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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제2칙 조주의 지도무난 (끝)

“고목에 다시 꽃이 피니, 달마대사께서 동토에 노니시네”

▲ 절 앞에 펼쳐진 묘경(妙境)과 자신이 하나가 된다. 원오 선사가 제창한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과 같은 이치다. 수종사에 오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몸을 섞는 두물머리에 펼쳐진 운무를 감상할 수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송>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 (착어 ← 눈앞에 나타나 있네. 머리 위에도 끝이 없고 발아래도 끝이 없다.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은 금물.)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 (착어 ←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만사를 잊고 그냥 바라볼 때
보는 ‘나’ 보이는 ‘대상’ 소멸
뛰어난 절경과 자신이 하나 돼

‘집착하는 나’로는 화두 못뚫어
분별망상 완전히 끊어지는 찰나
생사의 관문 뚫는 순간 다가와

어디에도 머묾이 없는 ‘지극한 도’
중생구제 수행 이어져야 선생활

앞 구절 “하나에 여럿 있고, 둘에 둘이 없다”가 ‘지극한 도’의 차별과 평등의 양면을 보여 준 것이라면, 이 두 구절은 ‘지극한 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아침에 해가 뜨고 달은 지고, 저녁이면 달이 뜨고 해는 진다. 해와 달은 ‘그냥’ 뜨고 질 뿐이다. 때가 되면 떴다가 질 뿐, 간택도 명백도 없다. 사계절은 소리 없이 바뀌고, 백화는 무심히 피고 진다.

절 앞 난간에서 바라본다. 병풍처럼 둘러싼 겹겹의 기암절벽, 그 사이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얼음같이 찬 맑은 물. 당신은 거울이고 그 앞에 이 묘경(妙境)이 펼쳐져 있다. 거울에 비친 묘경과 눈앞의 묘경,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당신은 이 묘경과 하나이고, 이 묘경은 그대로 당신 자신이다. 보이는 것도 묘경, 보는 자도 묘경. 오직 이 묘경 뿐, 털끝만큼의 분별도 없다.

원오 선사는 평창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제창하고 있다.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 여기에 이르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구극(究極)이고, 하나하나가 다 도(道)이며, 이것저것 모두가 진(眞)이다. 보는 마음과 보이는 대상이 함께 사라져 하나가 되어 있지 않은가?”

원오 선사는 말한다. 보는 ‘나’도, 보이는 ‘대상’도 사라지고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보이는 것에 대해 취사선택이 없을 때, 나는 나가 아니라 보이는 것 그 자체이다. 나와 대상은 어떤 틈도 없는 하나다. 대상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라 나이다. 여기에 이르면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 이 말은 그대로 구극(究極)의 묘경이고 지극한 도이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가 도(道)이고 진(眞)이니 의심되는 무엇이 있겠는가?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에 대해 원오 선사는 “눈앞에 나타나 있네. 머리 위에도 끝이 없고 발아래도 끝이 없다.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착어를 붙였다. ‘지극한 도’의 묘경(妙境)이 끝없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보는 ‘나’가 없으니 온통 그대로 묘경의 연속이다. 인간의 사량(思量)이 미칠 바가 아니다. 온통 그대로 묘경의 연속인데 머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찾을 것은 또 어디 있는가?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에 대해서는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라는 착어를 붙였다. 송의 이 경지까지 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털끝만치라도 간택하는 마음이 있으면 목숨은 없다. 죽을 때는 철저히 죽어야 한다. 어찌 소름이 끼치지 않으랴? 남김없이 다 죽었을 때, 저절로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의 묘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가에 해 떠오르니 달은 지고, 난간 앞에는 깊은 산과 차디찬 개울.” 이것도 전통적인 화두이다.

<송> 해골은 의식이 다해 감정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착어 ← 널 속에서 눈을 딱 부릅뜨고 있군. 노(盧) 행자는 그의 동문이네.)
고목은 용처럼 울음소리를 내니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착어 ← 이것 참! 고목에 다시 꽃이 피니, 달마대사께서 동토(東土)에 노니시네.)

목숨에 연연해서야 어떻게 지극한 도를 체득하겠는가? 대사일번(大死一番), 온몸을 던져 크게 죽어 보지 않으면 지극한 도의 경계는 절대로 알 수 없다.

‘집착하는 나’가 있는 한 화두는 뚫리지 않는다. 깨달은 바가 있다고 해도 거기에 머물면 또 막혀 버린다. 스승은 예리하게 허점을 간파하여 사정없이 질타하며 죽비를 내려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연속이다. 뼈를 깎는 수행, 절망의 심연에서 극한 상태까지 내몰려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화두를 붙든다. ‘타성일편(打成一片)’, 화두와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나는 없고 화두만 또렷하다. 자신을 괴롭히던 분별망상은 완전히 끊어지고 홀연히 ‘자기’라는 허상이 종적을 감춘다. 참으로 “해골은 의식이 다해 감정이 일어날 리가 없다.”

