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3. 연기군 출토 불비상

신라 불상에 나타난 백제의 흔적…멸망한 조국 향한 염원일까

▲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국보 106호).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충남 조치원 연기군의 비암사(碑巖寺)에서는 매년 4월15일이면 ‘백제대제(百濟大祭)’가 열린다. 이는 백제의 왕들과 대신, 그리고 부흥운동을 펼치다 목숨을 잃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4월15일일까. 이유는 바로 1960년 9월, 이 절에서 발견된 불비상에서 비롯된다.

1960년 연기군 비암사 시작으로
7개 불비상 잇따라 발견돼 주목
처음 발견된 독특한 형식의 사례

고 황수영 박사 등, 선구적 분석
신라에 멸망한 후 조성된 불상에
백제 양식 특징들 등장해 주목
‘당나라 도상의 영향’ 의견도

풀어야 할 과제 여전히 산재하나
세밀한 논의 자체로 의미 지녀

불비상이란 돌기둥처럼 생긴 비석에 불상을 새긴 것을 말하는데, 비의 성격을 지닌 만큼 명문이 새겨져 있어 사료적 가치도 크다. 이 때 비암사에서는 모두 3개의 비상이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경내에 있는 불탑의 부재로서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이 비상들은 박물관으로 옮겨져 국보 및 보물 등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중 한 비상의 명문에 “계유(癸酉)년 4월 15일에…”로 시작하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었다. 내용인 즉, 전씨(全氏) 등 50명의 신도들이 국왕대신과 칠세부모의 명복을 위하여 절을 세우고 이 아미타불상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비암사에서 4월 15일에 백제대제를 열게 된 발단이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비상은 결국 망국의 한을 품은 백제유민의 상징이 된 셈이다. 현재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으로 불리며 국보 106호 지정된 이 비상은 언제부터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 연화사 소장 칠존석불비상(보물 650호, 복제품). 비암사 기축명 비상에 묘사된 서방극락정토와 유사하다.

이 비상들을 처음 학계에 소개한 것은 미술사학자인 고 황수영(黃壽永, 1918~2011) 선생이었다. 비암사 상이 발견된 같은 해 10월에는 공주군 정안면에서 역시 비상 형식의 삼존불상이 발견되었고, 1961년에는 같은 연기군내의 연화사에서 불비상 2점이 추가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1961년 7월에는 연기군 조치원읍 서광암에서 또 하나의 비상이 발견됨으로써 모두 7개의 비상이 학계에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 진홍섭(秦弘燮, 1918~2010) 선생도 연기군 지역에서 잇달아 발견된 비상 계열의 조각상에 큰 관심을 가지고 황수영 선생과 함께 연구하며 논고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이와 같은 불비상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분 선학들은 매우 치밀한 선구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특히 이들 불상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백제불상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정면에 새겨진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은 옷자락이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이고,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오면서는 점차 사라지는 방식이다. 그 외 다소 뻣뻣하게 직립한 자세, 대좌의 연판문, 가느다란 신체의 처리 등은 삼국시대, 나아가 백제조각의 특징으로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비상들이 삼국시대의 옛 양식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삼국 통일 이후에 조성된 상임도 강조하였다. 우선, 명문에 등장하는 발원자들의 신분을 보면 대사(大舍), 소사(小舍) 등의 관직이 보이는데, 이는 백제의 멸망 후 신라에 귀부한 백제 귀족들에게 신라가 하사한 관직의 이름이었다. 따라서 이 상들은 비록 양식적으로 옛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신라의 통일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관직을 신라가 하사한 것이 문무왕 13년, 즉 673년이므로, 명문에 등장하는 계유년은 최소한 673년 이후의 어느 계유년임을 알 수 있어 편년에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마침 이렇게 신라 관직을 하사한 문무왕 673년이 바로 계유년이어서, 대체로 이때에 계유명전씨아미타비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양식적으로 보아도 이러한 독특한 비상 형식의 바탕에 수많은 조각상들을 배치한 방식은 삼국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며, 본존불의 손모습(手印)도 삼국시대 불상에서 유행한 양손 손바닥을 앞으로 향한 전형적인 시무외·여원인이 아니라 다소 자유롭게 변형된 것이므로 과도기적 양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렇듯 발견 초창기에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사이의 과도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그러다 역사학·문헌사의 입장에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발원자의 명단 중에 등장하는 달솔(達率)이라는 관직이었다. 이 관직은 백제 시대부터 있었던 비교적 높은 관등의 직명이었다. 백제 저항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도 달솔을 지냈다. 왜 신라가 하사한 관직들 사이에 옛 백제의 관직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일까? 연구자들은 여기에서 바로 신라의 세력에 반한 저항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실제 이 시기는 신라가 백제에 신라 관등을 하사하고는 있었지만, 그만큼 백제 세력을 적극적으로 무마시키고 끌어들일 필요를 느낄 만큼 백제의 부흥운동에 대한 우려가 남아있었다.

