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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선 허응보우가 제자에게

“차라리 옳음을 위해 죽을지언정 헛되이 살지는 말라”

금강산서 수행한 뛰어난 고승
불경은 물론 사서삼경도 통달
문정왕후 간곡한 요청 수락
쓰러져가는 불교중흥에 진력

승과 부활 및 선교양종 복구
5000여명에게 정식 승려 길
서산·사명당 등 인재도 발탁
음해로 제주 유배 후 순교

“이미 공문(空門, 승가)에 들었으니 크게 앓는 사람이 되고, 차라리 옳음을 위해 죽을지언정 헛되이 살지 말라. 평소 성현을 스승 삼아 행동하되, 추하고 어리석게 한 평생을 허비하지 말라.”

신묵(信黙) 등 제자들은 스승 허응보우(虛應普雨, 1510~1565)를 참으로 희유한 존재로 여겼다. 사슴처럼 두려움이 많아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호랑이보다 용맹했다. 수행에만 전념해온 이판승임에도 일단 직책을 맡으면 어느 사판승보다 유능했다. 언어로 도의 경지를 헤아리지 않는 선승이었으나 한번 붓을 들면 천하의 명문이었다.

보우도 제자들에 대한 애틋함은 각별했다. 수많은 유생들이 퍼붓는 “요승(妖僧)” “간승(姦僧)”이라는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보우는 제자들에게 마음공부를 강조했다. 행여 누군가 보우 자신의 이름에 기대어 권력을 탐하는 기색이 있으면 가차 없이 꾸짖었다. 세간의 정치에 얼씬 거리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질책이었다.

“일단 속세 벗어나서 푸른 산에 올라왔다면 귀머거리 세인처럼 일희일비 말아라. 고요한 곳에서 한가롭게 살면 하늘이 마땅히 보호할 것이요, 권력의 문턱에 다투듯 나서면 귀신도 반드시 다가올지니.”

보우는 출가자들이 본분에 철저하고 도를 향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피눈물 나도록 서러운 법난의 시대에 불교가 살길이라고 믿었다. 불교를 되살리는 근본적인 방법은 왕실의 지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계를 이끌어갈 젊은 승려들의 수행력과 청정성에 달려 있다는 게 보우의 확신이었다.

조선중기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의 혹독한 억불정책으로 불교계가 존폐의 기로에 섰던 시대였다. 금강산에서 유유자적 살다 적멸에 들었을 보우를 세간으로 이끈 것도 그러한 불우한 시대였다. 성종은 왕위에 오른 다음해(1471년) 불경을 간행하던 간경도감을 폐쇄했으며, 양반가 여인들의 출가를 금지시켰다. 신분증명서인 도첩이 없는 승려들은 환속시켜 군대에 편입시켰다. 연산군은 선교양종의 승과를 폐지하고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와 교종의 본산인 흥덕사를 연회 장소로 활용했다. 심지어 세조의 비원이 담긴 원각사까지 기생방으로 만들었다. 중종의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법치의 근간인 ‘경국대전’에서 승과제도를 아예 없애버림으로써 승려들이 더 이상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도록 했다.

불상과 범종은 녹여져 살상 무기로 탈바꿈됐다.  유생들은 절에 놀러와 고기와 술을 요구하고 산행을 할 때면 승려들에게 가마를 메도록 했다. 사찰의 재물을 약탈하고 불사르는 일이 버젓이 자행됐으며, 사찰을 폐사시켜 자기 조상의 묘지로 사용했다. 행여 승려들이 행패를 일삼는 유생들을 관아에 제소하면 오히려 죄를 뒤집어 씌웠으며, 사찰에 불을 지른 유생이 영웅처럼 떠받들어졌다.

말법시대였다. 불교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불온한 사상이었으며, 승려들은 더 이상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불교의 명운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였다. 그녀는 중종의 계비(繼妃)로서 일찍 세상을 떠난 장경왕후의 뒤를 이어 1516년 왕비가 됐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1년 만에 단명한 인종을 이어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12살 어린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녀의 수렴청정이 시작된 것이다. 문정왕후는 불심이 무척 깊었다. 중종이 폐불을 단행할 때도 왕실의 재산을 관리했던 내수사(內需司)를 통해 여러 사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문정왕후는 불교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왕권이 강화돼 나라가 안정된다고 확신했다. 왕후는 도성 내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 옛터에 인수사(仁壽寺)를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불사 계획을 세웠다. 사림과 대립각을 세운 왕후의 친동생 윤원형을 중심으로 윤춘년, 심연원, 정만종, 한지원 등이 은근히 지지하고 나섰다. 하지만 자신이 믿고 의지할 고승을 찾아야 했다. 그때 정만종이 추천한 인물이 바로 금강산과 함흥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던 보우였다.

