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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3칙 마 대사의 병(1)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으니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 임제 선사는 수행자의 멱살을 붙잡고 뺨을 후려갈겼다. 분별망상 발붙일 틈 없이 온 천지가 캄캄해진 수행자는 홀연히 대오했다. ‘청탑’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임제 선사의 사리탑 주변에 짙고 푸른 소나무가 임제선의 높은 기백을 보여주고 있다.

‘벽암록’ 제3칙은 당나라 때의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가 입적이 가까워졌을 때 절의 원주 스님과 나눈 문답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조 선사 “네 마음이 곧 부처”
선 대명사 된 즉심즉불 한마디
일상 떠나 부처 없다는 설법

스승은 조사의 언행 화두로 제시
참구는 수수께끼 풀기와 달라
‘내가’ 화두 든다는 표현은 오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속박돼
모든 수단 잃고 화두에 붙들려야

화두참구는 태고적 깨달음 확인
본래 자신에 눈 뜨게하는 게 선

마조도일 선사. ‘즉심즉불(卽心卽佛)’, 즉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이 한마디가 그의 선의 대명사이다. 그는 일상을 생활해 가는 개개인 평상의 마음이 바로 진리이고 부처임을 철저히 보여 중국 선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이 마조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네 마음이 바로 부처다(卽汝心是).”(‘조당집’ 권15 ‘대매 화상’)

이 문답에 마조 선의 핵심이 명쾌히 나타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시계 보고, 손을 움직여 밥하고, 바쁘게 걸어서 직장에 나가는 일상생활 속의 마음 작용. 바로 그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간파한 것이다. 부처는 멀리 있지 않다. 길을 가거나 앉아서 쉬거나 상황에 대처하는 바로 우리들 일거수일투족에 있다(作用卽性 또는 日用卽妙用).

그의 선은 획기적이며 혁신적이었던 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그의 문하에는 800 내지 1000명이 넘는 수행자들이 운집했고,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방(龐) 거사(740?~808) 등 개성 있고 이름난 제자만 130여명에 달했다. 선종이 중국에서 한 종파로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마조라는 거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을 받는다.

▲ 중국 임제사 법유당.

마조 선사는 수행자들 개개인의 특성에 맞춰 다양한 방법으로 지도했다. 그는 근기가 낮은 사람도 문전박대하지 않고 여러 방법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도 이 방법에 집착할 것을 우려하여, “나의 말을 기억하여 금과옥조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일깨웠다. 마조 선사의 이 말을 그의 법손들도 제자들을 지도할 때 늘 사용했다. 특히 백장 선사나 임제 선사는 이 말을 매우 강조했다. 이 말을 중시한 까닭은 스승의 말을 그대로 되뇌면서 스승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새겨야 할 대목이다.

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걸쳐 9산선문(九山禪門)을 형성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9산선문의 문을 연 조사들 대부분은 서당지장, 남전보원, 염관제안 등 마조 선사의 직제자들에게 법을 받고 귀국한 선사들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초창기의 선은 마조 선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마조 선사의 속성은 마(馬)씨였기에 마조(馬祖)라 불린다. 시호는 대적선사(大寂禪師)이다. 그는 사천성 성도(成都) 북쪽 인근에 위치한 한주(漢州) 십방현(什方縣) 출신으로, 고향의 나한사(羅漢寺)에서 출가했다. 키를 만들어 파는 하찮은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용모가 특이했다. ‘우행호시(牛行虎視)’, 소처럼 걸었으며 호랑이처럼 눈빛이 형형했다고 한다.

마조 선사가 스승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 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다. 부처가 되고자 열심히 좌선하고 있던 마조 앞에서 남악 선사는 기와를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마조가 그 까닭을 묻자 남악 선사는 거울을 만들려한다고 대답했다. 기와를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되지 않는 것처럼 좌선만 해서는 결코 부처가 될 수 없음을 보인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마조는 남악 선사를 10년간 시봉하면서 뼈를 깎는 수행을 한 끝에 그 법을 이었다. 그 후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오늘의 南昌)를 중심으로 법을 크게 펼쳤다.

<수시(垂示)>
“그때그때 내보이는 행동이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운 피부에 공연히 상처를 내어 움푹 파인 흉터를 만드는 일이다. 크나큰 작용이 나타남에는 정해진 틀이 없다. 지고(至高)의 소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지만,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으니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이래도 좋고, 이러지 않아도 좋다. 이것은 너무 자상하다. 이래도 안 되고, 이러지 않아도 안 된다. 이것은 너무 높고 준엄하여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한다. 이 두 길에 구애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본칙에서 제시해 보겠다.”

