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중국 오대산 성지순례(중) 오대산 중·서대-대라정-수상사-현통사-탑원사
13. 중국 오대산 성지순례(중) 오대산 중·서대-대라정-수상사-현통사-탑원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5.07.13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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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이어진 외길서 고독 머금고 핀 미소를 보다

▲ 새벽부터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했다면 순례단은 돌아서야 했다. 한국에서 걸음한 100명의 오대 참배를 산은 허락했다.

"혜초·도의선사도 걸었던 길
순례자 반기는 건 야생화뿐
외로움 견디며 홀로 걸으면
‘전삼삼후삼삼’ 화두 풀릴듯"


산 오르는 내내 마음 졸여야 했다.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산 아랫마을 대회진사묘군(臺懷鎭寺廟群, 사찰이 집중된 마을)에 신록이 찾아와도 하얀 눈을 담는 해발 3000m의 오대산이다. 그러니 산의 정취를 깊게 하겠다고 내리는 저 6월의 비가 언제 눈으로 변할지 모른다. 그리되면 설경은 감상할 수 있겠지만 순례는 멈춰야 한다. 인연공덕이 어우러져야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 대라정에서 내려다 본 대회진사묘군 전경.

오대산에 문수의 숨결이 잦아들기 시작한 건 5세기. ‘화엄경’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문수보살이 상주했던 산이 청량산이라고. 사람들은 그 청량산이 저 오대산이라고 믿었다. 마을 앞 작은 샘도 정성 담으면 성수가 되는 법. 문수보살과 1만 권속이 저 산에 상주한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 진솔한 정성이 더해지며 성지가 되어갔다. 당나라 시대에 접어들 때 오대산은 무려 360여 사찰을 품었다.

북위 효문제, 수 양제. 송 태종, 원 영종, 청 성조 등 중국 대륙을 손에 넣은 황제들도 저 산을 오르려 했다. 청나라 6대 황제에 오른 건륭 역시 즉위직후 오대산을 찾았다. 허나, 오대산은 건륭의 순례를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동대로 향했으나 세찬 비바람이 그의 앞길을 막았고, 중대로 길을 틀자 폭설이 길을 끊어버렸다. 건륭은 이듬해 다시 오대산을 찾았다. 대회진 대라정에서 숨 돌린 후 오대산을 오르려했지만 갑작스럽게 폭풍이 몰아쳤다. 건륭은 대라정 주지에게 부탁했단다.

“3년 후 다시 올 테니 5대 문수보살님을 꼭 친견하게 해 달라.” 이 말은 곧 “3년 후에도 5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명이나 다를 바 없다. 대라정 주지인들 오대산의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을 수 없는 노릇. 고심에 찬 주지에게 한 동자승이 묘안을 건넨다. ‘5대의 불상을 대라정으로 모셔 오시라!’ 5대의 불상을 그대로 본뜬 다섯 문수보살님이 대라정에 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 울산 정토사 사부대중은 중대 연교사에서 ‘걸림 없는 지혜’를 발원했다.

건륭은 훗날 대라정을 참배하며 다섯 문수보살을 한 번에 친견했다. 사람들은 지금도 저 대라정에서 오대에 못 오른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그렇다 해도 분명한 건, 건륭은 저 산을 오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18년 동안 중국의 중원을 통일시킨 순치 황제는 하루아침에 그 막강한 권력 내려놓고 이 산으로 들어와 출가했다. 출가하며 쓴 그의 시 한 수가 짙은 운무 속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피어난다.

‘곳곳이 총림이요 도처에 밥이거늘/ 발우 들고 가는 곳에 밥 세 그릇 걱정하랴/… …/ 내 이제 손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천만가지 근심걱정 아랑곳 할 것 없네’

변화무쌍한 구름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나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져가고 있다. 곧이어 중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 오대산은 한국에서 건너온 순례단의 참배를 허락했다. 지중한 인연이다.

신라의 자장율사도 이 길을 걸어 중대에 올랐다(636년). 자신을 보필하라는 선덕여왕의 부름에,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여왕의 겁박에 “계를 지니며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하며 100년을 살지 않겠다” 맞서며 구도열을 불태웠던 자장이었으니 중대 인근 태화지(太和池)에서의 기도는 지극하고 또 지극했으리라. 기도 중 한 스님이 찾아와 비단 가사 한 벌과 바리때, 그리고 사리를 전했다.

“석가세존께서 쓰시던 도구이니 잘 간직하라. 너희 나라에도 오대산이 있어 1만의 문수가 상주하고 있으니 찾아가 보아라!”

그 노승은 문수의 진신이었다. 신라로 돌아온(643년)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중국 오대산과 유사한 산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강원도 오대산을 찾아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지금의 오대산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에 봉안했다. 이후 강원도 오대산은 문수성지로 자리매김해 갔다.

중대 주변에 오방색 헝겊이 취암봉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나부끼고 있다. 밀교가 이 산에서도 융성했음을 저 타르초는 말하고 있음이다.

▲ 금빛으로 빛나는 현통사 동전. 이 전각 역시 라마교 건축양식이다.