 

▲ 보우는 암흑기에 접어든 불교의 부흥을 위해 역사의 전면에 뛰어들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다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그림은 허응당 보우 진영.

어려서 양친을 잃은 보우는 8살부터 양평 용문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유불선 3교에 밝았던 스승 덕에 보우는 불교를 비롯해 유교경전까지 폭넓게 섭렵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던 그는 오래지 않아 양반 자제에게 경학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을 지니게 됐으며, 시를 짓는데도 능숙했다. 15살에 스승을 따라 금강산 마하연으로 향한 보우는 그곳에서 삭발수계한 후 비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얼마 후 용문사로 돌아온 그는 불경과 외전을 익히다 24살 되던 해 다시 금강산으로 향했다.

 

보우는 오현봉 꼭대기의 이암굴에 거처를 정했다. 반드시 득도하겠다는 원을 세우고는 용맹정진에 돌입했다. 여건은 극히 열악했다. 몸이 약했던 탓에 수시로 병고에 시달렸고, 양식이 떨어져 굶어야 할 때도 많았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살림살이 날로 엉성하여/ 서리 내린 아침엔 얼어빠진 밤 줍고/ 노을 지는 저녁에는 마른 나물 뜯네/ 빈 바리때는 거칠어 거미가 줄을 치고/ 불기 없는 재 위엔 새들이 글씨를 쓰네.’

그곳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수행하던 보우. 6년 뒤 그가 토굴에서 나올 때는 시시비비와 분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보우는 법을 널리 펴고 싶었다. 중종 33년(1538년), 그는 각 고을과 산천을 주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마침 이 해 9월 조정에서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은 사찰을 모두 헐어내고 전라도 지역 승려 3000명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등 불교계를 더욱 모질게 탄압했다.

보우는 조선의 불교가 처한 실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일부 승려가 잘못하면 이를 빌미로 깊은 산중에서 수행하는 승려들까지 처벌했다. 승려도 다 같은 임금의 백성이었지만 철저히 외면 받고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보우는 이때의 비참한 상황을 시로 읊었다. 

"불교가 쇠퇴하기가 이보다 더하겠는가. 피눈물 뿌리며 수건을 적시네.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발붙일 곳이 없고  티끌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겨야 하나."

보우는 승려들의 자질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점도 안타까웠다. 합법적으로 승려가 되는 도첩제가 사라지면서 부역의 과중함을 견디지 못하거나 범죄를 저지른 뒤 산사에 숨어들어 승려로 살아가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사찰은 선지식을 길러내는 도량이 아니라 부역의 도피처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불교가 회생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음을 직감했다.

보우는 숱한 고민을 끌어안고 금강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금강산으로 돌아온 보우는 제자들 지도에 주력했다. 인연 있는 유생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도에 대한 담론도 펼쳤다. 때로는 보우가 시문과 유교경전에 밝다는 얘기를 듣고 선비들이 배우러 찾아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보우는 승려를 찾아왔으면 불법을 물어야지 시문을 묻느냐며 정중히 돌려보냈다.

보우의 이름은 불교계는 물론 일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오르내렸다. 보우는 대중들과도 함께 호흡하려 노력했다. 무주고혼을 위해 수륙재를 열고, 선의 부흥을 위해 무차대회를 베풀었다. 보우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으며 오래지않아 금강산의 고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명종 3년(1548) 9월, 보우가 금강산에서 내려와 호남으로 가던 중 풍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였다. 석 달간 시름시름 앓은 뒤 겨우 거동할 수 있을 무렵 문정왕후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병환으로 사임한 노승의 후임으로 봉은사 주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보우는 그 길이 고난의 길임을 잘 알았다. 유생들의 온갖 음해와 질시가 끊이지 않을 것임도 분명했다. 보우는 병약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마음 같아서는 담장을 뛰어넘어 달아나거나 귀를 씻고 못 들은 일로 되돌리고 싶었다. 사양의 뜻을 거듭 밝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보우는 이 길이 피하고 싶지만 결코 피해선 안 되는 자신의 숙연으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자신마저 이 길을 외면하면 불교가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그를 도성으로 향하게 했다.

