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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 (7)

“입에 서리를 가득 머금고 무얼 말하겠는가”

▲ 조주 선사가 머물며 후학들에게 ‘지극한 도’를 가르쳤던 백림선사의 회랑. 수많은 눈푸른 납자들이 회랑을 오가며 조주 선사에게 법을 구했다.

[참구]
‘벽암록’ 각 칙의 후반부에 실린 송(頌)은 설두 선사가 본칙에 대해 자신이 꿰뚫은 경지를 게송으로 읊어 놓은 것이다. 제2칙의 송에서 설두 선사는 ‘지극한 도(至道)’의 참다운 모습과 작용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벽암록’ 후반부에 실린 게송
설두 선사 깨달음 경지 표현
간택·불간택 발붙이지 못할때
평소 말 한마디도 지극한 도

금사자, 눈·귀 등 ‘여럿’ 총체
개성 유지해도 걸림없이 ‘하나’
눈·귀 쪼개도 금사자의 금일뿐
화엄 표현대로 ‘일즉다 다즉일’

<송>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착어 ← 삼중의 공안이네. 입에 서리를 가득 머금고 무얼 말하겠는가?)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것이다. (착어 ←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는 법. 산산이 흩어져서 아련하구나.)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하였다. 본칙에서 조주 선사는 ‘신심명’의 이 명제를 말로 정립·주장하는 순간, 이 명제 또한 간택이 된다고 하여 말의 허구성을 분명하게 표명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말의 논리에서 해방된 언어표현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설두 선사는 송의 서두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것이다”라고 읊는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간택을 해서는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간택은 통상적인 언어표현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지극한 도와 통상적인 언어표현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린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송에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극한 도라고 한다. 평상시에 쓰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다 지극한 도라는 것이다. ‘신심명’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선 듯한 인상을 주는 내용이다.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간택도 불간택도 발붙일 수 없는 일언일구가 될 때 그것은 지극한 도이다. 봄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당신 자신이 되어 당신은 읊는다. “아득히 추억한다, 강남의 삼월. 자고새 우는 곳에 백화 향기롭다.”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극한 도이다.

원오 선사는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으니”에 대해, “삼중의 공안이네. 입에 서리를 가득 머금고 무얼 말하겠는가?”라 착어했다. ‘삼중’ 곧, 3조 승찬 대사와 조주 선사, 설두 선사가 서로 뒤엉킨 복잡한 공안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 삼을 게 아니다. 입에 서리를 가득 머금으면 입이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원오 선사는 설두 선사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한다고 일침을 놓고 있다. 말이 종적을 감추면 일체의 생각도, 자기도, 세계도 완전히 종적을 감춘다. 그때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것이다”에 대해서는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는 법. 산산이 흩어져서 아련하구나”라는 착어를 붙였다.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진다.” 이 구절을 원오 선사는 본칙에서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간택이고 명백이 되어 버린다”에 대한 착어로 이미 사용했다. 본칙에서는 말을 하는 순간 간택이어서 지극한 도에서 멀어지고, 여기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지극한 도라고 했다. 따라서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진다”라는 동일한 구절이 본칙에서는 언어의 부정에 대한 착어로 사용되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언어의 긍정에 대한 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정반대인 맥락인데도 어째서 똑같은 착어를 붙였을까? 여기가 바로 원오 선사의 촌철살인적인 선기(禪機)가 번뜩이고 있는 곳이다. 그 선기를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선 수행자라 할 수 있고 제대로 된 견처를 보일 수 있다.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는 법. 산산이 흩어져서 아련하구나.”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듯이, 말을 하면 할수록 지극한 도는 흐려진다. 말을 하는 순간 지극한 도는 산산이 흩어져서 아련히 멀어진다. 당연한 말이다. 원오 선사는 “물고기가 헤엄치면 물이 흐려지는 법. 산산이 흩어져서 아련하구나”라는 바로 이 구절을 말함으로써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지극한 도’라는 것을 그대로 다 내보인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것이다”는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한마디라도 말을 하면 가짜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가짜다. 자, 견처를 보여라.

<송> 하나에 여럿 있고, (착어 ← 분석하는 것이 좋다. 똑같기만 해서는 매듭을 지울 수 있을까?)
둘에 둘은 없다. (착어 ← 4, 5, 6, 7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겠군. 아무리 말을 해 본들 무엇 하나?)

‘김칫독’이라는 말은 ‘김치를 담아 두는 항아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김칫독’이라 불리는 저것은 그 말 의미대로 원래부터 ‘김치를 담아 두는 항아리’는 아니며, 영원히 변치 않는 그것도 아니다. 거기에 용변을 보면 요강일 뿐이고, 어린애에게는 장난감일 뿐이다.

따라서 김칫독에는 그 말의 의미에 부합하는 영원불변의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김칫독은 공(空)하다”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요강도 공(空)하며, 장난감도 공하다. 삼라만상이 예외 없이 모두 다 공하다. 만물은 모두 다 공하므로 ‘하나’이고, 공하여 아무런 차별이 없기에 ‘평등’이다.

