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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병수발 3년, 연기법칙 실감하니 두두물물에 감사

기자명 법보신문

법보신문 사장상 - 전상삼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아내의 권유로 불교에 입문한지 벌써 30년이 됐다. 불법과 인연이 있었던지 국가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교리를 배우며 신심을 증장시킬 수 있었다.

폐결핵·뇌경색 후유증 아내
병간호하며 병원 법당서 신행
과거 생 참회하며 목청껏 염불

병원 법당 오간 것 인연 돼
환우와 가족 위한 신행상담에
예불 집전까지 봉사 이어져

병세 호전되는 아내 모습에
그간 봉사 헛된 것 아님 느껴
스스로의 변화도 눈에 보여
주변 모든 것 감사한 마음 뿐

공무원 정년퇴임 후 2003년 제8기 조계종 포교사가 됐다. 북한 이탈 주민을 대상으로 포교하는 통일분과위원장직을 수행하던 중, 2008년 6월 아내가 전신 폐결핵 중증으로 중앙대학교의료원에 입원했다. 차도는 없었고 임파선 결핵으로까지 진행됐다. 끝내 결핵균이 뇌까지 침투했다. 2008년 12월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악화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식불명 상태에서 12월 1차 뇌수술을 했다. 실패였다. 계속된 의식불명 상태에서 2009년 1월 초 2차 수술에 성공해 겨우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후유증인 뇌경색으로 수족장애, 눈동자가 고정되며 생긴 시력저하, 청력장애, 음식물조차 못 넘기고 말을 못하는 연하장애, 그리고 지적 사고력 장애 등이 이어졌다.

재활훈련을 거쳐 2009년 9월 퇴원했지만 그마저도 얼마가지 못했다. 고관절이 골절돼 또 한달 동안 입원을 했다. 아내는 ‘노인장기요양보호 3급’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만 않았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스스로 아내를 간호했다. 2010년부터는 포교사단 업무에 복귀했다. 포교사단 중앙감사직을 거쳐 지금은 포교사단 선거관리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2008년 12월 아내의 뇌수술 날짜를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을 때다. 수술 직전 집도의로부터 보호자 면담 요청이 왔다. 집도의는 뇌수막염 자체가 위험한 수술인데 뇌 속에 결핵균이 침투해 뇌신경이 파괴됐다며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희귀한 사례라고 했다. 이어 수술을 한다 해도 생사는 장담할 수 없고 심한 후유증이 예상되니 수술을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꼭 수술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수술에 들어갔다. 1차 수술은 실패했지만 2차에 성공했다. 집도의는 수술 후 회진을 할 때마다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교수의 전언에 의하면 결핵성 뇌수막염은 발병 후 살아남은 자가 극히 드물다. 기적인 셈이다.

아내의 병수발을 시작하며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 전용 병실이었기에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하지만 병실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화장실 사용제한, 좁은 의자 위의 새우잠 등의 애로사항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있는 아내의 병세 앞에서 이는 사치에 불과했다. 간병인들의 멸시도 만만치 않았지만 모든 경계들이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이며 제행이 무상한 것으로 일체의 곤액을 건널 수 있다는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公度一切苦厄)’을 항상 명심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아내의 병세가 생사의 질곡 속에서 위중할 때였다. 중앙대학교의료원 내 지하 법당을 운영하는 지현 스님과 법당 봉사자 분들께서 병실을 방문해 위로와 격려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줬다. 생사가 교차하는 삭막한 병원이었다. 하지만 부처님께 기도 올릴 수 있는 신행공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었다. 20년간 계속해온 108 참회기도를 병원에서도 올릴 수 있었다.

이른 새벽, 아내의 대소변 등 모든 처치를 끝내고 새벽 5시 병원 지하 법당에 내려가 부처님께 마지물을 올리고 108배와 독경, 염불을 이어가며 새벽예불을 빠짐없이 올렸다. 그리고 아내에게 그 마지물로 약을 복용시켰다. 밤 10시가 되면 아내를 재우고 지하 법당에 내려가 한 시간 동안 독경을 하고 저녁예불을 올렸다.

아내의 입원기간은 나 혼자 법당 부처님과 독대, 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기간이기도 했다. 지난 과거생에 아내에게 잘못한 일들을 참회하고 반성하며 목청껏 염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 놓고 목탁을 칠 수 있었던 나만의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이다. 또 14층 병동에서 지하 2층 법당까지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것은 유일하게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기도를 이어가며 조계종 포교사로서 이번 기회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 불보살을 감복시켜보리라 다짐했다. 냉온자지(冷溫自知)라는 말처럼 더운물인지 찬물인지 내가 직접 체험한다면 앞으로 포교현장에서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불보살의 가피와 불가사의한 영험은 정말 사실일 것만 같았다. 부처님의 무량한 자비공덕을 믿고 열심히 기도해보기로 했다. 부처님은 화엄경에서 ‘신심은 도(道)를 이루는 공덕의 어머니’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고 간절할 때 불보살의 가피는 꼭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짐했다. 그 후 아내의 병수발에 더욱 전념할 수 있었다.