백제는 멸망 후 한동안 당나라가 설치한 웅진도독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후 웅진도독부가 671년 문무왕에 의해 축출된 이후 신라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라 관등을 하사하며 적극적인 회유책을 펼치긴 했지만, 신라는 나당 전쟁을 치루느라 백제 고토를 장악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신라가 675년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를 이긴 것을 기점으로 676년 마침내 기벌포 해전에서 당 수군을 물리침으로써 나당전쟁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키기까지 백제 지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시기에 백제유민들은 부흥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발원문에 등장하는 국왕도 신라의 국왕이 아닌, 과거 백제의 왕들을 기리는 것으로 보았는데, 사후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내세운 것도 추도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신라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옛 양식으로 불상이 조성되었다는 것 역시 일종의 복고주의로 읽힐 수 있었다. 나아가 의도적인 이러한 복고성은 그것이 적극적 저항운동까지는 아닐지라도 무언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거부 정도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술사 연구자들은 연기군 출토의 비상에서 새롭게 당나라 양식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 명문에 등장하는 ‘아미타’의 명칭부터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개념이었다. 삼국시대에 아미타불은 ‘무량수불’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량수’는 인도의 아미타유스(Amitayus)를 뜻풀이한 것이고, ‘아미타’는 발음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말하자면 요즘 화제가 되는 헐리웃 영화 ‘터미네이터’를 1960년대에 상영했다면 ‘종결자’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을 상황과 유사한 것이다.

▲ 기축명 비상과 연화사 비상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나라의 서방극락정토변상도 벽화. 돈황 막고굴 220굴.

도상적으로도 예전에는 이들 비상에 1불·2보살의 삼존상을 넘어 제자, 금강역사 등 많은 존상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중국 남북조시대 사천성에서 출토된 양나라의 명문을 지닌 불비상들과 비교해 왔다. 그러나 새롭게 중국 당나라 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서방극락정토변상도”와 비교하는 해석도 등장했다. 이들 정토변상도는 돈황 막고굴의 당나라 벽화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서방극락정토의 연못에 솟아난 연꽃 위에 앉아있는 아미타불의 도상은 당나라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표현이다. 그런데 그와 동일한 모습이 연기군 출토 비상 중 기축(己丑)명을 지닌 비상에 새겨져 있다. 따라서 백제 유민들의 불비상은 복고적 성격이라기보다는 당 지배하의 웅진도독부 시절 유입된 새로운 도상을 적극 수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보물 367호).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서방극락정토가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다시금 백제부흥정신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듬어져 전개되었다. 기축명 불상은 같은 연기군 출토의 유사한 시기 비상이지만, 계유명 비상을 673년으로 보았을 때 기축년은 689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나당 전쟁이 이미 끝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며, 따라서 백제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가 보다 공고해진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발원하는 명문에서도 계유명 비상에서는 ‘국왕과 칠세부모’를 위한다고 했지만, 기축명 비상에서는 국왕은 빠지고 칠세부모만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연기군 출토의 비상들을 모두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던 것에서 나아가 시기를 구분하고 그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보는 방향으로 논의가 보다 세밀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학문의 발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나 근래 우리나라의 미술사학자들은 “미술과 정치”라는 주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백제유민들의 비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상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 일찍부터 미술과 정치 주제가 논제로 다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동일한 시각자료를 저항세력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친당, 혹은 친신라세력의 시각에서 볼 것인가의 문제로 정리해볼 수 있다. 그에 따라 작품에서 느끼는 감흥도 달라진다. 물론 이들 백제유민들의 저항정신이 얼마나 적극적인 것이었는지, 왜 연기군 지역에 이러한 새로운 형식이 집중되어 나타났는지, 신라관등과 백제관등이 왜 함께 등장했는지 등의 문제는 아직도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02호 / 2015년 7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