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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일제강점기 사찰의 산림조성

우리나라 최초 산림 조성 정책은 일제 삼림령에서 유래

▲ 일제강점기 사찰림 벌채 후, 시업안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선암사의 삼나무·편백 숲.

사찰 숲은 일제강점기 30여년 동안 어떻게 비상 금고 구실을 할 수 있었을까? 한두 해도 아니고 30여년 동안이나 금고가 될 수 있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숲이 가진 재생 가능한 특성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로 산림 시업안을 편성토록 하여 숲을 조성하게 한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이다.

숲이 사찰금고 가능한 건
재생가능한 숲 특성 때문

일제, 베어낸 나무 양보다
더 많은 나무 심도록 강제

18세기 헐벗은 남한산림
일제 거치며 오히려 늘어

먼저 숲의 특성부터 살펴보자. 산림을 흔히 재생가능한 자원이라고 일컫는 이유는 적절하게 이용하면 영원히 목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100정보의 숲을 100등분하여, 1년생에서 100년생까지의 숲이 1정보씩 있다고 가정해 보자. 100년생의 숲을 벌채한 후, 다시 나무를 심으면, 한 해가 지나면 역시 같은 조건의 숲이 되고, 따라서 전체 숲에서 자라는 임목의 총량(산림축적)은 변하지 않는다. 100년생이 자라는 1정보의 숲을 매년 베어서 쓰면 결국 매년 자라는 양만큼만 베어서 쓰는 셈이 된다. 마치 은행에 저축한 예금의 이자만 꺼내 쓰면, 원금이 축나지 않는 이치와 같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남지방에서 벌채가 가장 빈번했던 백양사 사찰림의 벌채량과 산림축적량을 비교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벌채허가원에 의하면, 백양사의 산림면적은 1348정보(약수리 산 115-1 1134정보, 신성리 산 1번지 234정보)이다. 백양사에서 벌채한 목재의 양은 1929년 1616㎥, 1931년 1600㎥, 1933년 1439㎥, 1934년 2911㎥, 1937년 1857㎥, 1938년 3754㎥, 1940년 728㎥, 1942년 642㎥, 1943년 630㎥로 모두 12055㎥였다. 이 수치는 15년간(1929년에서 1943년까지) 벌채한 양이니, 1년에 평균 804㎥씩 벌채한 셈이다.

조선총독부 연감에서 밝히고 있는 사찰림의 연도별 ㏊당 평균축적은 약 21.4㎥이다. 여러 가지 변수(병해충, 자연재해, 임지별 다른 축적량)를 무시하고, 이 평균축적을 백양사 산림에 단순하게 대입하면, 총 산림축적은 1348정보x21.4㎥로 28,847㎥(원금)가 된다. 매년 산림의 생장량을 4%(이자율)로 추정할 때, 한해 백양사 산림에서 자라는 임목의 축적량(이자)은 1153㎥씩 늘어나는 셈이다. 편의상 이런저런 가감요인을 무시하고 단순하게 계산하면, 매년 자란 양(1153㎥)이 매년 벌채한 양(804㎥)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백양사 숲은 아홉 번이나 벌채했어도 고갈되지 않았던 셈이다.

나라 전역 사찰의 산림축적도 원금에 이자가 매년 붙듯 조금씩 늘어났다. 산림축적 자료가 정리되기 시작한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연감을 참고하면, 나라 전체의 산림축적은 약 19% 정도 줄어든 반면 사찰림의 축적은 오히려 38%나 증가하였다. 이렇게 늘어난 이유는 전체 사찰림의 매년 자라는 임목의 양보다 벌채목의 양이 더 적었고, 꾸준히 나무를 심고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사찰의 조림실적은 동아일보 1924년도 2월22일 자 기사(‘사찰림 조림면적 2만3606정보 85만2000본 식재’)로도 확인된다. 그래서 사찰의 비상금고는 마르지 않았던 셈이다.

사찰 숲이 마르지 않은 비상금고가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에는 조선총독부가 남벌과 과벌을 막기 위해 시행한 시업안 편성과 그에 따른 신규 산림조성도 무시할 수 없다. 20세기 한반도의 산림황폐는 흔히 일제강점기의 산림수탈 탓이라고 쉽게 들먹이고 있지만, 그것은 장강(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상황이었을 뿐, 장강유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방은 헐벗은 상태였다. 그래서 18세기부터 이미 남부지방에는 산림고갈에 대한 다양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산림 시업안을 편성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산림경영계획서를 작성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일정 면적의 산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자, 어떤 수종을 언제 어떻게 얼마만큼 벌채하며, 그 벌채지에는 어떤 수종을 어떤 방법으로 언제 심을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 시업안 편성이다. 시업안 편성이 중요한 이유는 임목벌채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신규 산림조성도 함께 챙기기 때문이다.

