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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은 예수의 저항 더 선호[br]가난한 이를 역사 중심으로 여겨

기자명 이병두

‘해방자 예수: 해방신학으로 본 역사의 예수’ / 혼 소브리노 지음 / 김근수 옮김 / 메디치미디어

▲ '해방자 예수:해방신학으로 본 역사의 예수'
엘살바도르. 가톨릭 국가이지만 저자의 동료 신부들 여섯 명이 대학 안에서 정부군에 살해될 정도로 처참한 고통과 슬픔의 땅인 이곳에서 이 책이 태어났다.

과연 ‘해방신학’이 무엇인가. 옮긴이가 짧고 분명하게 정리한 대로, 해방신학은 “신앙의 그리스도보다 역사의 예수를, 구원보다 희망을, 부활보다 하느님 나라를, 예수의 고난보다 저항을 더 선호한다. 그리스도교보다 가난한 사람을 더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을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중심이라고 여긴다. 가난한 사람의 운명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도 그렇고 지나온 기독교 역사도 그러했지만 “화해하는 예수, 평화를 주는 예수,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를 말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지 않으면, 억압자에게 철저하게 회개하라고 요구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하다. 그러나 특히 남미의 교회와 사제들은 수백 년 동안 하느님 백성인 원주민들의 고통을 모른 체 하며 이 위험한 역사에 동참해오고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무수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현실과 상황을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는 신학은 사람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고, 그런 참상을 빚어내는 공범”이 분명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신학은 흔히 이념화되었다는 핀잔”을 들어 왔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뜻한다”는 저자의 말을 읽기 전부터 나도 “붓다를 안다는 것은 붓다를 따라 붓다처럼 사는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불교나 기독교를 가릴 것 없이, 붓다나 그리스도가 걸었던 길에서 끝없이 멀어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척 하고 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다양한 신학 흐름과 확연히 구별되는 “해방신학의 독창적 직관은 분명하다. ‘예수에게 돌아가야 한다.’ 역사적 구체성이 없으면 그리스도는 동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는 크고 작은 동상과 석고상이 되었고, 기독교는 “그리스도 말씀으로 위장한 우상숭배”가 되고 말았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본래 하느님 나라란, ‘들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결실을 먹고, 집 짓는 사람이 그 집에 사는 곳’이다. 그러나 특히 남미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교회가 큰 몫을 해 왔다. 예수가 생각하는 하느님은 “억압자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까이 왔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실 교회의 실정은 이와 아주 멀다.

지난해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종이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해서 감동을 주기도 하였지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백성을 해방시키는 편파적인 존재”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 스스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낫게 하러 왔다고 자신의 사명을 설명”했다고 말한다. 그는 “무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람, 어린이, 여자, 나병환자에게 다가가는 분”이었고 그렇게 해서 “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주었다.”

그런 예수에게 자유란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자신을 해방하는 자유”이고, 그 중에서도 스스로의 목숨을 내어놓는 자유가 가장 크다. 안식일 족쇄에 갇힌 이들을 향해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하여 당장 구해내지 않고 내버려두겠습니까?”라는 질타는 실상 자신의 해방에 다름 아니다.

예수의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 어떻게 못 박히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 몸이 어떤 몸인지 물어야 한다. 그 몸이 오늘도 계속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그 몸을 통해 그 몸으로 역사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묻는 것이 해방신학이라고 이해하면 될까.

이병두 전 문화체육관광부 종무관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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