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1. 정호승의 걸인

기자명 김형중

진정한 자비의 가르침 알게 한 시

나는 그대의 불전함/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배고픈 불전함/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이 걸린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내 손이 먼저 무량수전 마룻바닥을 기어가듯/ 천년을 기어가/ 그대에게 적선의 손을 내미나니/ 뿌리치지 마시라 부디/ 무량수전이 어디 부석사에만 있었던가

우리가 흔들리며 타고 가는 지하철/ 여기가 바로 무량수전 아니던가/ 나는 그대의 불전함/ 다 닳은 타이어 조각을 대고 꿈틀꿈틀 무릎도 없이/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가난한 불전함/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또 천년이 걸린다

무량수전 거룩한 부처님을
지하철의 바닥에서 가난한
불전함 끄는 걸인으로 환치
평범으로 깨우침 준 일전어

걸사(乞士)는 비구를 말한다. 비구란 밥을 비는 수행자란 뜻인데, 빌어먹으면서 수행을 하기에 걸사라고도 한다.

삼십 년 전 인도를 여행하면서 가이드에게 들은 말이다. “인도의 거지들은 모두가 수행자이다. 비록 얻어먹는 걸식을 하지만 절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거지는 스스로 보시자들에게 자신을 통해서 착한 선업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복전(福田)인 자신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지가 그런 철학을 가지고 거지생활을 한다면 수행자라 할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정호승(1950~현재) 시인의 ‘걸인’은 불자의 마음을 대변해서 그대로 쓴 시 같아서 시를 읽으면서 내내 기뻤다. 시란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쓰면 된다. 시는 천하의 공물(共物)이다. 시를 쓰는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시를 평론할 평론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 닳은 타이어 조각을 대고 꿈틀꿈틀 무릎도 없이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는 가난한 불전함” “그대에게 적선의 손을 내미나니 뿌리치지 마시라 부디” “우리가 흔들리며 타고 가는 지하철 여기가 바로 무량수전 아니던가” 시구는 평범하지만 깨우침을 주는 일전어(一轉語)이다. 법당의 불전함과 부석사 무량수전의 부처님을 지하철로 옮기고, 거룩한 부처님을 지하철 바닥에서 가난한 불전함을 끌고 다니는 걸인으로 환치시키는 시인의 돈오적 통찰력이다.

사사불공(事事佛供)이요 처처불상(處處佛像)이다. 그렇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의 오도송처럼 극락세계가 서쪽에만 있겠는가. 흰구름 걷히고 고개 한 번 돌리면 청산인 것이다.

불전함이 바로 전철 안에 있고, 화탕지옥고를 받아야 할 내가 지은 죄업장을 구원해 주실 관세음보살님이 바로 두 발이 잘려 타이어로 대신하고 지하철 바닥을 기어다니는 반신불수 장애자이다. “동전 한닢 떨어지는 소리가 천년이 걸린다”고 했듯이, 그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어렵사리 지금 내 앞에 나타나 선행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데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외면하고 망설이는가? 나를 위해서 현신하신 관세음보살님의 눈을 바로 바라보지 않고 눈을 돌려 피하는가?

‘걸인’은 불자의 마음을 울리는 시이다. 부처님의 진정한 자비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시이다.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참회하고 또 참회한다. 평범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이 시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기발함이 있다. 평범함 속에서 기발함을 드러내는 창작기법이 고수의 품격이다.

정호승은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불교적인 사유와 분위기를 좋아하는 중진시인이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동시,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최고엘리트 시인이다. 그는 현재 한국 시단의 만인적(萬人敵)이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