문정왕후의 뜻을 받아들인 보우는 불교중흥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사찰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거나 기물을 파손한 유생들의 출입이 금지됐고, 삭감된 사찰의 토지도 조금씩 되돌려 받았다. 특히 명종 5년(1550), 연산군 때 사라진 선·교 양종이 다시 세워졌다. 승려들은 늘어나고 군인은 줄고 있는데 승도들을 통솔할 이가 없으면 잡승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명분이었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교단을 되살리기 위해 내놓은 방책이었다. 사대부들이 즉각 반발하고 성균관 유생들은 집단시위를 벌였다. 조정대신과 지방 유생들의 배불상소가 빗발쳤다. 보우가 선종판사에 임용된 후 6개월 동안 올린 양종 복구 반대 상소가 423건, 역적인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도 75건이나 됐다.

이 같은 비난에 보우는 “구름이 푸르건 희건 하늘이 어찌 관계하랴. 사람들이 옳고 그르다 하는 것 나는 알지 못하네. 남들이야 미워하든 사랑하든 공(空)을 관하며 누워있자니 원수진 빚쟁이는 원래 본문(本門)의 스승이라네”라며 마음을 추슬렀다. 보우는 고차원적인 수행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서운 인욕과 자비로 적대자들을 감싸 안으려 애썼다. 하지만 보우는 한순간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다. 특히 명종 7년(1552) 4월에는 승과를 시행해 후대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인재들을 발굴했다. 첫 승과에서 선발된 인물 중에는 훗날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을 맡아 전국의 승병을 이끌었던 청허 휴정(1520~1604)도 포함돼 있었다.

불교가 점차 활기를 띠게 되자 모함도 더욱 거세졌다. 뇌물을 받았다는 상소에서부터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었다거나 궁궐에 불이 난 것까지 보우의 탓으로 돌렸다. 그렇지만 정작 보우를 슬프게 한 것은 일부 승려들까지 부화뇌동해서 자신의 음해에 가담하고 있는 점이었다. 보우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앉아서 헤아려보니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내 덕 없다고 참소한다면 하늘도 아마 받아들일 것이나 내 탐욕 많다고 헐뜯는다면 누가 감히 의심하리오. 대중 앞에 임함에는 옛 큰스님들보다 나을 것 없지만 마음 수양하는 일 나름대로 옛 스님들 자취 뒤따를 수 있도다. 줄 끊어져 거문고 곡조 탈 수는 없지만 죽고 난 뒤에는 (나의 진심을 알아줄) 종자기(鍾子期) 있으리라 떳떳이 말할 수 있다네.’

명종 10년(1555) 9월, 양종을 세우고 승과를 부활시킨 보우는 병색이 짙어짐에 따라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직을 모두 내려놓고 청평사로 향했다. 8년만에 돌아가는 산사,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더욱이 선과 교에 두루 밝은 휴정이 선종과 교종의 판사를 맡게 됐으니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보우는 청평사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점도 마음에 들었다. 더 이상 음해와 비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됐다. 실제 보우가 한양을 떠나자 그토록 빗발치던 상소가 하루아침에 그쳤다. 보우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불교 확산을 막으려는 유생들의 의도에서 비롯됐음이 새삼 확인된 셈이다.

보우는 산사에서의 생활이 좋았다. 퇴락한 사찰을 중수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시대는 다시 그를 세상으로 끌어냈다. 온갖 상소에 시달리던 휴정이 2년 뒤 선교 판사직을 사임하더니 몇 해 뒤 후임자마저 직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보우는 선종판사를 다시 맡아달라는 문정왕후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더욱이 왕후는 경기도 원당에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 인근으로 옮기려 하면서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상태에 봉착해 있었다. 청평사를 떠나는 보우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 산중에 맘 편히 머물 수 없을 것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같은 하늘 같은 땅 임금님 은혜 속에서/ 동서로 오고가는 이 병든 모습/ 세상 사람들 다른 소원 있음을 모르니/ 얼마나 많은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나의 어리석음을 비웃겠는가.’

