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

기자명 신대현

가장 오래되고 이색적인 마애불…대중과 함께한 부처님 모습

▲ 신선사 마애불은 동·남·북쪽 바위면에 나눠져 있다. 사진은 북쪽 바위면의 마애불로, 가장 많은 상이 표현돼 있고 도상이 독특해 눈길을 끈다.

미술 표현에 여러 형식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마애불(磨崖佛)처럼 독특한 분야도 찾아보기 어렵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은 다음 불상을 새긴 것이 마애불이다. 쪼고 새기는 기법은 조각이면서 장식 면에서는 벽화나 한가지고, 게다가  많은 대중이 야외에 모여 한꺼번에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은 괘불의 기능과도 견줄 만 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6세기 후반 혹은 7세기까지 올라가니 꽤 고고(高古)한 작품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이 작품들은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수 백 점을 헤아릴 정도라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마애불을 잘 보면 당시 불교미술의 흐름을 튼튼히 세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대중들의 신앙 형태나 취향마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바위를 다듬어 불상 새긴 마애불
조각·벽화·괘불의 특징 담겨

신라시대 조성된 신선사 마애불
“우리나라 석굴 시원” 평가도
미륵반가사유상, 본존불로 배치
공양자상 조각도 이례적 사례

마애불의 대중성과 가치 등
존재 의미에 대한 조명 필요

우리나라 마애불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이색적인 마애불을 꼽으라면 단연 경주 건천에 있는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마애불을 들 수 있다. 단석산은 곧고 길게 뻗어가는 경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경주 시가지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한다. 경주를 지나다보면 멀찌감치 그 거무스름하고 커다란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단석산은 829m로 경주에서 가장 높고, 여러 가지 동식물 자원과 유적을 많이 품고 있어 경주국립공원 내 단석산 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단석산을 올라 중턱 쯤 이르다보면 신선사가 나온다. 경내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높이 솟은 절벽들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고, 여기를 지나면 정면에 또 다른 널찍한 바위가 바라다 보인다. 이곳이 마애불이 새겨진 공간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 모양의 석실(石室) 같은 공간을 이루고 있어 우리나라 석굴의 시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 바위에는 신라시대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10개의 조각이 있다. 지금 유적의 보호를 위해 투명 재질로 위를 덮었는데 이 마애불이 처음 새겨졌을 때도 이와 비슷하게 지붕을 덮어 인공의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1669년에 나온 ‘동경잡기’ 등의 책에 이미 이 유적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9년 황수영 박사를 중심으로 한 ‘신라 오악조사단’의 현장 학술조사가 이뤄져 마침내 기록과 유적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였다. 특히 바위에 새겨진 400자 가량의 글자들을 일부 판독해 이곳이 신라시대에 창건한 신선사이고, 마애불의 주존불은 미륵불상 등이라는 중요한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이 마애불은 한 곳이 아니라 동·남·북의 바위 면에 나뉘어 새겨져 있다. 동쪽과 남쪽 바위는 서로 이어져 있고, 여기에 살짝 틈을 두고 북쪽 바위가 자리한다.

▲ 공양자상. 7세기 당시 신라인의 모습이 새겨진 귀중한 자료다.

가장 많은 상들이 표현되어 있고 도상도 독특해서 오랫동안 눈길을 붙잡는 것은 북쪽 바위 면이다. 윗줄에 4위의 불상·보살상을, 그 아래에 3위의 인물상을 새겼다. 윗줄은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을 안 쓴 보살입상, 다른 여래입상, 반가사유상 등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미륵반가사유상을 제외한 불·보살상들이 모두 정면을 향한 채 두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일렬로 늘어서서 이곳에 들어온 사람들을 공손하게 안쪽으로 안내하는 듯한 자세다. 끝에서 손님을 기다리다가 반갑게 맞이하는 주빈처럼 자리한 미륵반가사유상도 역시 환한 미소로 참배객들을 맞는다. 오른발을 왼발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는 전형적인 모습의 반가사유상이 본존불로 배치된 것이다. 불보살상들의 이런 배치는 어느 마애불의 도상에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를 보노라면 현실에서 불보살들의 인도를 받아 미륵세계로 떠나가는 황홀함을 맛보게 된다. 또 그 아래에 있는 두 명의 공양자상 등도 여느 마애불에는 나오지 않는 모습이다. 끝이 꼭대기에서 늘어진 높은 모자를 쓰고 헐렁해 보이는 옷을 입은 공양자상은 7세기 신라 사람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다른 데서 찾아보기 어려운 자료로 평가된다. 신라, 특히 7세기 사람의 복장과 생김새가 그려진 곳은 우리나라에서 신선사 마애불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 공양자상과 중국에 전하는 신라·백제·고구려 사신을 그린 그림 등과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7세기에 지은 산시성 장회태자묘의 ‘예빈도’ 벽화에 신라 사신이 나온다. 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전체적으로 펑퍼짐한 옷을 입은 점이 마애불의 공양자상과 일맥상통한다. 갸름하며 광대뼈가 살짝 나온 얼굴 모습, 뚜렷한 턱 선, 둥근 어깨도 서로 비슷한 점이다.