[참구]
이 수시는 다섯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 첫 번째 단락. “그때그때 내보이는 행동이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운 피부에 공연히 상처를 내어 움푹 파인 흉터를 만드는 일이다.”

조사(祖師)는 수행자를 깨우치기 위해 그때그때 여러 행동이나 동작을 내보인다. 눈썹을 치켜세우거나 주장자를 들고 불자(拂子)를 세우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 “마삼근” “뜰 앞의 잣나무” 등과 같은 말 한마디로 진리를 보여 주기도 한다. 이러한 조사들의 언행(言行)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선에서 스승은 수행자에게 이와 같은 부처와 조사의 언행을 화두로 제시한다. 선 수행자는 이 화두를 철저히 꿰뚫어야 깨닫는다. 화두 참구의 핵심은 기존의 모든 알음알이에서 벗어나서 화두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화두 참구는 과거의 퇴적물인 머리로 화두라는 수수께끼를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화두를 분석하고 상상해서 답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남의 설명을 아무리 듣고 읽는다 해도 화두와 자신과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내가’ 화두를 든다”는 표현은 맞지 않다. 화두는 ‘내’가 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더 맞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모든 수단을 잃어버린 내가 화두에 꼼짝 없이 붙들려 있는 것,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상태가 깊어질 때 화두는 뚫린다. 화두를 내 머리로 조작하려고 하지 마라.
본분사(本分事)의 차원에서 보면, 각자의 본래면목은 이미 부처인데 화두를 통해 깨달음으로 들어가려는 이 자체가 고운 얼굴에 일부러 상처 내는 일이다. 불법(佛法) 속에 살면서 불법을 찾아 밖으로 헤매는 어리석음의 소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화두 참구는 바깥에서 깨달음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나’가 바로 태고 적부터 깨달음 그 자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한다.

스승이 때로 “‘지금, 여기, 나’를 떠나서 어디서 무엇을 찾느냐?”고 일갈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바깥에서 구하는 수행자로 하여금 본래의 자신에 눈뜨게 하는 것이다. 화두를 철저히 참구하여 타파했을 때, 그때 진정 ‘본래부처’를 안다. 그 전까지 ‘본래부처’는 항상 함께 하고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이다.

바깥에서 부처를 구하지 마라. 당신은 원래부터 부처다. 소유물이 얼마가 되었든, 신분과 모습이 어떠하든 당신은 본래 부처다. 그러니 말 한마디 눈빛 하나도 부처답게 하라.

두 번째 단락. “크나큰 작용이 나타남에는 정해진 틀이 없다. 지고(至高)의 소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지만,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으니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대용현전 부존궤칙(大用現前 不存軌則)’, 불법의 작용은 매우 커서 그것이 나타나는 데는 일정한 틀이 없다.

불법이나 진리의 작용뿐만 아니라, 선사들이 제자를 지도하는 뛰어난 작용도 일정한 틀에 매여 있지 않다. 무심의 경지에서 나온 선사의 걸림 없는 작용은 그야말로 ‘여탈종횡 살활자재(與奪縱橫 殺活自在)’, 주고 빼앗으며 죽이고 살리는 것이 종횡으로 자유자재하다. 수행자가 오랫동안 수행해 왔지만 아직 분별심을 완전히 끊지 못하여 어정쩡한 상태에 있을 때에 스승의 이 역량은 빛을 발한다.

“임제의현(臨濟義玄, ?~866) 선사에게 정상좌(定上座)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근본적인 뜻입니까?’ 임제 선사는 좌선하는 의자에서 내려와 정상좌의 멱살을 붙잡고 뺨을 후려갈기고는 밀어 내쳤다. 정상좌는 망연히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옆에 있던 승이 말했다. ‘정상좌! 어째서 절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하오?’”

이때 정상좌의 심경이 어떠하겠는가? 온 천지가 캄캄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체의 분별망상은 발붙일 틈이 없고,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의문뿐이다. 이 의문만이 ‘개천개지(蓋天蓋地)’, 하늘을 뒤덮고 땅을 뒤덮는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이 의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 의문이 나의 모든 것을 통째로 빼앗아 나는 없고 의문만이 있을 뿐이다.

임제 선사는 그렇게 함으로써 지고(至高)의 소식을 보여 주었다. 실로 그 뛰어난 역량이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작용으로 용솟음친다. 옆에 있던 승이 “정상좌! 어째서 절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하오?”라고 말한 것은, “이렇게 잘 가르쳐 주시는데 어찌 감사의 절을 올리지 않는가?”라는 질책이다. 승의 이 말 뒤에 다음의 장면이 이어진다.

“정상좌는 절을 했다. 그 순간 그는 홀연히 대오(大悟)했다.”

곡도명상수련원 원장 www.ogokdo.net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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