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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일제강점기 사찰의 산림소유권 형성

일제, 산림수탈 위한 조사과정서 사찰 숲 소유 인정

▲ 송광사 소유의 주암면 행정리 산 162번지의 숲. 송광사가 수백 년 동안 금양한 실적을 임야조사위원회에 제시함으로써 1920년대 이 숲에 대한 행정리 주민들의 부당한 소유권 주장을 막을 수 있었다.

찰은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를 조선말까지도 소유하고 있었다. 주권을 잃은 병탄 이후에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일제강점기에 진행된 산림 소유권의 형성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삼림법과 임적조사 통해
산림소유자 대략적 파악

‘조선임야조사령’ 마련해
연고제시하면 소유 인정

숲 소유권 확보위한 노력
송광사의 ‘산림부’서 확인

산림 소유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나라 최초로 제정된 ‘삼림법’(1908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은 순서다. 통감부 통치시기에 제정된 삼림법은 산림을 제실림(帝室林), 국유림, 공유림, 사유림으로 구분하는 한편, 지적신고 절차를 마친 산림만 그 소유권을 인정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측량절차와 과도한 소요경비 등으로 인해 지적신고를 마친 산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임적조사사업(1910년)이었고, 조사항목에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가 포함되어 사찰림의 전체 규모를 최초로 파악하게 되었다(법보신문 1294호 참조). 임적조사사업으로 얻은 결과물은 그 후 제정된 ‘조선삼림령’(1911년)에 ‘삼림산야 및 미간지(未墾地) 국유 사유 구분 표준’의 근거로 활용되었다.

산림소유자에 대한 개략적인 파악에 그친 ‘삼림법’과 임적조사사업은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 효력이 빠져 있었다. 그 보완책으로 총독부는 산림수탈에 필요한 국유림과 사유림에 대한 법적 소유권 제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조선삼림령’으로 국유림 구분조사를 하는 한편, 임야조사사업(1917~1924년)을 시행하여 임야에 대한 권리관계를 법적으로 확정 짓고자 했다. ‘사원이 관리하는 임야’ 역시 총독부의 이런 산림정책에서 예외적 대상이 아니었다.

사찰림의 소유권 형성 과정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임야조사사업이다. 그 이유는 사찰이 관리하는 숲들이 ‘삼림법’의 지적 신고 절차를 이행하지 못해서, 또는 국유임야구분조사(1915년)에 의해 국유림으로 편입되어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조선임야조사령’(1918년)과 시행규칙에 필요한 조항을 삽입했다. ‘조선임야조사령’ 3조에는 ‘국유임야에 대하여 조선 총독이 정한 연고(緣故)가 있는 자는 전항의 규정에 준하여 신고하여야 한다’와 그 시행규칙 제1조 1항은 ‘고기(古記) 또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여 임야에 연고가 있는 사찰’로 명시되어 있다. 정리하면, 사찰이 연고의 근거를 제시하면 국유림에 포함된 산림의 소유권을 다시 인정한다는 내용을 ‘임야조사령’에 명시한 셈이다.

국유임야에 대한 연고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연고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삼림산야 및 미간지 국유사유구분표준’(1912년 훈령 4호)의 8번째 항목[‘영년(永年)수목을 금양(禁養)한 토지’]에 등장한다. 총독부는 산지의 국유와 사유를 구분하는 연고의 근거로 ‘영년수목의 금양’을 들고 있다. 그리고 금양의 대상이 되는 영년 수목의 인정 기준을 임야의 평균입목도는 3/10 이상, 수목의 평균수령은 10년 이상인 숲을 제시하고 있다. 즉, 조선임야조사령 시행규칙으로 총독부는 사찰에서 장기간 숲을 가꾼[영년 금양]의 실적이 있으면 연고권을 인정했고. 연고권을 부여받은 사찰은 일정한 사정(査定) 절차를 거쳐 소유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었다. 결국, 소유권의 획득 여부는 금양 실적이라는 연고권의 존재 여부에 있었던 셈이다.

연고권의 존재를 증명하는 금양은 무엇을 의미할까? 숙종 이후부터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 금양의 자의(字意)적 의미는 ‘타인의 간섭을 금하고, 산림을 양성한다’이지만 실제는 ‘산림의 양성보다 타인의 간섭을 금지’하는 측면이 더 강했다. 그래서 금양의 관리주체는 금양 산림에 타인의 도벌, 방화, 입장(入葬), 개간, 토석채취 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고 있었다.

금양의 대상이 된 산림은 모든 인민이 그 사용과 수익을 공유할 수 있는 산림이 아니었고, 특정한 관리 주체와 용도가 정해진 산림이었다. 예를 들면, 개인은 분묘 주변의 산림이, 촌락은 송계림(松契林)이 금양의 대상이었고, 국가는 직속림(한양금산, 봉산, 능원묘 부속림, 관방림, 관용시장)이 금양 대상이었다. 사찰은 땔감숲[柴地], 수호봉산, 관리봉산이 금양의 대상이었다.

