑대 밥이 되기 쉽지만, 목동을 잃어도 몹시 위험합니다.

상황을 바꿔봅시다. 호숫가 언덕에 양 100마리가 있습니다. 그 중 한 마리가 발을 헛디디어 그만 물에 빠졌습니다. 목동은 그 즉시 물에 뛰어들어 양을 구합니다. 나머지 99마리가 그사이에 물에 빠질 수 있지만, 그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미안하다. 너를 구해주고 싶지만 그러다가는 나머지 99마리가 위험에 빠질 확률이 크구나. 그러므로 너를 구해줄 수가 없구나.” 이런 식으로, 99마리와 한 마리의 가치를 비교평가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위험에 빠진 한 마리를 구합니다. 한 마리 입장에서는 목동으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느낍니다. 절대적인 사랑을 느낍니다. 계산을 당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비교를 당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먼 길을 가는 중에, 기력이 다해 정신을 놓아 길을 잃고 헤매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수천 미터 고산길 차마고도에서도 벌어지기도 하고, 히말라야 고봉 등산 중에 벌어지기도 합니다. (험한 산길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신을 ‘길 잃은 양’이라고 느낍니다. 언제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걸려들고, 언제 죽음이 자신을 알 수 없는 곳으로 강제연행할지 몰라 두려워합니다. 고의건 아니건, 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낄 짓도 합니다. 남(타인과 동물과 양심과 이상)을 잡아먹습니다. 형편이 어려우면 살아남느라 정신이 없다가도, 형편이 좀 나아지면 “이래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항상 불안합니다. 혹시 벌을 받지 않을까 하고.

이때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가 나타나 위로합니다. 길 잃은 너를 찾아 왔노라고, 위험에 빠진 너를 구하러 왔노라고. 힘없는 인간은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속의 권력자도 부자도, 세월의 무자비하고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는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며, 자꾸 줄어드는 시간 앞에서 (시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때 예수의 말이 무한한 위로로 다가옵니다. “그 짐을 다 자기에게 내려놓으라고,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이 말에 사람들은 통곡을 합니다. 감격해서 통곡을 합니다. 정말 그러고 싶었는데, 짐을 내려놓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럴 곳이 없어서! 그래서 콜로세움에서 사자밥이 되어가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환경이 나아질수록 거꾸로 종교는 힘을 잃는다고 하니, 2000년 전의 로마 식민지 시절의 춥고 배고픈 그리고 등을 휘게 하는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믿음은 지금보다 엄청나게 강했을 것입니다. 사자밥이 되면서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종교경전들에는 다양한 얘기가 들어있습니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한 여인에게서 자기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듯이, 사람들은 종교경전에서도 좋아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심신을 바쳐 사랑에 빠집니다. 예를 들어, 한 군데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으면 고약한 냄새의 방구를 꾸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악취는 자취를 찾을 길 없고, 향기로운 머리카락 냄새만 비강(鼻腔)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는 종교를 남자가 여자 보듯, 혹은 여자가 남자 보듯 합니다. 종교건 이성이건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트롤리 문제’라고, 심리학에 유명한 딜레마가 있습니다. 기찻길에 5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기관사가 핸들을 돌려 진행방향을 바꾸면 5사람이 살아나지만, 바꾼 그 쪽 철길에는 1사람이 묶여 있습니다. 당신이 기관사라면 어떻게 하겠냐는 겁니다. “과연 핸들을 돌릴 수 있겠냐”는 겁니다. 문제가 어렵다고요? 그럼 한쪽 길에는 5사람이 아니라 100사람이 묶여있고, 반대쪽에는 여전히 1사람이 묶여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결정을 내리기 쉬워졌나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핸들을 틀어 1사람을 희생시키고 100사람을 구할 겁니다.

그런데 문제를 바꿔봅시다. 반대쪽에 묶여 있는 1명이 당신 자식입니다. 여전히 핸들을 돌려 당신 자식을 희생시킬 수 있습니까? 그럴 순 없다고요?