중국에 밀교를 처음 전한 사람은 인도 금강지(金剛智) 스님이고, 오대산에 밀교를 전파한 (당나라 현종, 숙종, 현종 즉위 때) 사람은 인도 출신의 금강지 제자 불공(不空) 스님이다. 오대산 밀교 흔적은 저 대회진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례로 중국에 전해진 부처님 사리 중 한 과를 봉안했다는 탑원사 백탑은 원나라시대의 복발식인데 이는 라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방증이다. 달라이라마가 중국 오대산을 순례하고 싶은 연유를 알겠다.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 스님도 금강지 문하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고, 스승이 입적한 후 사형이었던 불공삼장 스님으로부터 다시 법을 이었다. 조계종 종조 도의 스님 또한 신라 선덕왕 때 당나라로 들어갔다. 선사는 입당하자마자 오대산으로 향했고 기도하는 도중 문수보살을 친견하며 신비스런 체험을 했다고 한다.

▲ 3. 중대 앞 사리탑 전경.

중대 사리탑 앞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기록에 따르면 혜초 스님은 787년 오대산에서 입적했고, 도의 스님이 입당한 건 784년이다. 3년의 시공간에서 두 스님의 극적인 만남은 이뤄졌을까? 어느새 비는 그쳤고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오대산이 한국순례단에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오대산을 오른 인물 중에서도 무착 스님은 그 누구보다 이색적인 수행담을 전하는데 ‘벽암록’ 35칙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에 거론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행길에 오른 무착문희(無着文喜, 821~900) 선사는 오대산 화엄사 금강굴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이 먼저 물어왔다. “남방의 불법(佛法)은 어떻습니까?” “말법의 비구들이 계율이나마 조금 지키고 살아갑니다.” “대중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혹 삼백명도 되고 혹 오백명도 됩니다.” 있는 그대로, 참으로 솔직(?)한 대답이다. 이번엔 무착 선사가 물었다. “이곳의 불법은 어떻습니까?” “용과 뱀이 함께 있고 범부와 성인이 같이 삽니다.” “대중들은 얼마나 됩니까?”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입니다.”

질문은 비슷하지만 대답은 하늘과 땅 차이다. 범부와 성인, 아름다움과 추함을 이미 건너 뛴 노인의 물음에 무착 선사는 사량분별심에 떨어진 대답만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대로 떠나기는 못내 아쉬웠던 무착 선사는 노인을 시봉한 균제동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균제동자는 “조금 전 본 노인이 문수보살”이라며 게송을 읊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티 없는 진실한 그 마음/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 서대 법뢰사에는 사자문수상이 봉안돼 있다.

중대 유동문수를 친견하며 걸림 없는 지혜를 얻은 순례단은 서대 법뢰사 사자문수가 전하는 사자후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을 들었을까? 청량한 바람 한 점 이마를 스쳐간다.

금강지, 불공, 혜초, 도의, 무착이 걸었던 그 길을 순례단도 따랐다. 비록 그들처럼 두 발로 걸은 것은 아니지만, 사륜구동 자동차의 힘을 빌려 오대산을 올랐지만, 문수친견을 향한 지극한 마음만은 선지식들과 다를 바 없다. 보라! 순례단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미소 한 송이 피워내고 있지 않은가!

산을 내려오며 지나온 길 돌아보니 이 큰 산에 길은 딱 한 줄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절과 절을 잇는 칼칼한 길만 있을 뿐이다. 해발 2000m에 접어들면 숲도 거의 없다. 길가에 핀 야생화만이 순례자의 발길을 지켜본다. 높고 깊은 광활한 산 속의 절로 이어진 길 위에는 깊은 고독이 스며있었다. 아마도 1500여년 동안 이어온 순례자들의 구도심이 배어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 저 길을 마냥 걷고 싶다. 오대산이 감싸 안은 고독이라는 이름의 깊은 샘에서 환희의 눈물을 길어 낼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때 흐를 눈물로 평생 보일 미소 한 송이 피워낼 수 있다면 한 번쯤 걸어볼 만한 일이다. 보라! 벌써 누군가 걸어 올라가고 있다.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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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이색 불상 3

 
■ 대라정 불상
오대산 5대에는 특색 있는 문수동자상이 봉안돼 있다. 동대에는 총명문수, 서대에는 사자문수, 남대에는 지혜문수, 북대에는 무구문수, 중대에는 유동문수가 있다. 대회진에 자리한 대라정은 오대의 불상을 그대로 본뜬 다섯 문수상을 봉안하고 있다. 오대를 다 오르지 못 해도 대라정 다섯 문수보살을 친견하면 오대를 참배한 것으로 여긴다.

 

 
■ 현통사 천발문수(千鉢文殊)
‘천수천안 관음보살’은 많이 보았어도 ‘천수천발(千手千鉢) 문수보살’은 처음 보았다. 천 개의 손을 가진 문수보살이 천개의 발우를 들고 있다. 발우 하나에 부처님 한 분 모셨으니 현통사 문수보살은 천불을 모시고 있는 셈이다. 문수의 지혜를 체득한 사람이 부처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전하는 듯하다. 중생의 근기에 맞게 제도한다는 의미를 담은 11면 문수상도 조각돼 있다. 청나라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천발문수상을 봉안하고 있는 사찰은 현통사가 유일할 것이다.

 

 
■ 수상사 문수상
청사자를 타고 있는 수상사 문수상은 높이만도 9m가 넘는다. 당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 하니 1500여년의 세월을 지켜 본 문수보살이다. 하늘에 나타난 문수보살을 본 수상사 공양주가 매밀 반죽으로 그 상호를 빚었고, 장인들은 그 상호를 토대로 문수보살을 조성했다고 한다. 수상사(殊像寺)라는 절 이름도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에서 따왔을 만큼 수상사 문수보살상은 중국에서도 꽤 유명하다.

[1302호 / 2015년 7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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