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양지의 사천왕사 ‘탑하팔부신장’

‘사천왕 vs 팔부중’ 도상 논쟁…불교 도상학계 대표적 사례

▲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의 녹유소조상편(칼을 든 신장).

지난 글에서 신라의 조각승 양지(良志)의 대표작이 사천왕사 출토의 소조신장상임을 살펴보았다. 이는 일연이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서 “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은 양지의 작품”이라고 밝혀두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조각승 양지의 대표작
일제강점기 발굴 조사로 드러나
삼국유사 근거로 팔부신중 인식

‘사천왕’설 제기되며 논쟁 시작
파편 복원시 도상이 최대 4종류
“출토 장소도 불명확”근거 제시

2006년 정식 발굴로 국면 전환
탑 아래 녹유신장편 발굴 ‘주목’
사천왕 핵심 북방다문천은 없어

수정된 가설도 결론 도출 못해
도상학 연구 범위 확대한 계기

이 사천왕사터는 일찍이 일제강점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다. 절터로 철길이 지나면서 구제발굴 형식의 조사가 진행된 것이었다. 조사 결과 절터의 동·서 목탑지에서 문제의 소조신장상 파편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작품성이 매우 뛰어나서 이미 일본인 학자들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하간 이를 통해 일연이 언급한 “탑 아래 팔부신장”이 바로 이들 소조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이 소조상의 도상은 팔부신중이 아니라, 사천왕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들 파편을 조합했을 때 도상이 네 종류 이상은 되기 어렵다는데 있었다. 더불어 이들 도상은 악귀로 보이는 인물을 깔고 앉아있는데, 이렇게 악귀 위에 앉거나 서는 것은 사천왕이고, 이 점이 팔부중과 차별된다는 것이다.

▲ 녹유소조상 3D스캔(활과 화살을 든 신장).

이 주장에 의하면 파편들의 복원적 조합 결과 칼을 든 신장도상이 한 점 추론되는데, 이는 사천왕 중의 지국천에 해당한다고 했다. 지국천이 칼을 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외의 한점은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데, 사천왕이 활을 든 경우는 매우 드문 예이지만, 그래도 화엄사  서오층석탑의 남방 증장천, 혹은 부석사 조사당 벽화 중의 남방천왕이 활·화살 등의 지물을 들고 있어 이를 증장천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은 왜 “탑 아래 사천왕”이라고 하지 않고 “팔부신장”이라고 했을까? 우선 이 파편들이 탑 아래에서 출토되었다는 근거가 빈약했다. 단지 탑지에서 수습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파편들의 원위치는 목탑 기단부가 아니라 1층 탑신 내부였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석탑의 경우를 살펴보면 1층 탑신에 사천왕, 기단부에 팔부중, 그리고 지대석에 12지신상이 새겨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더불어 일연은 팔부중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탑 아래에 팔부중이 등장하는 것은 9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되기 때문에 사천왕사의 조성 연대를 고려해본다면 팔부중이 등장하기 전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일연은 고려시대의 시각으로 통일신라 초기의 도상을 읽었다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일연의 기록을 신뢰해야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우선 사천왕사에서 중요한 개념은 사천왕이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시절 당나라 수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명랑법사가 문두루 비법을 설하기 위하여 만든 사찰이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명랑은 임시로 채색비단으로 절을 만들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든 다음 12명의 유가승을 동원하여 비법을 일으켰다고 한다. 따라서 사천왕사의 중심은 이때의 오방신상인데, 아마도 사천왕과 이들을 거느린 제석천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삼국유사’ ‘경명왕조’에서 사천왕사 오방신의 활줄이 끊어졌다고 한 기록과 ‘삼국사기’ ‘경명왕조’에서 사천왕 소조상의 활줄이 끊어졌다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오방신이 곧 사천왕과 연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천왕사에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천왕은 탑이 아닌 금당에 봉안되어야 한다. 그런데 탑에 봉안된 소조상이 어떻게 사천왕일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 파편들을 수습했던 일본인 학자들의 증언대로 탑지에서 발견되었다면, ‘삼국유사’ ‘양지사석’에 기록된 양지의 ‘탑 아래 팔부신장’으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사천왕상 주장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만약 이 상들이 사천왕이고 사천왕사의 양쪽 탑에 봉안되어 있었다면, 파편들을 조합했을 때 결국 여덟 구의 사천왕, 즉 두벌이 나와야하지만, 실제는 파편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사천왕’설 주장에서는 사천왕이 금당이나 강당에도 조성되었을 가능성, 혹은 사찰을 세우면서 공사 현장에 바로 소조상 생산시설을 두고 제작하면서 나온 실패작일 가능성, 그 외 오랜 세월 보수하면서 발생한 흔적일 가능성 등이 다양하게 거론되었다.

