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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관 세대’와 달관의 종교

주관적 부르대기가 지천일 때 통계는 사뭇 신선하다. 객관적 수치로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계 또한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만, 기초적 사실 관계에 국한된 통계는 언어의 누더기를 벗기고 현실을 증언해준다.

얼마 전 통계청이 발표한 ‘4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이 월별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에 2014년 인구 1000명당 혼인 건수는 1970년 이후 역대 최저다. 젊은 세대가 결혼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몇몇 언론은 오늘의 20대가 ‘달관 세대’임이 입증됐다고 무람없이 보도했다.

달관 세대. 언론이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옮겨 퍼트린 신조어다. ‘사토리’는 일본어로 깨달음, 득도라는 뜻으로 ‘사토리 세대’는 돈이나 명예, 출세에 대한 욕심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무기력한 상태로 살아가는 청년들을 일컫는다. 조선일보는 ‘달관 세대’를 “안분지족하는 법을 깨달은 세대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며 “1980년대 중후반~90년대 태어난 10대 후반~20대 중반의 세대로, 욕망 없는 세대인 이들은 비록 경기침체로 정규직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중저가 옷을 입고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행복을 느끼는 세대”라고 보도했다.

당사자인 젊은 세대는 조선일보가 제시한 ‘달관’이라는 말에 곧장 반발했다. 20대에게 지배적 정서는 달관 아닌 절망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입증’해주는 통계도 있다. 2015년 2월, 한 시장조사 전문기업이 전국 19~59세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이민’ 설문조사에서, 20대의 90%와 30대의 93.2%가 이민을 고려해 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 조사는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들이 20대와 30대에서 많아진 이유도 제시했다. 지나치게 과열된 경쟁구조, 점점 심해지는 소득불평등 구조, 국내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거론됐다. 이민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세대를 과연 ‘달관 세대’라 부를 수 있을까?

사토리 세대로 불리는 일본만 보더라도 취업과 관련된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청년이 5년 사이에 3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한국과 일본 사이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첫째, 최저임금 차이다. 한국은 최저임금이 시간당 5580원이지만, 일본은 8000원이 넘는다. 서울로 유학 온 일본 대학생은 도쿄에선 알바 노동자들이 시간당 1만원은 받아 사토리 세대의 삶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알바 노동자 200만명에게 시간당 1만원은 ‘꿈’이다.

둘째, 한국과 달리 일본의 청년 실업률은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최근 통계는 한국의 거의 절반 수준이다. 국외로 진출한 일본 기업들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이 성과를 보이면서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젊은 세대가 부닥친 객관적 조건이 서로 다른데 ‘사토리 세대’를 그대로 수입해서 ‘달관 세대’로 부르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기실 사토리 세대 또한 ‘득도’와 거리가 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정당화하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 지식인들이 사토리 세대에 대해 깨달은 게 아니라 깨달은 척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물며 한국의 청년실업자들을 ‘달관 세대’로 명명하는 일은 청년들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에 순응하라고 은근히 강압하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실업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대안들을 구현해나가야 할 섟에 실업의 책임을 청년들에게 언죽번죽 떠넘기려는 기득권 세대의 불순한 의도까지 엿보인다.

청년실업률이 최고를 경신하고 결혼 비율은 최저를 경신하는 오늘이 입증하는 것은 ‘달관 세대’가 아니라 ‘청년 고통’이다. 그 고통 앞에서 달관을 이야기해도 좋은가? 감히 누가 ‘달관’을 ‘싸구려’로 만들고 있는가? 달관을 고갱이로 삼은 종교가 그 고통과 그 기만에 침묵해서는 안 될 이유다.

손석춘 건국대 교수 2020gil@hanmail.net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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