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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마거사와 승만보살

세속에서 깨달음 이뤄 중생 구제하는 재가불자 롤모델

▲ 올바른 불교도의 길은 부처님 가르침을 일상생활화 하고, 서원을 세워 보은행을 실천하는 데 있다. 불교여성개발원과 승만경연구회 주최로 진행된 승만보살 10대원 수계법회 모습.법보신문 자료사진

석가모니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의 모든 속박을 끊어 집착이 없는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다. 불교에서의 깨달음은 항상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능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나아가 “모든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유행하라”라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비행을 실천해야 한다. 자비행이야말로 나와 타인에게 이익이 되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지혜와 자비는 불교의 양대 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에 출가수행자가 자리(自利) 중심의 깨달음에만 전념하고 자비행의 실천을 등한시하자 일체중생에 대한 보편적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강조하는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대승불교 운동이다.

재가불자인 유마와 승만은
출가자 중심 불교서 벗어나
대승불교 진의를 밝힌 인물

계율 지키며 부단히 정진하면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입증

무아·무상에 대한 자각 있으면
다른 존재와 깊은 상생 가능

오늘날 불자도 서원 세워서
자신이 처한 현실 바꿔나가고
이 세상 청정국토 만들어야

대승불교 운동은 붓다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붓다의 덕을 찬탄하고, 그 자비의 힘으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 운동을 뒷받침할 많은 대승경전이 제작되었다. 이들 경전에서는 공(空) 개념의 이해와 실천, 이타행을 실천하기 위한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사상,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삼신(三身)사상, 중생들은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깨달음의 보편성을 주장하였다.

깨달음의 보편화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성불의 가능성을 열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경전으로 ‘유마경’과 ‘승만경’이 제작되었다. 이들 경전은 재가자인 유마거사와 승만부인이 주인공이 되어 출가자 중심의 왜곡된 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의 진의를 밝혀 재가자가 불교를 어떻게 신앙하고 어떻게 일상생활화 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즉 재가자라도 스스로 계를 지키고 수행 정진한다면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음을 천명하고, 더 나아가 중생구제를 위한 적극적인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유마거사는 세속에 있으면서도 대승의 보살도를 성취하여 출가자와 동일한 종교 이상을 실현하며 살고 있다. 그는 재가에 머물지만 부처와 같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중생과 함께하는 진보살이다. 그렇지만 그는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세속의 온갖 영욕에 대해 희로애락을 내지 않고, 선정과 지옥을 구분하지 않고 생사 속에 있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데 매진한다.

승만(勝)부인은 부처님 앞에서 열 가지 서원과 세 가지 큰 서원을 일으키고, 정법(正法)의 유지와 일승, 여래장사상의 대방편을 널리 전개시키기 위한 법을 설한다. 일승, 여래장사상은 일체 중생들이 모두 깨달음의 가능성인 불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재가자들도 진리를 추구하고 계를 지키고 수행을 철저히 한다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승만부인은 이같이 부처님의 진실한 공덕을 찬탄하고 선근으로 정법을 유지하고 선을 닦은 공덕으로 장차 보광여래(普光如來)라는 부처가 될 것임을 수기 받는다.

유마거사와 승만부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사의한 깨달음을 얻어 완전한 자유인의 경지에 도달하여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자유인은 자신의 본성을 실현한 사람으로 시비선악의 오염된 세간에도 물들지 않으며, 나아가 오염된 세간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다. 유마거사가 보여주는 무애자재한 활동은 바로 참 자유인의 전형으로 그의 중생에 대한 연민과 구제활동도 여기서 나온다.

우리들이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나와 남을 분별하고, 대상을 실체시하여 그것에 붙잡혀 있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유마거사는 출가와 재가, 보리와 번뇌, 부처와 중생, 정토와 예토라는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불이(不二)의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만 자유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절대 평등의 경지에서 보면 현실의 국토가 바로 불국토이다. 우리들은 어리석음, 탐욕, 성내는 마음 등 번뇌의 고통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정토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보살의 자비행은 바로 번뇌에 싸인 이러한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차별 없는 평등심과 일체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대비심을 가져야 한다. 유마거사는 “중생들이 병이 났기 때문에 자신이 병이 났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자신의 병도 나을 것이다”라며 중생과 자신이 하나, 즉 동체대비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중생에 대한 사랑이다. 중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보살은 악취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대비심을 일으켜 스스로 생사윤회에 들어간다.

‘유마경’과 ‘승만경’에서는 진리의 추구, 자기 수행의 일상화, 중생에 대한 자비의 실천, 정법의 수호, 불교의 생활화 등이 불교 신앙의 핵심임을 말해준다. 일상의 삶에서 자기 수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여래의 성품을 자각하고, 계율의 준수를 통해 번뇌를 불태우고 선(善)을 실천해야 되며, 무주심(無住心)에 의한 무집착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평등심과 자비심에 근거한 사회연대의식으로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 무주심에 의해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일체가 무아이고 무상, 즉 공(空)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존재가 무아이고 삶이 무상하다고 하여 현실적인 우리들의 존재와 삶이 의미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아와 무상을 자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번뇌·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삶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평등심과 자비심에 근거한 사회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공생과 상생을 말할 수 있다.

일상의 삶에서 불교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연기의 원리와 진리를 믿음으로써 얻어지는 공덕을 믿는 것이다. 불교도들의 진정한 행복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사회의 비리나 불행을 광정(匡正)하는데 무관심하고 무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불교신앙 형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신비적인 가피력을 믿고, 복을 비는 것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유마거사나 승만부인이 주장하고 있는 정법의 지혜를 얻고, 정법을 교시하며, 정법을 호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유마거사가 중생과 자신이 하나이고, 중생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임을 강조하듯이 불교도들도 이웃의 아픔을 진정 자기의 아픔으로 여기고 이웃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실천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삶 대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참선이라든가 염불을 통해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자기 이익 중심의 잘못된 신앙 형태를 우리들은 보이고 있지 않는가?

일상에서 불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원이 필요하다. 재가자였던 승만부인이 처음 불교에 귀의할 때 세웠던 10가지 서원이 그 모범이 될 수 있다. 승만부인은 계를 지키고, 거만하고, 성내고, 질투하고, 인색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에게 보시하고, 사섭법으로 중생을 거두고, 질병 등으로 고통 받는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고, 살생, 살인 등 파계하는 자를 정법으로 교화하고, 정법을 섭수하여 잊지 않겠다고 서원하였다. 이 서원을 바탕으로 승만부인은 진리 추구와 수행, 중생구제, 정법수호를 말하고 있다. 우리 불교도들도 불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키고 이룰 수 있는 서원을 바르게 세우고, 그것을 생활화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현실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청정국토로 만들 수 있다.

▲ 조수동 교수
고와 죄, 희생으로 쌓아올린 재물과 권세, 명예, 부귀영화는 잠시 반짝이다 사라져가는 반딧불과 같다. 영원히 남는 것은 그것을 추구하면서 쌓아올린 무량한 고와 죄의 업보뿐이다. 우리들은 재물과 권력, 부귀영화 등을 절대적인 가치로 보고 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인양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일체 존재는 무아이고 무상한 것이다. 올바른 불교도의 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생활화 하고, 매사에 항상 남에게 감사할 줄 알고, 은혜의 빛을 갚아가는 회향행, 즉 보은행을 실천하는 것에 있다. 그것이 곧 유마거사와 승만부인이 보여준 재가불자의 길이기도 하다.

조수동 대구한의대 교수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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