한편 악귀를 깔고 앉아있기 때문에 사천왕이라는 설에도 비판이 가해졌다. 백장암 석탑의 기단부에서 발견된 팔부중처럼 악귀를 깔고 앉은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아직 사천왕, 팔부중의 도상이 명확히 확립된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악귀 유무, 혹은 투구의 착용 여부 등은 분명한 분별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논의는 사천왕사 절터가 정식으로 발굴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깊이 있게 진전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과연 이들 소조상편은 원래 탑 기단부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목탑 1층 내부에 안치되었던 것일까? 혹은 발굴하면 팔부중에 해당하는 더 많은 도상이 발견될 수 있을까? 아니면 결정적으로 탑을 든 북방다문천이 발견될까?

▲ 경주 사천왕사 목탑지 기단에서 발굴된 녹유소조상.

그러던 차에 2006년 드디어 신라 최고의 비밀병기였던 사천왕사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되었다. 불교미술사 연구자들은 특히나 녹유신장상편의 추가적인 발굴 소식이 들려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목탑지 기단부에 부착된 상태로 많은 양의 녹유신장편이 1400여년의 침묵을 깨며 그 자태를 세상에 드러내었다. ‘탑 아래’였다.

이 사실은 일단 일연이 팔부신중이라고 언급한 것은 다른 조각상이 아니라, 이들 녹유신장상이라는 점에서 논의가 보다 좁혀지게 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8개가 아니라 무려 24개의 조각상이 기단부에 돌아가며 부착되어 있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상은 한 점만 추가되었다. 결국 세 개의 도상만을 이용해서 24개의 신장을 봉안했고, 목탑이 2기였으므로 도합 48구의 상이 봉안되었음이 밝혀졌다.

만약 사천왕 설을 뒷받침하려면 그 표지가 되는 탑을 든 북방다문천왕이 발견되어야 했는데, 끝내 탑을 든 도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천왕이라고 하기에는 숫자도 너무 많았다. ‘사천왕’설을 주장하는 연구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다. 즉, 북방 다문천이 사천왕에서 누락된 것은 문무왕이 스스로를 북방 흉노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북방은 방어의 대상이 아닌 소통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라왕족 흉노기원설은 문무왕비문에서 확인된다. 즉, 신라의 시조가 흉노 김일제(B.C.135~85)라는 내용이다. 더불어 이 비가 원래는 현재 사천왕사지의 서쪽 귀부에 세워져있었던 것이라고도 알려져 있어, 이를 사천왕 도상에 적용한 것이다.

금석문과 유물을 연결한 해석이기는 하지만, 이는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렇게 북방다문천이 제외되면, 결국 사천왕사의 기본 도상, 즉 오방신상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더불어 이 시기 다른 곳, 예를 들어 감은사 사리기 등에서는 북방다문천이 묘사되는데, 사천왕사에서만 다문천이 사라진 이유도 덧붙여져야 한다.

이에 반해 ‘팔부중’설은 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우선 도상이 세 개인 것은 탑의 기단부에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세 구씩 안치하기 때문에 세 개의 도상을 하나의 세트로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더불어 팔부중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부처를 직접 호위하는 ‘불타팔부중’이고, 다른 하나는 길장의 ‘금광명경소’ 등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천왕이 거느리는 팔부중인 ‘사천왕팔부중’도 있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사천왕은 정확히 네 구의 천왕을 일컫는 말이지만, ‘팔부’의 원래 의미는 꼭 여덟 구의 존상에 국한될 필요는 없으며, 마치 ‘사방팔방’의 ‘팔방’처럼 전체를 아우른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다수의 신중무리를 뜻하는 것이었고 경전에도 천, 용, 긴나라 등이 하나씩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팔부중의 초창기 도상인 사천왕사 팔부중상은 아직 여덟 개의 도상으로 정립되기 전단계로 보아야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사천왕사 목탑 1기의 기단에 안치된 24구는 3생의 팔부중(8부×3생=24구)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도 제시하였다.

▲ 경주 사천왕사 목탑 기단부 복원 추정도.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의 도상논쟁은 우리나라 불교도상학 연구의 대표적 사례이다. 가설이 있었고, 발굴을 통해 새로운 정보가 주어졌으며, 이로 인해 연구자들은 수정된 가설을 제기하였다. 더구나 이러한 연구를 통해 불·보살상에 집중되었던 도상학 연구의 범위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팔부중 도상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여덟 구의 도상으로 보다 정교하게 정립되었는지 그 기원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남아있는 문제도 많다. 양지는 탑 기단부의 신장상만 만들고, 막상 금당의 오방신상은 왜 만들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일연이 단지 기록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안동 신세동 전탑 아래의 24구의 신장과 사천왕사 탑 기단의 24구의 신장상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비록 사천왕사를 덮고 있던 흙더미는 들춰졌지만, 아직 문두루의 비법은 신비에 쌓여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