▲ 둥근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띤 여래입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듯 하다.

또 이 신선사 마애불에 그려진 공양자상과 중국 남경박물관 및 대만 고궁박물관 등에 있는 ‘양직공도(梁職貢圖)’에 나오는 백제 사신과 비교해도 닮은 점을 찾을 수 있다. ‘양직공도’는 중국을 찾은 백제(百濟)·페르시아·쿠챠·왜(倭) 등 외국 사신들을 그린 화첩인데 현재 전하는 그림은 6세기에 제작된 원본을 1077년 북송 시대에 베낀 것이라고 한다. 백제 사신은 끝에 깃이 달린 높다란 관을 쓴 단아한 용모를 하고 있는 게 돋보인다. 무릎을 살짝 넘는 품이 넉넉한 도포에다 그 아래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고 검은 가죽신을 신은 것도 꽤 세련된 디자인 감각을 보여준다. 이런 복장뿐만 아니라 얼굴이나 체형 등이 왜나 페르시아와는 확연히 다르다. 비록 신라가 아니라 백제 사신이기는 해도, 백제나 신라라는 지역을 넘어선 ‘우리나라 사람’의 특징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신선사 마애불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북쪽 바위 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커다란 여래입상 1위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어렵고 힘든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둥근 얼굴에 가득한 환한 미소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듯하다. 두 어깨를 감싸고 내려가는 대의(大衣) 아래로 U자형 주름이 선명한데, 주로 입상으로 조각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던 옷 주름 표현기법이다. 또 가슴 사이로 속옷을 묶은 매듭도 드러나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고 왼손은 아래로 내리는 아미타불의 손모습인 이른바 여원인과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

▲ 경주 단석산 신선사 전경. 양쪽으로 깍아지른 높이 솟은 절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지나, 정면에 보이는 널찍한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동쪽 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왼손은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 않지만, 남쪽 면에도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이 있어서 아마도 앞의 불상과 이 보살상이 함께 삼존상을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 새겨진 400여 자의 글자 중에서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 있어 앞에서 본 북쪽과 동쪽 바위 존상의 이름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이 마애불상들은 어떤 인연으로 여기에 조성되었을까? 단석산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 장소였고, 화랑들은 수행과 행실의 근본을 불교에 두고 있었으므로 이것으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신선사의 창건과 운영에는 화랑들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화랑 중의 화랑 김유신(金庾信, 595~673)도 어려서 여기서 수도했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전한다. 김유신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석굴에 홀로 들어가 고구려·백제·말갈 등 신라를 위협하는 나라들을 물리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4일 뒤 한 도인이 문득 나타나 자신을 ‘난승(難勝)’이라고 소개하고는,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에 감복했다며 비법이 담긴 책과 신검(神劍)을 주고 곧 사라졌다. 김유신은 책을 보고 수양 하면서 도를 익혔으며 이 칼로 수련을 거듭했다. 수련을 다 끝낸 날 마지막으로 칼을 한번 커다랗게 휘둘렀더니 주변의 바위들이 쫙 쪼개졌다. 이 산의 이름이 ‘단석산’이 된 이유다. 신선사에서 나온 김유신이 탁월한 전술과 출중한 무예로 대성해 장군이 되어 결국 삼국을 통일한 이야기는 역사에 나오는 대로다. 1969년 신선사 마애불상이 본격 학술조사된 얼마 뒤에 그에게 보검을 내린 난승 도인이란 다름 아닌 미륵보살의 다른 이름인 ‘난승보살’이라는 것이 동국대 명예교수 김영태 박사에 의해 밝혀졌다. 이 전설을 음미해 보면 신선사가 화랑들이 수련했던 장소였으며 아울러 신라 사람들의 호국(護國) 의지가 응집된 곳임을 알게 해준다.

사실 7세기 신라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새기며 나타내려 했던 의미를 지금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마애불의 도상(圖像) 중에 아직 명확하게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마애불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들보다 형태가 독특하고 거기에 깃들어진 의미도 깊다고 할 수 있다.

마애불은 제한된 법당을 벗어나 보다 많은 대중이 참여할 수 있게 고안된 야외 공간이다. 물론 마애불에도 비바람 등을 가리기 위해 지붕 같은 간략한 시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당을 짓고 불상과 불화 등을 봉안하는 것에 비해서 시간과 공력이 훨씬 적게 들었을 테니 빈한한 대중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을 것 같다. 생각보다 마애불의 효용성이 꽤 컸던 것인데, 지금까지 마애불의 이런 실용적 가치가 과소평가된 느낌이 있다. 마애불을 양식으로만 연구하지 말고 그 존재의미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마애불과 그 주변 공간이 법당으로 어떻게 활용 되었는가, 깊은 산중에 조성되었던 마애불이 시간이 흐를수록 어디까지 밑으로 내려갔는가, 다시 말해서 마애불이 얼마만큼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는가 하는 문제들은 앞으로 새롭게 밝혀야 할 마애불의 또 다른 연구 분야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