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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

“소녀의 일본군 성노예 아픔이 내 슬픔될 때 진실은 깨어납니다”

▲ 안신권 냐눔의 집 소장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낀다.

광복 70년이다. 힘든 기억도 세월이 지나면 무뎌진다지만 70년 세월을 그저 피울음으로 보낸 이들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다. 이름만으로도 슬프고 아픈 이름. 어쩌면 위안부라는 말도 할머니들에겐 모욕일 것이다. 할머니들은 위안부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제의 의해 납치된 성노예였다. 일제는 솜털 보송한 여린 소녀들을 과자를 준다고 속이거나 혹은 강제로 끌고 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성노예로 무참히 짓밟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고, 소녀들은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소녀들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은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15년째 피해 할머니들과 생활
나눔의 집서 11명 운명 달리해
삶만큼 슬프고 가벼웠던 죽음들
처참한 역사 하나둘 묻혀 탄식

반인권 행위 증명하는 소녀상 등
미국 전역에 세워진 보편적 양심
한국정치인 홍보도구 삼으며 촌극

전세계 돌며 일제 만행 알리려
기억하기 싫은 과거 증언하는
할머니들 아픔 보면 가슴 아파

외제차로 나눔의 집 찾는 부모
자녀들 봉사점수 받고자 방문
한심함 넘어 분노 일어나기도

할머니들 집과 방은 추모관으로
유물기록관도 조성해 유품 전시
아시아 대표 인권센터 건립이 꿈

해방된 조국에서 소녀들을 기다리는 것은 냉대와 비수 같은 손가락질뿐. 가족들 또한 소녀들을 외면했다. 그래서 소녀들은 평생을 치욕과 두려움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했다. 피해사실을 누가 알까 두려웠다. 일본은 소녀들을 성노예로 잡아간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자료도 폐기했다. 그러나 진실은 묻히지 않았다. 1991년,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로 살았던 처참했던 과거를 증언했다. 치욕과 부끄러움 속에 평생을 살아야했던 소녀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되고서야 가슴 속 피맺힌 울음을 토해냈다. 곳곳에서 숨죽이던 할머니들 절규가 잇달았다.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독일 홀로코스트와 비견되는 반인륜적 일제의 죄악은 이렇게 알려졌다. 그로부터 24년.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잘못을 인정하는 듯 했던 일본은 퇴행을 거듭하더니 더 뻔뻔스러워졌고 우리 정부는 무능하기만 했다.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외치며 전후 가장 호전적인 수상이라 평가받는 아베는 위안부 자체를 부정하며 과거의 유감 표명마저도 뒤집어 버렸다. 아베에 맞서 할머니들은 전 세계를 돌며 진실을 알리기 위해 마지막 삶을 쥐어짜고 있다.

이런 할머니들의 손과 발이 돼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 있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이다. 나눔의 집은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의 안식처다. 1992년 불자들의 힘으로 건립된 그곳에서 안 소장은 15년 동안 할머니들의 아픔을 함께 하며 진실을 밝히고 일본의 사죄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눔의 집에는 현재 10명의 할머니들이 살고 있다.

-할머니들의 건강은 어떠신지.
생존해 계신 분이 52분 정도 되는데 나눔의 집에 10분이 생활하신다. 할머니들 평균 연령은 90세다. 고령이신데다 험하고 굴곡진 삶을 사신 분들이라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러나 오로지 진실을 밝히고 일본의 사죄를 받겠다는 일념으로 질긴 생을 이어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세계를 돌며 일본의 성범죄에 대한 증언순방을 이어가고 있다. 4분 정도 이런 순방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또렷한 정신으로 증언을 하실 수 있는 분은 2분 정도밖에 없다. 일제의 만행을 더 이상 세상에 알리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다.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한지 15년이 됐다.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
가장 힘든 것은 역시 할머니들의 삶과 마주하는 것이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과거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증언해야 하는 과정은 뼈를 깎는 아픔이다. 할머니들도 여린 여성이다. 그래서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슬프고 아프다. 할머니들은 말한다. 지금도 나보고 매춘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죽고 나면 영원히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래서 죽을 수가 없다. 할머니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다. 할머니들은 아파 누워있다가도 증언순방을 나간다고 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죽음이 멀지않지만 진실을 밝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다 돌아가신 할머니도 많은것으로 알고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11분이다. 그 중에서 5분은 제가 마지막을 지켰다. 할머니들의 죽음도 삶만큼이나 슬프고 가벼웠다. 강덕경 할머니의 유품은 약병 하나, 우황청심환 한 알, 낡은 안경과 간병일지, A5 크기의 사망진단서 하나뿐이었다. 다 모아도 500g이 채 안됐다. 지돌이 할머니는 설 전날 돌아가셨다. 가게들이 쉬는 바람에 꽃도 음식도 장만하기 힘들었다. 누구하나 찾아오지 않은 장례식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쓸쓸히 빈소를 지켰다. 세상의 무관심이 서러웠다. 우리의 처참했던 역사들이 이렇게 하나하나 묻히고 있구나 싶었다.