그럼 다시 문제를 바꿔봅시다. 가던 길에는 부모님이 묶여 있고 다른 길에는 어린 자식이 묶여 있습니다. 핸들을 틀어 가던 길을 바꿔 자식을 희생시키겠습니까? 옛날 유학자들의 대답은 '그렇다, Yes!'입니다. 부모는 한 번 잃으면 끝이지만, 자식은 잃어도 다시 낳으면 된다는 겁니다. (당시에는 수두 마마 홍역 등의 질병으로 아이를 잃는 것도 흔했고, 그래서 아이를 낳는 것도 흔했습니다. 한 배에서 10명 정도 낳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백색 대리석 무덤인 타지마할의 주인인 왕비 ‘뭄타즈 마할’도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야 반 정도 살아남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여자들을 애 낳는 공장으로 취급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한 여자가 공장이 되어 낳은 아이들이 그 여자 편이 되었습니다. 다 늙어 죽을 때가 되어 효도를 받는 입장에서는 “죽으려고 태어났나?”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생명체의 삶은 왜 이리 험한지 눈물이 납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놀라운 생각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자명하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유의하실 점은 유학자들에게 부모는 ‘고유명사’이지만, 자식은 ‘보통명사’란 점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유학자들에게, 고유가치가 없습니다.)

한 번 더 문제를 바꿔 볼까요? 한쪽엔 무덤덤한 배우자가 다른 쪽엔 금지옥엽 딸이 있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네? 뭐라고요? 재혼하면 그만이라고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문제를 바꿔봅시다. 당신 나라가 이웃 나라와 전쟁 중에 있습니다. 한 쪽 철길엔 1만 명 평범한 사람들이, 다른 쪽엔 전쟁을 끝낼 핵무기 같은 신무기 개발을 하고 있는 천재과학자 한 명이 묶여 있습니다. 철길 위의 1만 명을 희생시켜 과학자를 구하면, 그가 완성할 신무기로 적을 물리쳐 철길 밖의 100만 명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일이 2차 세계대전 시에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건 간에 그 결정에는 가치판단이 숨어있습니다. 당신은 한 사람의 가치를 다른 사람들의 가치와 비교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람을 물질(돈 보석 부동산 사회적 지위)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가치계산과 비교를 당하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걸 꿈꿉니다.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즉 예를 들어 저수지에 빠져 숨을 헐떡이는 그 순간, 늑대에게 물려 살은 떨어져나가고 힘줄은 끊어져 움직일 수 없고 배가 갈라져 내장이 빠져나올 지경인 그 순간, 생과 사의 그 순간, 누군가 둑에 서서 언덕에 서서 지켜보며 구해줄지 말지 판단하기 위해서 시간을 써가며 냉정하게 가치를 계산하는 것을, 즉 자신의 가치가 계산당하고 그 결과 버림받는 걸 두려워합니다. 누구나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대다수가 '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누구나 자기가 ‘을’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지가지 다채로운 이유로!) 이들이 험한 인생길에서 겨우 화를 피하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다가도, 위험에 처한 가치가 많은 잘난 사람을 만나면 또는 ‘갑’을 만나면, (보이지 않는) 기관사가 즉시 가치판단을 끝내고 핸들을 틀어 자기들 못난 ‘을’에게 돌진할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이걸 경영용어로는 ‘구조조정’이라고 합니다. 온전한 99마리를 위해서 길 잃은 당신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사실은 온전한 1마리를 살리려고 길 잃은 99마리를 죽입니다.)

‘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똑똑한 99마리 ‘갑’을 돌보지 않고 힘없고 길 잃은 미욱한 한 마리 자기를 구하겠다는데,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핸들을 틀어 자기를 구하고 99마리를 희생하겠다는 겁니다. 가난한 ‘을’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가득 찹니다. 기독교가 힘이 있는 이유입니다.

누구나 부처라는 선언은 개개 생명이 무한히 소중하다는 선언이고 절대적인 선언입니다. 부처의 자비는 이런 절대생명에 대한 절대존중이며, 이것은 일천제(一闡提, 영원히 성불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못난 중생) 사상을 부정하는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입니다. 열반조차도 사양하고 세속에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대승불교 자비’가 ‘기독교 사랑’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근자에 조계종 교육원장 스님이 그런 바라밀행은 신도들이나 하라고 사자후를 했습니다. 절대적인 자비행은 승려들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힘도 능력도 여력도 없다는 겁니다. 승려들은 절재산 관리나 하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일만도 벅차다는 겁니다. 불교가 자꾸 위축되는 이유입니다.

실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핵심교리를 포기하는 순간, 그 종교를 기다리는 것은 멸종뿐입니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