뇌수술 후 2주가 되어 갈 즈음이다. 아내가 깨끗한 차림으로 단장을 한 채 이제 병이 다 나았으니 그동안 신세 진분들에게 인사를 간다고 했다. 나는 무척 고맙고 기뻤다. 하지만 곧 꿈임을 알았다. 잠에서 깨어보니 새벽 3시였고 병상에 누워있는 아내는 아직도 무의식 상태였다. 허망하고 허전해 혼자 울기만 했다. 며칠 후 또 다시 꿈을 꿨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났다. 잠시 후 어머니는 백의관세음보살 모습으로 변하며 허공에 머무르다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나서도 너무나 황홀했다. 무수배례하며 관세음보살을 찬탄했다. 나의 건절한 기도에 부처님도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몽중가피로 보여진 것 같았다. 더욱 신심이 견고해졌다.

중앙대학교의료원과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내 법당을 운영하시는 지현 스님과의 인연으로 2009년부터 지금까지 화요일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법당, 목요일은 중앙대학교의료원 법당에 나간다. 봉사자들과 함께 오전 10시부터 각층 병실을 찾아가 환우들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기증받은 법보신문과 불교계 정기간행물을 나눠드리고 신행상담을 한다. 오후 2시부터는 환우, 가족들과 정기예불을 진행한다. 스님 부재 시에는 직접 예불을 집전한다. 관음정근과 환자를 위한 쾌유기도문이 낭독될 때면 애태우는 환우와 가족들의 흐느낌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이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나눈다는 생각으로 예불에 임한다.

부처님 가피로 퇴원을 하는 환우들을 보면 나의 일인 양 감사하고 고맙다. 힘든 봉사생활 속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감사와 보람이다. 아쉬운 점은 봉사자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사실 각 병실을 돌아다니며 봉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정 종교인들의 냉대와 악취나는 병실의 환경 등으로 초발심 봉사자들이 몇 회를 넘기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타종교의 젊은 여성 여러 명이 함께 병실을 다니며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의 능력부족 같아 자괴감이 빠지기도 한다.

지금은 봉사자가 점점 줄어 법당을 지키는 보살 한명과 병실을 다니며 봉사하는 한 두 명이 병원을 지킬 뿐이다. 최근에는 혼자 봉사를 할 때가 더 많다. 나이 일흔이 훌쩍 넘었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를 하겠다는 부처님과의 약속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고 임하고 있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부처님께 발원한다. “불보살님이시여! 병실에서 법보신문을 기다리며 반갑게 맞이하는 불자 환우부처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들에게 부처님 자비의 법음(法音)을 전할 수 있도록 봉사자들을 많이 보내주십시오. 간절히 발원합니다”라고 말이다.

몇 년 간 환우들을 위한 기도와 봉사를 하다 보니 아내의 병세가 신기하게도 점점 호전됐다. 이제는 혼자서 목욕탕에 다닐 수 있고 밥도 짓고 반찬도 할 수 있을 만큼 호전됐다. 지적 능력은 약간 저하됐지만 신체기능이 몰라보게 좋아진 것을 보면서 “남을 위한 기도와 봉사가 헛된 것이 아니고 곧 나의 공덕으로 부메랑처럼 돌아온다”라고 굳게 믿는다. 불가사의한 가피에 한없는 감사를 올린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신명나게 봉사할 수 있는 이유다.

아내가 뇌수술 전후 몇 개월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을 때 나는 부처님께 바라는 게 많았다. 부디 의식이 돌아오길 바랐고, 누워만 있을 때는 앉을 수 있기를 바랐고, 앉게 되자 설 수 있기를, 서게 되자 걸을 수 있기를, 재활훈련이 시작되자 손을 사용할 수 있기를, 고정된 눈동자가 돌아오기를, 음식물을 삼킬 수 있기를, 말을 할 수 있기를, 귀 신경이 돌아와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혼자서도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기를 등의 바람과 바람들…. 중생의 한량없고 끝없는 바람과 소원을 부처님께서는 다 들어주셨다. 기적을 보여준 것이다. 이후 나는 여전히 기적 속에 살고 있지만 간혹 기적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는다.

부처님께서는 병이 생기는 근원은 무명 또는 무지에서 출발해 탐진치와 아만심, 번뇌 망상과 집착, 그리고 잘못된 습관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내가 병이 난 것은 40여 년을 살면서 나로 인해 어렵게 살아온 모든 고난 때문으로 내가 원인을 제공한 것 같아 막중하고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 어쩌면 금생에 지은 업연은 금생에 모두 끊어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서 아내의 병수발을 동체대비의 심정으로 임했던 것 같다. 병원에서 1년 반, 통원 치료 1년 반, 모두 3년간 나도 사회활동을 하지 못했다. 아내가 점차 회복되면서부터 나도 새로운 생활을 만나게 됐다. 이제는 아내 덕분에 사회활동을 할 수 있음에 한없이 고맙고 감사하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내 자신의 변화다. 불교에 귀의한 지 30년 만에 인연연기의 법칙을 실감했다. 이제 철이 들었나 보다. 아내가 다시 살아난 덕분에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았고 가족뿐 아니라 의사와 병원, 사회의 고마움을 알게 됐으니 두두물물이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아내가 병이 나기 전 나는 108참회기도 시 “참회합니다”라며 지난 과거에 대한 반성만을 했다. 하지만 아내가 회복하고 난 지금은 천지만물을 예경 대상으로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예경을 올린다. 조상 어르신, 부모님, 스님, 형님, 아내, 아들, 며느리, 친척, 포교사들, 동창들, 고향친구들, 선배, 후배, 모임단체 등에 “불보살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삼배 올린다. 나의 건강이 유지되는 한 108참회는 계속하리라 다짐하고 발원한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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