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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청주 안심사 괘불

기자명 신대현

전란 후 피폐해진 대중 마음 어루만진 기념비적 작품

벨기에 출신의 화가 루벤스(1577~1640)는 바로크시대 최고의 거장으로 꼽힌다. 그의 걸작 중 하나가 영국 햄프턴 왕궁 천정에 그린 ‘왕의 계단’이다. 이 그림은 가까이 보면 흐릿하고 잘못 그린 것 같은데 10여 미터 아래서 보면 오히려 또렷해지고 아름답게 보인다. 루벤스가 궁내 한가운데까지 못가고 그저 맨바닥에서나 멀찌감치 올려다봐야 할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기법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누구나 볼 수 있게 그려진 괘불
멀리서도 선명한 아름다움 특징
서민 배려서 비롯된 대중적 면모

1652년 조성된 안심사 괘불은
석가불 설법 담은 영산회상도
1970년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

세련된 필력·구도·색감 압권
“당대 불화 대표하는 역작”평가

불화 중에서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그린 특별한 그림 중 하나가 바로 괘불이다. 법당에 못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야외에 걸어 멀리에서도 잘 볼 수 있도록 크게 그리는 게 특징이다. 그렇기는 해도 괘불은 단순히 커다랗게만 그리는 게 아니라 멀리서 보아도 그림의 내용이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데 묘미가 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늘 부처님 곁에 있고픈 대중들을 위하는 섬세한 배려가   담겨 있는 것이다. 괘불의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측면은 색깔에서도 드러난다. 괘불은 홍색과 녹색을 기본 바탕으로 사용하여 밝고 화사한 느낌을 주기는 해도, 법당 안에 걸리는 불화에 비해 호화스런 느낌이 훨씬 덜하게 채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식되는 무늬도 꽃무늬 같이 대중에게 친숙한 대상을 주로 쓴다. 우리 외에 괘불을 사용하는 나라로는 티베트와 몽고가 있는데 이들 지역에서는 수를 놓은 괘불을 사용한다. 티베트에서는 괘불을 탕카(Thangkas)라고 부르며, 괘불대를 사용하지 않고 담이나 벽 또는 언덕에 걸쳐 놓는다. 그래서 탕카는 ‘탱화(幀畵)’라는 한자어의 어원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괘불(掛佛)이라는 이름은 의례에 앞서 ‘불화를 건다(掛)’는 의미인 괘불(掛佛)·괘불탱(掛佛幀)이란 용어에서 유래한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괘불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훨씬 이전으로 올라가는 건 분명해 보인다. 예를 들면 ‘삼국유사’에 670년 명랑(明郞) 법사가 염색된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문두루(文豆婁)’ 비법으로 신라를 공격한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비단 그림이 곧 괘불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조선시대 중기까지의 작품은 현재 전하는 게 없고, 지금으로서는 1623년에 만든 죽림사 괘불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 괘불 속 사천왕상.

문화재가 많아 ‘작은 보물창고’로 불리는 충북 청주 안심사에 1652년에 만든 괘불이 전한다. 구도나 등장인물들의 안정된 배치, 색감 면에서 우리나라 괘불의 대표작으로 꼽혀 국보 297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으로 멍든 나라가 서서히 회복하는 시기에 불교로 대중의 마음을 어루만지고자 역량을 집중해 만든 기념비적인 대작이다. 구도 면에서는 석가불이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본존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여러 성중,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사천왕상 등이 대칭적으로 배치된 형식이다. 중앙에 결가부좌한 석가불이 화면 중앙에 앉아 있으며, 키 형의 커다란 광배와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아진 아름다운 붉은 가사가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불·보살·나한·천왕·신중들이 밀착하듯이 서로 붙어서 본존불을 향하고 있는 장면은 석가부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의 진지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괘불을 보는 사람마저 귀를 기울이게 한다. 괘불처럼 큰 그림에서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밀도 있게 배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필력이 아주 세련된 데다가 색감도 좋아 당대 불화를 대표할 수 있을 만한 역작이라 말함에 손색이 없다. 석가불은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는 항마촉지인 수인인데 다른 작품에 비해 팔이 좀 더 길어진 모습은 이 그림만의 독특한 표현이다. 또 본존불의 나발 모양의 머리에 높고 뾰족한 육계가 있고 중간에 계주가 있으며 눈·코·입과 수염이 양식화된 것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본존불 주변 성중들의 모습을 위로 갈수록 점점 작게 묘사해 원근감을 주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으로 두텁게 칠해 무게감을 주었다. 안정된 구도, 유려한 필선, 화사한 색감 등 어느 면으로 보나 흠잡을 데가 별로 없다. 이 그림보다 3년 뒤에 그려진 청주 보살사 괘불과 더불어 17세기 충청 지역의 불화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 청주 안심사 괘불 정면.