민망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산림 시업안은 조선총독부의 ‘삼림령’(1911년)에서 유래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삼림령에 따라 국유림 벌채에 앞서 먼저 산림조사와 벌목 계획을 수립도록 했다. 그 후, 시업안 편성규정(1919년)이 제정됨에 따라 사찰도 산림벌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산림 경영계획서(시업안)를 편성하여 총독부에 제출하고,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 보현사의 묘향산 희천사업구 시업안(1936년) 설명서.

일제강점기 초기(1915년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의 사찰림 벌채허가원에는 시업안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하면 베어 쓰는 것만 급급했던 시기였고, 사찰까지 시업안 편성을 강제하지 못했다. 사찰의 시업안 편성 시기는 사찰림의 벌채가 빈번해진 1920년대 후반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송광사와 선암사(1927년), 백양사(1928년), 통도사(1930년), 보현사(1936년)의 시업안을 참고하면, 1920년대 후반부터 시업안 편성이 사찰림에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사찰의 산림 시업안은 누가 어떻게 작성했을까? 송광사나 통도사의 사례처럼 산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가 시업안을 작성했다. 조선의 사찰은 물론이고, 국가 이외에는 어떤 산림 소유주체도 그 당시 시업안을 작성할 수 있는 전문성이 없었다. 그래서 사찰이 소재한 해당 도의 산업과에 소속된 일본인 산림기수(山林技手)가 사찰의 의뢰로 시업안을 작성하고, 사찰은 적당한 사례를 지급했다.

통도사(1930년)와 보현사(1936년)가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시업안은 1) 총론(해당 산림전반에 대한 설명), 2) 지황 및 임황(산림의 지리적 생물학적 현황 및 조사방법) 3) 시업관계 사항(산림의 보호 및 관리, 산림경제), 4) 삼림계획, 5) 장래시업 방침(수종, 작업종, 윤벌기, 벌채량 및 벌채순서), 6) 조림, 7) 시업상 필요한 시설계획, 8) 장래 수입과 지출 전망, 9) 시업안 실행에 대한 의견, 10) 시업안 편성 공정 등과 같이 통일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업안 편성이 벌채허가를 받는데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었음은 각 사찰이 1930년대 이후 총독부에 제출한 벌채허가원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벌채허가원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은 시업안에 따라 벌채를 신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규 산림조성도 함께 밝히고 있다.

▲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굴목이재 초입의 편백 숲.

구체적으로 송광사의 1927년도 시업안은 상세한 벌채내역(작업종, 수종, 윤벌기, 벌채 순서와 벌채량)과 신규 산림조성 방법(총 145.87정보에 필요한 적송, 곰솔 등의 식재본수와 식재방법, 보육작업, 필요예산)을 제시하고 있다. 1930년 통도사의 경우 35년생 적송과 25년생 잡목을 시업안에 따라 벌채하고, 산림조성에 필요한 조림비와 임도신설 및 수선에 필요한 예산으로 벌채수익을 사용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931년 백양사의 벌채허가서에는 벌채 수입으로 조림비 및 부채상환, 기부금 납부에 충당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1933년 선암사의 벌채허가원에는 벌목수익금의 일부를 삼나무 3000본(1정보)과 편백 1500본(0.5정보)의 조림비로 충당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강점기 사찰의 산림관리와 관련지어 특기할 만한 사례는 선암사에서 찾을 수 있다. 선암사는 산림관리위원회를 1929년 결성 운영하는 한편, 제탄사업으로 생긴 수익금 일부를 공제계(共濟)의 운영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선암사 산림관리위원회의 ‘산림계(山林係) 규정’, 목탄 생산과 판매를 위한 ‘제탄(製炭)규정’(1929), 제탄 수익금의 일부를 주변 주민들의 공익사업에 사용한 ‘공제계규정’(1932)은 조선시대 율목봉산과 향탄봉산의 관리 기록을 담고 있는 송광사의 ‘조계산송광사사고 산림부’만큼이나 일제강점기의 중요한 기록이다.

사찰의 벌채허가원과 시업안을 참고할 때 일제강점기 사찰이 현금성 수익을 확보하고자 산림을 벌채했을 뿐만 아니라, 벌채지에 새롭게 숲을 조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모든 사찰이 시업안을 준수하여 숲을 완벽하게 조성하진 못했을지라도, 이렇게 조성된 사찰림은 6.25한국 전쟁 이후의 복구기에 다시 한 번 목재 비축기지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303호 / 2015년 7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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