사찰은 특정 산림의 금양 실적을 어떻게 증명하였을까? 금양자의 이용권이 미치는 산지 경계를 표시한 문서[立案], 사패문기, 절목 등과 같은 문서를 갖추거나, 산직을 고용하여 정례적으로 순산(巡山)한 실적을 제시하면 가능했다. ‘조선임야조사령’ 시행규칙 제1조 1항에 ‘고기(古記) 또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여 임야에 연고가 있는 사찰’이 명시되었던 까닭도 그 당시 금양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찰이 주변 산림을 금양했던 기록은 오늘날도 전해지고 있다. 고종 27년(1980년)에 명례궁에서 평안도 영변 묘향산 보현사로 내려 보낸 완문에는 각종 잡역을 혁파한다는 내용과 함께 ‘수목 금양’을 명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유사한 사례는 용문사(예천)의 장례원 완문에서도 금양기록(‘사방의 경계를 정하고 사패금양하여 수호’)을 찾을 수 있다.

개개 사찰이 총독부의 임야조사사업에 대응한 구체적 기록은 ‘조계산송광사사고’의 산림부로 확인할 수 있다. ‘산림부’에 수록된 송광사의 일지에는 ‘1919년 3월29일 임야조사사무소에 순천군 주암면 행정리 임야를 신고하고, 8월1일 신고료 85전을 냈으며, 1920년 10월에 송광사 소유의 산 경계에 표기(標旗)를 세웠다’고 밝히고 있다.

‘산림부’에는 ‘송광사와 주암면민들 사이에 임야신고와 측량 과정 중에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였고, 행정리 주민 백경인이 송광사 소유의 주암면 행정리 산 162번지 임야의 소유권을 주장하므로, 그 소유권 분쟁에 대한 조사에 응해달라는 공문이 1920년 12월20일 접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계속하여 소유권 분쟁 조사의 목적으로 ‘송광사 주지 이설월은 행정리 산림에 대한 연고의 증거(입안, 금표, 700여년 금양의 역사)를 1차 진술서와 함께 제출(1920년 12월)하고, 다시 보완된 연고의 내용[관문기(1829년), 순천부사의 결정문(1895년), 궁내부 관문기(1899년)]등을 2차 진술서와 함께 제출(1921년 5월)]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임야조사 결과는 송광사에 불리하게 나왔다. 송광사가 금양했던 신흥리 5정보, 장안리 161정보 임야에 대한 연고자는 송광사로 사정(査定)되었지만, 행정리 156정보 임야에 대한 연고는 행정리 외 7개리에 있다고 사정공시(1923년 9월)를 하였기 때문이다. 송광사는 이에 즉시 불복신청을 하였다. 이 불복신청은 임야조사 사업상 조사·측량사무(산림의 경계 확정)와 사정(査定)사무(소유권자 파악·확정)와 재결(裁決)사무(사정결과에 불복한 신청인들의 소송 처리)의 절차 규정을 따랐음을 의미한다.

▲ 조선총독부관보(1912년 2월3일자)에 실린 ‘삼림산야 및 미간지 국유사유구분표준’ 훈령 4호. ‘연고’ 내용은 8번째 항목[‘영년(永年)수목을 금양(禁養)한 토지’]에 등장한다.

▲ 조선총독부관보(1918년 5월1일자)에 실린 ‘조선임야조사령’. 제3조 ‘국유임야에 대하여 조선 총독이 정한 연고(緣故)가 있는 자는 전항의 규정에 준하여 신고하여야 한다’고 명기돼 있다.

송광사가 행정리 임야에 대한 다양한 연고 증거서류(봉상시, 홍릉, 궁내부, 내부, 장예원, 전남관찰부에서 발급한 절목 각 1통씩, 순천부사가 발급한 절목 2통)를 불복신청서와 함께 제출(1923년 11월17일)하고. 주암면 광천리 임야조사위원출장소의 재조사(1928년 1월13일에서 31일까지) 결과,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는 최종적으로 순천군 주암면 행정리 산 162번지 임야를 불복신청인 송광사의 소유로 인정하는 재결서 등본을 발부(1928년 9월 5일)하였음을 ‘산림부’는 밝히고 있다.

송광사의 행정리 산 162번지 임야는 그 이듬해 다시 한 번 더 송사에 휘말리게 된다. 미등기를 이유로 주암면 복다리 주민 조민섭 외 81명이 임야 땔감 채취권 확인 소송을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송은 송광사가 등기를 완료함(1929년 1월)에 따라 최종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으로 끝난다. 또한, 임야조사결과 송광사로 사정되었던 장안리, 봉산리, 신흥리 소재 임야는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1926년 4월5일)에 따라 송광사의 연고가 인정되어 양여를 받았으며, 최종적으로 송광사가 그 소유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의 사찰 숲은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임야조사사업으로 먼저 필지마다 소유자와 경계를 구분·확정짓고, 그 후, 특별연고삼림양여사업으로 해당 필지의 소유자와 지번을 등기부에 등재함으로써 일물일권적(一物一權的)적 소유권이 최종적으로 형성되었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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