분별망상이 완전히 끊어지면 생사의 관문을 뚫는 순간이 온다. 자기의 본래모습에 눈을 뜨는 것이다. 자기도 세계도 모든 것이 변한다. 보는 것, 듣는 것, 일체가 창조적으로 되살아난다. 이 체험이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 완전히 죽은 뒤 새롭게 되살아나는 깨달음이다. 이것을 설두 선사는 “고목은 용처럼 울음소리를 내니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고 읊었다.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고목이 천지를 진동시키는 용 울음소리를 낸다. 티끌 하나 없는 마음에서 백화가 만발한다.

원오 선사는 “해골은 의식이 다해 감정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에 대해 “널 속에서 눈을 딱 부릅뜨고 있군. 노(盧) 행자는 그의 동문이네”라 착어했다. 널 속에서 눈을 딱 부릅뜨고 있다는 것은 허상의 ‘나’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화두만 성성한 경계를 가리킨다. 노(盧) 행자는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 선사를 말한다. 선사의 속성은 노씨였다. 오조 홍인 선사의 문하에서 방아만 찧고 있던 노 행자. 그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일구가 들어간 게송을 지어 중국 선종의 육조가 된다. 한 티끌도 붙을 자리가 없음을 밝힌 혜능 선사는 해골의 동문이다. 대사일번의 경계에 든 대표자로서 육조 혜능 선사를 들고 있는 것이다.

“고목은 용처럼 울음소리를 내니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에 대해 원오 선사는 “이것 참! 고목에 다시 꽃이 피니, 달마대사께서 동토(東土)에 노니시네”라는 착어를 붙였다. 현사 사비 선사가 말했듯이 ‘달마불래동토(達磨不來東土)’, 달마대사는 중국에 온 적이 없다. 와도 온 것이 아니다. ‘달마유동토(達磨遊東土)’, 온 적이 없는 달마대사가 중국에서 노닐고 있다. 흔적 없이 일어나는 작용, 진공묘유(眞空妙有)요 ‘대사일번 절후소생’이다.

“해골은 의식이 다해 감정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고목은 용처럼 울음소리를 내어 아직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도 각각 전통적인 화두이다.

<송> 어렵구나 어려워, (착어 ← 삿된 법은 유지할 수 없다. 뒤집어서 말하고 있을 뿐. 여기를 어디라고 생각하여, 어렵다느니 쉽다느니 말하는가?)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없다”는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어렵고 어렵다. 진정으로 지극한 도를 깨닫는 경지에 이르려면 ‘백련천단(百鍊千鍛)’해야 한다.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피투성이의 고투 없이는 힘들다.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도 ‘무문관’ 제19칙 ‘평상시도(平常是道)’의 평어에서 “조주가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다시금 30년을 수행해야 진짜로 안다”고 했다. ‘30년’이란 액면 그대로 30년 세월이 아니라 ‘끝없는’ 세월이다. 향상(向上)의 수행, 곧 절대 평등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에는 목표달성의 때가 있다. 하지만 향하(向下)의 수행, 즉 상대 차별의 세속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끝이 없다.한량없는 중생을 다 구제하는 수행은 무한히 계속된다. 다함이 없는 것이 참다운 수행이고 선 생활이다.

원오 선사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에서 ‘어렵지 않다’를 설두 선사가 ‘어렵다’로 바꾼 것을 삿된 법이라 착어했다. 뒤집어서 반대로 말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여기를 어디라고 생각하여, 어렵다느니 쉽다느니 말하는가?”라고 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지극한 도를 ‘어렵다’ ‘쉽다’로 붙들어 매어 두지 마라. 붙들어 매는 순간 간택이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원오 선사는 삿된 법을 말했다고 일침을 놓았던 설두 선사를 탁월한 선사로 회복시키고 있다. 설두 선사는 ‘어렵지 않다’에 매인 범부를 “어렵다”는 한마디로 지극한 도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송> 간택이든 명백이든 그대 스스로 보라. (착어 ← 눈먼 이. 남에게 떠맡겼는가 생각했더니, 고맙게도 스스로 본다고 하는구나. 내가 알 바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언구도 수행자를 진리 그 자체가 되게 할 수는 없다. 스스로 아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말을 아껴 수행자 자신이 고심참구(苦心參究)하여 스스로 눈을 뜨도록 해야 좋은 스승이다. “간택이든 명백이든 그대 스스로 보라.”

이 구절에 대해 원오 선사는 농을 던진다. “그대 스스로 보라”고 남에게 전가하다니. 설두 선사 당신은 눈먼 사람인가? 아니지, “그대 스스로”는 설두 선사가 자신에게 한 말일 테니 설두 선사 스스로 본다고 하는구나. 스스로 본다고 하니 참으로 고맙소.

원오 선사는 마지막으로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착어하였다. 지극한 도는 바로 눈앞에 있다. 이 지극한 도는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원오 선사는 자신이 체득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뜻에서 “내가 알 바 아니다”고 했다.

오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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