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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불자의 길-상

“도량서 오계 수지하고 밖에서 거짓말하면 불자가 아닙니다”

▲ 티베트 수도 라싸의 입구에 있는 마애불. 커다란 눈과 커다란 귀의 부처님은 바른 법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설파하려는 듯 자비로워 보인다.

존경하는 원로 그리고 불자 형제·자매님!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한 사람의 불교 수행승으로서 지금은 매우 감동적이고 아주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늘 그러했듯이 마지막에 연설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말이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이미 앞서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웃음)

대다수의 종교 신자들이
신과 부처님 찾으면서도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는
신과 부처님 개의치않아

부처님 따르는 불자라면
진정으로 항상 진실해야

불자로서 이렇게 하시길
매일아침 부처님 기억하고
부처님의 가르침 암송하며
‘나의 마음’ 늘 관찰해야

이렇게 하루하루 보낸다면
당신의 하루는 ‘부처의 날’
스스로 스승되어 완성하길

저의 관심 또는 느낌은 물론 “제가 불자라는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저는 한 인간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에는 70억여명에 달하는 인간이 살고 있으며 저는 그 중 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래서 각 개인의 미래는 전적으로 타인 모두에게 의존합니다. 그렇기에 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인류 전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합니다.

근본적인 면에서, 인간의 측면에서 그리고, 저 자신의 경험에서 보면 지구상에는 70억여명의 인간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들 개개인 모두는 행복한 삶을 원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고통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각 개인은 그것을 성취할 일체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어떤 종교적 믿음을 갖고 있건, 비종교인이건,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교육을 받았건 그렇지 않았건, 왕실 출신이건 거지 출신이건 그 모든 측면에서 볼 때 우리는 똑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 같은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가 공통으로 부딪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부차적인 수준의 차이점을 너무나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우리 모두가 똑같은 형제·자매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서로 다투고, 서로 속이고, 서로 멸시할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똑 같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진정으로 필요합니다.

미래의 행복한 인류는 개개인 모두의 이익이고 개개인 모두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불자는, 지구상에 10억명의 불자가 있는데 우리들 또한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동기는 모든 생명체를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생애와 가르침은 불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20세기를 한번 돌아보세요. 20세기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인류는 인간에게 이로운 것들을 수없이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동시에 20세기는 또한 유혈의 세기, 폭력의 세기가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종교적 믿음이란 이름 아래 폭력과 분열이 상존했습니다. 20세기는 유혈의 세기, 폭력의 세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유혈과 폭력으로 2억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런 엄청난 고통이 정말로 지구상에 좋은 일들을 가져왔다면, 좀 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었다면, 그렇다면 그런 고통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1세기 초 조차도 건강하지 못한 상황들이, 불행한 일들이 여기저기에 여전히 널려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의 잘못, 과거 소홀의 결과 또는 그 증상이라고 생각됩니다.

과학기술과 관련해 엄청난 진보가 있었지만 그러한 기술들은 때론 파괴력을 증가시키는데 일조(一助)했습니다. 과학과 기술 그 자체는 매우 멋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슴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것은 기술의 사용자, 과학의 사용자, 과학지식의 사용자들의 가슴에 의존합니다. 보다 나은 세상이 돈으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과학을 이용해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술을 이용해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것은 틀렸습니다. 진실로 더 나은 세계, 더 행복한 세계를 원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가슴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적능력과 교육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는 역시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들 모두가 말썽꾼일까요? 그들의 두뇌만을 놓고 본다면 그들은 매우 총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결국 그들이 가슴에 담고 있는 동기가 문제시 됩니다. 분노와 공포, 혐오, 의심 바로 이런 것들이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21세기를 평화로운 세기로 만들기 위해 내면의 평온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평화는 선언을 통해서, 결의를 통해서, 슬로건을 통해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내면적 평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개개인의 내적 동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UN과 같은 국제적인 기구나 단체를 통해서는 평화를 이룩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개개인 차원의 내적 평온을 통해서 얻어야 합니다.

개개인이 결합한 것이 사회이고 공동체입니다. 지도자들은 도덕과 윤리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로 사회에 뛰어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돈과 권력에만 관심을 보입니다. 이 같은 사회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단지 돈과 권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가 이런 방식의 사고를 하고 있습니다.

다수의 종교 신자들이 ‘신’과 ‘부처’를 부르면서 단지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그다지 개의치 않습니다. 불자들도 부처님께 기도는 올리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부처님에 대해 별다르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단지 돈과 권력, 명예가 중요하게 된 것, 이러한 현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불자들도 또한 때로는 위선을 배웁니다. 모든 생명체를 위해 기도하지만 실제 행동은 타인의 권리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이용만 할 뿐입니다. 다른 종교 신자들도 또한 기도를 합니다. 신에게 기도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은 창조주의 목소리, 창조주의 가르침을 듣지 않습니다.

인도인은 비교적 종교적 성향이 강한 민족이라고, 인도 친구들에게 자주 말해 왔습니다. 그들은 시바(파괴의 신), 가네쉬(상업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주로 재물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기원하기 위해 가네쉬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숭배하고 기도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모든 인도인의 가정에서는 각기 신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생활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 어떠한 신도, 그 어떠한 부처도 부정부패가 괜찮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직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최대한 너는 착취해라. 너를 축복해 주겠다”라고 말한 위대한 스승은 없습니다. 어떤 신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처, 예수, 마호메트 등과 같은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정직하고 진실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저는 숨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바를 누구에게나 얘기할 수 있고 무엇이든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기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정직하고 진실한 것은 정신력과 자신감의 매우 중요한 원천이 됩니다. 물론 대단히 공손하게 말하고 미소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의 동기를 알게 되면 그건 완전히 다른 얘기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신뢰와 존경심이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불자로서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물론 2500년 넘게 오래되었지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매우 유효하다고 불자 형제·자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일류 과학자들이 파괴적인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더 많은 정보와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가르침들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자질이 퇴화된 라마, 툴쿠(환생 라마) 또는 스승들이 있다는 조짐을 실제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심각히 우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스스로 절제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을 가르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스스로 먼저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모든 긍정적인 것들은 이미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제 유일하게 남은 일은 좀 더 부정적인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진지해야 합니다. 저 자신은 불교의 승려입니다. 저는 항상 저 스스로를 관찰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깨어나면 곧바로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암송하면서 저의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계율에 따라 보내고 있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자비롭고, 평화롭고, 비폭력적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여러분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 법문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펼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할 때 스스로 여기 당신의 가슴 속에 먼저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지극히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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