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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푸티상사의 지상법문] 12. 선의 경지(1)

기자명 법보신문
  • 법공양
  • 입력 2015.06.09 15:32
  • 수정 2016.01.05 16:09
  • 댓글 1

선은 순수한 아기 상태 같아 마음 속에 차별 탐욕 없어야

 
아기의 손아귀힘 약해 보이지만
체중 비하면 엄청난 에너지 있어
순수 경지로 돌아간 극치의 상태

불법은 여러 중생 제도 목표이므로  
‘관자재보살’도 모든 수행자 지칭

‘심경’ 속 ‘사리자’는 수행자 상징
‘무욕무구 ·공불이색’ 경지 보여

1. 아기의 힘
내가 설법하는 목적은 모든 수행자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연의 경지 즉 선의 경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옛 중국인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선의 사고방식에 따라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도덕경’의 저자인 노자를 그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을 수 있는데 노자는 ‘도’란 아기와 같이 순수하고 진실한 상태이며, 에너지가 가장 강한 본연의 상태라고 주장했습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말할 줄도 모르고 걸을 줄도 모르는데다가 아이가 자라서 기고 걷는다고 해도 그것이 뛰어난 능력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이의 눈빛은 얼마나 맑습니까? 건강상태가 정상적인 아이의 두뇌는 오염되지 않고 깨끗합니다. 부모가 아주 교활하더라도 아이가 배고플 때 우유를 먹일 뿐 그들의 간교함과 영악함이 아이에게 전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떠한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아기의 두뇌는 직감이 아주 강하고 정확합니다. 이때 인간의 본성이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청정합니다. 배고픈 아기가 젖을 먹고자 할 때의 반응을 가장 직접적인 예로 들 수 있는데 엄마가 옆에 없으면 큰 울음소리로 배고프다는 것을 알립니다.

아기에게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능력이 있습니다. 아기의 힘은 성인에 비해 아주 약하지만, 자신의 체중이나 나이로 미루어 보면 손힘은 아주 강한 편입니다. 예전에 아기의 손을 적당한 굵기의 난간에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아기가 난간을 꼭 쥐는 것을 보고 아기를 안은 손을 살며시 놓았더니 아기가 그대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귀가 후 아이들 대상으로 실험하지 마십시오! 식성이 좋아서 약간 통통한 아기라 해도 몸무게는 7.5~8kg 정도밖에 안 될 것입니다. 아기의 손아귀 힘은 나이나 체중으로 봤을 때 자신을 공중에 매달만큼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선의 경지에서 보면 이는 지극히 순수한 경지로 돌아간 극치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炁(기)와 空(공)
극치의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도교와 불교의 수행법은 아주 비슷한데 모두 좌선이 위주입니다. 도교에서는 수행이 극에 달한 상태를 아래에 4개의 점이 있는 ‘炁(기)’자로 표현합니다. 이 글자를 불교의 ‘심경’과 결합하여 보면 어떻게 될까요?

‘심경’의 내용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중에서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위에서 말한 ‘’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는 ‘氣(기)’라고 할 수도 있고, ‘無(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없음’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空(공)’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즉 ‘無(무)’는 ‘空(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공’은 정말 빈 것일까요? 아닙니다. 아래에 연화 발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글자를 어떻게 해석할까요? 아주 간단하게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할 수 있는데 비어 있는 듯이 보이나 실제로는 비어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서유기’에서 경지가 가장 높은 큰 사형의 법명은 ‘오공(悟空)’입니다. ‘공’을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심경’에서 말하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누구일까요? 어떤 사람은 불교 전설 속의 대보살인 관세음보살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법은 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며, 일반적으로 불법은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법합니다. 그러므로 ‘관자재보살’은 수행하는 모든 수행자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선 수행하는 사람이 수행의 토대와 경지가 아주 높은 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바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입니다. ‘반야바라밀다’의 의미는 ‘깊은 선의 경지’ 즉 ‘지극히 깊은 선의 경지’입니다. ‘시(時)’는 ‘현재’, ‘지금 ‘을 뜻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깊은 극치의 선경(禪境)에 도달하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을 느끼게 됩니다. 시각 때문인지 아니면 대뇌에서 환영과 비 환영 사이에서 나타나는 ‘상(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생명의 본질, 유와 무의 교차점, 생명의 기원, 우리의 본성, 고통과 환락의 무분별, 모든 사물의 근본이 되는 원점을 보게 됩니다. 도교에서는 이런 상태를 ‘기()’라고 하고, 같은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공’한 것은 아닙니다. ‘심경’의 이 단락은 사물의 근본적인 참모습과 기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상’의 경지는 집착이나 우리 상상 속의 어떠한 그림 때문에 생겨난 상(相)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의식이나 정신세계에서 먼저 보거나 먼저 깨달았다 할 것 없이 보거나 깨달은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 대해 ‘아, 이런 거였구나’하고 문득 깨닫는 것입니다.