그러나 삼라만상이 모두 공하다고 해서 개별적인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칫독은 김치를 보관하는 특성이, 장난감은 김칫독과는 다른 노리개로서의 특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김칫독과 장남감은 서로 다른 ‘둘’이며 서로 구분되는 ‘차별’이다. 동시에 이 ‘둘’은 모두 공하기에 ‘하나’이며 ‘평등’이다. 삼라만상 하나하나가 모두 이와 같다. 범위를 김칫독과 장난감에서 삼라만상 전체로 확대하면 ‘둘’은 ‘여럿’이 된다.

김칫독과 장난감은 모두 공하기 때문에 ‘하나’이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둘’이다. 이것을 설두 선사는 “하나에 여럿 있다”고 했다. 이러한 측면을 선에서는 ‘평등즉차별(平等卽差別)’, “평등이 곧 차별이다”라고 표현한다. ‘반야심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공즉시색(空卽是色)’, “공이 곧 색이다”에 해당한다.

김칫독과 장난감은 서로 다른 ‘둘’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둘 다 공하다는 바탕을 깔고 있다. 만약 이 둘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김칫독은 장난감이 될 수 없으며 장난감 또한 김칫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김칫독과 장난감은 둘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둘은 아니다. 둘 다 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설두 선사는 “둘에 둘이 없다”고 읊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선의 표현은 ‘차별즉평등(差別卽平等)’, “차별이 곧 평등이다”이고, ‘반야심경’의 표현은 ‘색즉시공(色卽是空)’, “색이 곧 공이다”이다.
“하나에 여럿 있고, 둘에 둘은 없다.” 이것이 ‘지극한 도’의 모습이다. 이 구절 또한 ‘전통적인 참구해야 할 화두’이다. ‘종문입자 불시가진(從門入者, 不是家珍)’, 문으로 들어온 것은 참다운 보배가 아니다. 책에서 읽거나 남에게서 들은 내용은 보물이 아니며 생명 없는 그림과 같다. 스스로 터득한 살아 있는 견처를 보여라.

원오 선사는 “하나에 여럿 있고”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 좋다. 똑같기만 해서는 매듭을 지울 수 있을까?”라는 착어를 붙였다. 분석은 ‘차별’에 근거한다. 일체가 하나라는 데만 치우친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남녀노소, 동서남북의 구별이 없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이렇게 되면 일의 매듭도 지울 수 없다.

‘도홍이백장미자 문착춘풍총부지(桃紅李白薔薇紫, 問著春風總不知)’, “복사꽃은 붉고, 자두꽃은 희고, 장미꽃은 자주색. 봄바람에 그 이유를 물어도 모른다고만 하네.” 현실의 다양한 사물이 그대로 지극한 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사꽃은 붉고 자두꽃은 희지 않은가? 원오 선사의 착어는 지극한 도의 차별적 측면을 간과하지 말라는 주의이며, 동시에 말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은 차별에 근거해야만 성립하는데 평등 속의 차별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둘에 둘은 없다”에 대해 “4, 5, 6, 7은 도저히 성립할 수 없겠군. 아무리 말을 해 본들 무엇 하나?”라는 착어를 붙였다. 둘에 둘은 없기 때문에 둘 그 자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면 4, 5, 6, 7은 더더욱 성립하지 않는다. 둘에 대해 아무리 말해 본들, 4·5·6·7에 대해 아무리 말해 본들 그것들은 없는 것이다.

김칫독과 장난감에 대해 아무리 말해 본들 그것은 공하여 김칫독과 장난감이 아니다. 둘 다 공하여 하나이다. 여기서 원오 선사는 지극한 도의 평등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말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천봉세도악변지 만파성귀해상소(千峰勢到嶽邊止, 萬派聲歸海上消)’, “수많은 산봉우리 오악(五嶽)에 이르러 다하고, 온갖 시냇물 소리 바다로 돌아가 사라지네.” 천차만별의 온갖 사물도 결국에는 공하며, 하나이며, 평등임을 보여 주는 게송이다.

“하나에 여럿 있고, 둘에 둘은 없다.” 이것을 화엄(華嚴)의 표현대로 하면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즉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다”이다. 예를 들어 금으로 만들어진 금사자가 있다. 이 사자는 눈·귀·머리 등 ‘여럿(多)’이 모여서 금사자라는 ‘하나(一)’가 된다. 눈과 귀 등은 각자의 역할이 중복되지도 않고 각각의 모습을 유지한다.

금사자라는 ‘하나’는 눈·귀 등의 ‘여럿’의 총체이며, 이 여럿을 떠나 별도의 하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 속에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 여럿이 서로 아무런 걸림 없이 있다. 하나는 곧 여럿이다. 이것을 ‘일즉다(一卽多)’라고 한다.


한편 눈·귀 등의 ‘여럿’은 아무리 쪼개어도 모두 금사자의 금이다. 그 바탕은 모두 같은 ‘하나’이다. 이 ‘하나’를 떠나 별도의 ‘여럿’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다즉일(多卽一)’이라 한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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