-일본 수상 아베는 일본군이 성노예 할머니들을 강제 동원했다는 사실마저도 부인하고 있다.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크게 줄었다. 해마다 수학여행을 오던 일본고등학교도 학부모들 반대로 이제 오지 않는다. 일본의 양심세력과 연대해 이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했지만 힘들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할머니들이 독일과 미국 등 세계를 돌며 일본의 만행을 알리며 아베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사실 2007년 미국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클 혼다 의원의 주도로 일본이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고 이런 사실을 교과서에 기재하라는 미 하원 결의문이 채택됐다. 2011년 미국 뉴저지에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기림비가 세워졌다. 2013년에는 캘리포니아 그렌데일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일본군의 반인권적인 행위를 증명하는 기림비와 소녀상이 미국 전역에 꾸준히 세워져 이제 11개나 된다. 더디지만 할머니들의 노력이 성과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할머니들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우리 정부도 일본에 강력하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없다는 이야기다. 오히려 정치인들로 인해 문제가 꼬이고 있다. 미국의 기림비와 소녀상은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것이다. 국가와 인종에 상관없는 인류보편의 양심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 관계자와 정치인들이 현장을 방문해 인증샷을 올리고 훼손을 방지하기위해 미국 현지에 특사를 파견하겠다는 촌극을 벌였다. 그러자 바로 일본의 반격이 시작됐다. 한국의 사주를 받은 일부 미국 정치인과 시민들이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기림비와 소녀상을 세우고 있다고 선전한다. 정치인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아픈 우리의 역사를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포장도구로 이용하는 행태에 분노가 치민다. 미국 시민단체나 정치인들도 한국 정치인들의 이런 행동 때문에 난감해 하고 있다.

-정부는 2017년까지 할머니들의 아픈 역사를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겠다고 밝혔다.
나눔의 집에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관련 자료들이 3000점 넘게 소장돼 있다. 특히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 200여점은 귀중한 자료다. 심리치유 차원에서 그린 그림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아름다운 추억과 일본군에 끌려가던 지옥 같은 기억, 위안소에서의 처절했던 삶, 귀국해서의 고통이 세밀하게 담겨있다. 이외에도 위안소 관련 자료와 당시의 콘돔, 일본군 철모, 칼 등 당시 사용하던 유물도 많다. 이런 자료들을 모아 2013년 국가기록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정부에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요청했다. 사실 국가에서 먼저 나서야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요청을 받자마자 정부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검토해 온 성과처럼 포장해 발표해 버렸다. 고맙지만 씁쓸한 것도 사실이다.

-아픈 역사에 대해 무관심한 국민들에게 서운한 점도 있지 않나.
자녀들의 봉사점수를 얻기 위해 아들 대신 외제차를 타고 와서 확인증을 끊어달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심함을 넘어 분노가 일었다. 할머니들의 아픈 삶이 그들에게는 점수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그래서 회원제로 바꿔버렸다. 한발 더 나아가 셔틀버스 회비를 부담하고 봉사활동을 하게했다. 그랬더니 좋은 인연들이 이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뒤 후원자로 활동하는 학생들도 많다. 무엇보다 같은 한국인이면서 일본 편을 드는 사람들을 국내에서 보는 일이 가슴 아프다. 세종대 박유하 교수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일본정부를 대변하는 내용의 책을 냈다가 가처분에서 져 놓고도 일본에서 한국인의 이름으로 그 책을 팔고 있다. 피눈물이 난다. 유럽에서 나치를 옹호하면 법의 처벌을 받듯이 우리도 법적인 조치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들의 연세가 많다.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나눔의 집은 어떻게 되나.
2013년 미국의 홀로코스트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뉴욕과 캘리포니아 두 곳을 가봤는데 잘 정비돼 있었다. 특히 인권교육의 산실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감명 깊었다. 그곳을 벤치마킹해 나눔의 집을 아시아 대표 인권센터로 조성할 계획이다. 할머니들의 살던 집과 방은 그대로 남겨 추모관으로 활용하고 유물기록관을 조성해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의 유품과 자료들을 별도로 전시할 계획이다. 특히 일본이 가장 많은 성 착취소를 세웠던 오키나와의 전쟁장면도 재현해 놓을 생각이다. 그 옆으로 추모공원을 조성하고 500여평 규모의 인권센터도 지을 계획이다. 이곳을 아시아 인권교육의 허브로 활용하게 될 것이다. 주변에 사할린 강제노동자, 징병징용 후손들, 파독 간호사, 미혼모들 위한 복지타운도 검토하고 있다.

안 소장은 할머니들의 슬픔과 아픔이 곧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아픔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삶은 바로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의 삶이기도 하다. 세상은 할머니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아픈 역사가 온전하게 자신의 아픔으로만 남지 않을까 걱정이다.

“끝까지 할 겁니다.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고 피 맺힌 삶을 마감하는 할머니들에게 해들릴 수 있는 유일한 효도이기 때문이지요.”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할머니들의 처절했던 삶에 무관심한 세상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를 다독인다.

김형규 편집부장 kimh@beopbo.com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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