 
3. 사리자의 경지
역사적으로 보면 부처님의 제자 중에 ‘사리불(舍利弗)’이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사리자’는 가장 자재로운 경지를 나타내는 말이며,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의 경지이기도 하지요. 부처님은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사리자’라고 불렀습니다.

‘심경’에서는 사리자에 대해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정불구(不淨不垢),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파생하여 불상불하(不上不下),부좌불우(不左不右), 불남불여(不男不女), 불공불색(不空不色)이라고도 합니다. 중국 고대 둔황의 막고굴 조각상 가운데 아주 아름다운 보살과 천신이 있는데 신체구조 상으로는 불남불여입니다. 단지 일반적으로 그것을 연구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수행하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모습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욕구가 사라질 뿐입니다.

사물에 대해 논의하면 새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사람은 왜 욕망이 있을까요? 타고난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남자이거나, 여자이며, 성별의 구별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성별 상 구분이 있는 한, 과일이 익어 떨어지듯 때가 되면 성에 대한 욕구가 생겨납니다. 사과는 8월~10월이 되면 익어서 파랗거나 빨개집니다. 따는 사람이 없으면 저절로 떨어져서 썩어 버리지요. 생명은 이렇게 태어나고 사라집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하여 다시 사라지게 됩니다.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별을 구분하면 그와 함께 성욕의 수요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정 때문에 생겨나거나 정과 연관되는 모든 번뇌가 욕망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뚱뚱하다’라고 한마디 하면 당신은 기분이 언짢아지겠지요? 이것이 성별, 욕망과 관련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단지 생리적인 음양, 남녀의 구분은 욕망이 생기는 주요 원인이고, 이 욕망이 무한한 다른 욕망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사리자’는 수행자가 도달하는 무욕무구(無慾無求), 공불이색(空不異色)의 경지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4. 초탈한 사형
사리자의 경지는 초탈한 경지입니다. 현실생활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경지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이는 “나는 수행이 아주 잘 되어 있으며 계율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수행자가 남자라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며 여자와 거리를 두고 여자가 지은 옷도 입지 않고 심지어 남녀문제를 피하고자 아예 여자를 만나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그 만의 공간에 가두고 여자가 밥을 가져다주면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왕씨 계세요? 폐관한다기에 밥 가져왔어요.”
“없습니다!”
“없는데 대답은 어떻게 하죠?”
“그것은 공(空)입니다!”

분명 이런 사람들은 아직 초탈한 ‘공불이색’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선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두 사형제가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마침 강을 건너려는 젊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강물이 불어 징검다리로는 건널 수가 없게 된 부인은 아주 조급해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특히 송, 원, 명, 청 4개 왕조시대에는 여자가 외부에서 다리나 발을 드러내면 정숙하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사제는 이 부인이 제법 젊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으니 절대 가까이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사형은 그 부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부인, 강을 건너시려고요?”
“네, 스님. 건너고 싶은데 건널 수가 없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업고 건널까요?”
“어머, 그러면 아주 좋지요. 어머니께서 아프셔서 빨리 친정에 가봐야 하거든요. 스님께서 도와주신다면 저도 꺼릴 상황이 아닙니다.”
“기꺼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뜻이 맞은 두 사람은 그렇게 업고 업혀 강을 건넜습니다. 1년 후 어느 날, 사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사형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형, 그때 그 부인 말입니다. 꽤 예쁘지 않았습니까?’ 사형은 ‘응,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무겁던가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네.”
“피부가 매끄럽던가요?”
“별 느낌이 없었네.”
“정말 부럽습니다. 모두 수행자는 여인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사형의 그 행동은 계율을 범한 것이 아닌지요?”
“그런가? 나는 계율을 범한 것 같지 않은데……”
“계율을 범하지 않다니요? 지난번에 그렇게 적극 나서서 그 부인을 업어주고 또 그렇게 기뻐하셨잖아요.”

이 말을 듣고 사형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이미 1년 전에 그 여인을 내려놓았는데 자네는 아직 업고 있군. 힘들지 않은가?”

보다시피 사형의 경지는 ‘공불이색, 색불이공’의 초탈한 경지이며, 사리자의 경지입니다. 마음속에 차별과 탐욕이 없어서 거리낌이 없습니다. 어차피 사람을 돕는 일이고 도둑을 도와 물건을 훔친다든지, 물건을 나른다든지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강을 건너 친정에 가려는 부인을 도운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아마도 아직 ‘해바라기 씨’의 경지여서 의식 속에 남녀에 대한 분별심이 아주 큰데, 이는 자신의 심리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리적인 욕구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여 결국 행위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진푸티상사의 홍법시리즈 ‘선의 경지’ 중에서
번역 : 정금주 / 제공 : 한국 보리선수 약사선원

[1297호 / 2015년 6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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