 

▲ 유림의 질시로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59년 일본에서 발견된 ‘허응당집’. 이 문집을 편찬한 사명당 유정은 “우리 대사께서는 100년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후학들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셨다. 그 분은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 가신 분이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그의 우려는 빗나가지 않았다. 보우의 복귀와 더불어 다시 원색적인 비난과 상소가 쏟아졌다. 그럼에도 보우는 소처럼 우직히 불교의 토대를 다져나갔다. 회암사를 중건하고 승과를 통해 사명 유정 등 300여명의 인재들을 발굴했다. 도첩도 꾸준히 발급해 총 5000여명이 정식 승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565년 4월, 보우는 자신은 물론 문정왕후의 숙원 사업이었던 양주 회암사를 중건하고 그곳에서 무차대회를 성대하게 봉행했다. 불교에 대한 사대부들의 경계심이 높아졌지만 이제 불교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신뢰는 갈수록 높아졌다. 서서히 척불의 시대가 가고 불교중흥이 도래하는 듯했다. 하지만 막강한 불교후원자였던 문정왕후가 그해 깊은 병에 들었다. 65살의 왕후는 아픈 가운데도 불사를 위해 목욕재계하고 육식을 일절 금했다. 그렇게 소식(素食)으로 연명하다 그해 4월5일 피안으로 떠나갔다.

문정왕후의 존재는 고사 직전의 불교계에 감로수와 같았다. 그녀의 숭불로 인해 조정에 불교신자가 크게 늘었으며, 내원당에는 불공을 드리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각도의 관찰사와 군수가 불교를 옹호했으며, 삭발하고 출가한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유독 이 시기에 각지 사찰에서 수많은 불상과 불화가 조성될 수 있었던 것도 문정왕후의 돈독한 신심의 영향이 자못 컸다.

문정왕후의 죽음은 곧 보우에 대한 노골적인 박해로 이어졌다. 문정왕후의 지지로 열리던 회암사 무차대회가 곧바로 중단됐다. 폐불을 요구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들끓었다. 명종도 문정왕후의 빈자리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은 신하와 유생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집요하고 거셌다.

유생들은 ‘불교가 흥하면 유교는 쇠한다’는 허황된 논리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한글로 유서를 남겨 불교를 보존케 해달라는 문정왕후의 간곡한 당부도 아무런 소용없었다. 오히려 성균관 유생들은 더욱 극렬하게 보우를 죽이라고 상소하고 또다시 성균관을 비우고 뛰쳐나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명종은 결국 왕후가 서거한 지 두 달 만에 율곡 이이의 상소에 따라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보우는 그곳에서 제주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살해됐으며, 선교양종과 도첩제도 다음해 폐지되고 말았다. 세수로 56살, 법랍으로는 41살이었다.

몸은 세간에 두었지만 늘 금강산을 그리워했던 보우. 하지만 그는 자신의 비극적 최후를 예견했음에도 끝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보우는 순교하기 직전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겼다.
‘일없이 허깨비 마을에 와서/ 오십여 년을 한바탕 놀았구나/ 인간사 영욕이야 무슨 상관이랴/ 적정한 그 자리에 돌아가느니’

목숨을 바쳐 법의 등불을 다시 밝혔던 보우는 선종판사로 있을 때 경종(敬宗)이라는 사미에게 억불의 시대를 살아가는 승려의 처신방법을 이르는 시를 보냈다. “이미 공문(空門, 승가)에 들었으니 크게 앓는 사람이 되고, 차라리 옳음을 위해 죽을지언정 헛되이 살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일상사에 얽매이지 않고 삶의 문제, 시대의 문제와 부딪히며, 결단코 옳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보우는 제자에게 당부했던 말처럼 누구보다 크게 앓았고, 옳음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향해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신묵의 제자로 훗날 ‘허응당집’을 편찬한 사명당 유정은 “우리 (보우)대사께서는 100년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후학들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셨다. 그 분은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 가신 분이다”라는 찬사를 남겼다.

보우의 문집은 유림의 질시로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59년 일본 학자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됐다. 이 편지는 그 때 발견된 ‘허응당집’에 실려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허응당집’(이종찬 역, 불사리탑), ‘허응당보우’(박영기 지음, 한길사), ‘나암보우의 생애와 불교계 문도’(황인규, 동국사학 제40집), ‘나암보우와 조선 불교계의 고승’(황인규, 보조사상 24집), ‘보우의 불교부흥운동과 그 지원세력’(김상영, 중앙승가대 논문집3), ‘허응당 보우의 산거시’(강석근, 불교어문논집 6집), ‘선시로 살펴본 허응당 보우의 행적’(강석근, 불교문화연구 3집), ‘허응 보우의 불교사적 위상 재검토’(손성필, 한국사상사학 제46집), ‘조선 명종대 불교정책과 그 성격’(한춘순, 한국사상사학 44집), ‘문정왕후의 중흥불사와 16세기의 왕실발원 불화’(김정희, 미술사학연구 제231호)

[1301호 / 2015년 7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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