예술은 작품성이 중요하지 크기야 그다지 문제될 게 아니지만, 괘불만큼은 그 커다란 크기가 존재감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괘불 중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하는 양산 통도사 괘불은 길이가 1204cm나 된다. 안심사 괘불은 길이 631cm, 너비 461cm로 괘불 중에서는 중간 정도다. 조선시대 괘불의 구도는 권속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석가불·비로자나불·약사불 등 불상만 단독으로 표현하거나 등장인물을 최소화 하여 단순화시킨 점이 특징이다. 10m 가까운 커다란 화폭이 세찬 야외 바람에도 견디도록 단단하게 만들기도 해야 했고, 또 아무래도 큰 화폭에 다양한 인물들을 그려 넣는 것이 기술적으로 부담스러웠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구도를 단순화하면 작품이 주는 인상은 강렬하겠지만, 아무래도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낸다는 불화 조성의 기본적 의도는 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안심사 괘불은 이러한 기술적 난제들을 훌륭히 극복해 괘불 구도의 다양화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만하다.

대부분 불화에는 화면 한쪽에 묵서(墨書)로 적은 화기(畵記)가 적혀 있다. 화기에는 제작연도, 조성목적, 참여자, 금어 등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를 유심히 보면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서 중요한 역사자료가 됨을 알 수 있다. 요즘 대량의 데이터를 모아 어떤 경향과 결과를 도출해내는 기법인 ‘빅 데이터’가 정보 분석의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문화재에서의 빅 데이터는 바로 화기라고 할 수 있다. 화기가 적힌 불화는 약 3,000점이나 있어 이를 잘 분석하면 미술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방면의 연구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안심사 화기에서도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선 이 그림이 ‘순치 9년(順治九年)’, 곧 1652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본 정보가 나온다. 여기에다 연화질과 시주질을 보면 이 괘불은 당시 불교계 주요 인사가 앞장섰고, 여기에 민간이 큰 힘을 보태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화기 첫머리에 ‘황금(黃金) 대시주’로 나오는 처능(處能, 1617~1680)은 한참 위축되어 있던 조선시대의 승단을 대변하여 호불간쟁(護佛諫諍)에 앞장섰던 고승이었다. 임금의 사위이자 학문의 대가였던 신익성(申翊聖)에게 글을 배운 덕에 그 자신도 역대 불교계에서 손꼽는 문장가로 이름을 올렸다.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불교를 폐하는 일을 멈추기를 간청하는 상소)’라는 상소문은 유교에서 불교를 폄하하는 근거가 이론적인 타당성을 갖추지 못한다는 점을 논파한 명문장이다. 이렇게 당시 불교계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 참여한 불사였던 만큼 이 괘불이 얼마나 의미 있게 추진되었을지 잘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림을 그린 화가인 금어(金魚)로는 신겸(信謙) 외에 9명이 참여했다. 특히 신겸은 조선시대 최고의 금어로 꼽히는 의겸(義謙, 1710~1760)보다 한 세기 가량 앞서서 활동했는데, 남아 있는 작품으로 볼 때 의겸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을 만큼 실력파 화가였다. 화기에는 신겸 이름 바로 밑으로 덕희(德熙)라는 금어가 나온다. 이 둘은 앞서 1649년에 또 다른 걸작으로 꼽히는 청주 보살사 괘불을 그렸고, 안심사 괘불이 조성된 지 5년 뒤인 1657년에도 연기 비암사 괘불 조성 때 함께 일했었다. 이들은 오로지 괘불에만 그 이름이 나오고 있어 괘불 전문 작가였을 가능성도 높다.

괘불이 크기와 작업의 정성 면에서 여러 화가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공동 작업의 결정체였던 만큼 참여자 간의 호흡은 작품의 수준을 높이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시주 명단은 모두 청원 지역의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따라서 이 시주자들을 지역사 차원에서 연구하면 쓰임새가 더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면 불사를 주관했던 장애남(張愛男)은 별시위(別侍衛)를 지냈고 그 아들도 1637년 별시 병과에 합격해 겸사복(兼司僕)을 지낸 지역의 향관(鄕官)들이었다. 또 김응립(金應立)은 김제김씨 족보에 따르면 이 괘불을 만들기 15년 전인 1637년에 무과 별시 병과에 합격한 이 지방의 명망가였다. 화기에 나오는 이런 점들을 좀 더 깊이 있게 분석해보면 문화사 면으로도 유용한 정보가 많이 나올 것 같다.

▲ 괘불 속 아난존자 및 10대 제자.

안심사 괘불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0년 7월이었다. 당시까지 솔거가 그린 그림으로 구전되며 비전되기만 하다가 이때 처음으로 일반에 선보인 것이다. 그때까지 불상 대좌 기단부에 보관되어 왔었다는 점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이 괘불의 아름다움은 최근 색다르게 조명되었다. 지난 2월 일본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이 괘불과 꼭 닮은 작품이 전시된 것이다. 이 작품은 불화 전문 복원가인 한희정씨가 실제 작품에 쓰였던 천연안료와 제작기법을 최대한 살리면서 세월의 흔적이 남은 현재의 그림을 재현한 이른바 ‘고색복원 기법’으로 그린 것이다. 무려 5년의 공력을 기울인 것인데, 안심사 괘불의 가치가 이것으로도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루벤스는 임진왜란 이후 난민처럼 떠돌다 이탈리아까지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 조선인을 모델로 하여 ‘한복 입은 남자’를 남겼으니, 우리와 인연도 있다. 만일 그때 루벤스가 우리의 괘불을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탄성을 지르며 우리 금어들의 뛰어난 솜씨에 혀를 내두르며 조선이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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