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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상

“그 어떤 행동도 받아준 대지와 숲에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 중국의 티베트 개발을 향한 손길은 5000m 고봉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라싸로 향하는 칭장열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중국의 난개발을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다.

"30~40년 만에 다시 티베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티베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예외 없이 야생 생물들이 놀랍도록 사라져버렸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목재를 티베트로부터 동쪽으로 수송하는 중국의 트럭이 24시간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지속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대단히 비관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

교육과 대중매체가 공통으로 특별한 책임을 지고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연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공통의 책임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와 더 관련이 깊습니다. 자연 환경은 우리의 집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신성하거나 성스러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냥 우리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자연을 돌보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공유된 상식에 속합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지속적인 인구 팽창과 과학 기술력의 발달이 직접적으로 자연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다만 최근의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와 같은 지구(Mother Earth)는 우리의 엉성한 생활 방식을 지금까지는 받아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인간의 행위를 침묵 속에서 수용할 수는 없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환경 재해로 발생된 문제들은 우리의 무책임한 행위에 대한 지구의 반응으로 보입니다. 지구는 자신의 내성(耐性)에도 한계가 있다면서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제력을 상실함으로써 받는 과보가 오늘날의 티베트보다 더 명백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티베트는 야생 생물의 천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20세기 중반 이전에 티베트를 찾은 여행자들은 누구나 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곡물을 재배할 수 없는 외딴 지역을 제외하고는 동물을 사냥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실제로 정부 관료들은 “야생 생물을 보호하라”는 포고를 매년 관례적으로 내려왔습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든 수중 또는 야생 생명체에 해를 끼치거나 폭력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포교의 내용이었습니다. 쥐와 여우는 유일하게 이에 대한 예외로 인정됩니다.

젊은 시절 라싸를 벗어난 지역을 여행할 때면 매우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을 목격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티베트의 동쪽 탁체르(Taktser)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4살 때 공식적으로 ‘달라이라마’로 공표되고 ‘달라이라마’임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티베트를 가로질러 라싸에 이르는 3개월에 걸친 여정 중에 내내 마주친 야생 생물들이 여전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입니다.

티베트 야생 당나귀와 야생 야크가 엄청난 무리를 지어 자유롭게 대평원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겁 많은 티베트 가젤, 흰 입술의 사슴 그리고, 당당한 티베트 영양들이 떼를 지어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때때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대단히 자유롭고 아름다웠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조그마한 새앙토끼가 풀 덮인 곳에 무리지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나 강력하게 저를 사로잡았었는지도 제 마음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다정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새들을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위엄 있고 수염을 가진 독수리가 사원 위로 높이 솟구쳐서 산속에 내려앉습니다. 거위 떼도 보였습니다. 가끔 자주 밤에는 긴 귀를 가진 올빼미의 우는 소리도 들려오곤 했습니다.

라싸에서도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어떻게든 단절되었다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이라마의 겨울 궁전인 포탈라궁(Potala) 꼭대기에 있는 제 방에서 아이로써 벽의 갈라진 틈새에 둥지를 틀고 있는 ‘붉은 부리의 ㅁ카’(khyungkar)의 습성을 관찰하느라고 수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Norbulingka) 뒤편에서 검은 목의 두루미 쌍들을 종종 보곤 했습니다. 이 새는 제게는 기품과 우아함의 전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곳의 습지대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상의 것으로 티베트 동물상(相)의 최고 영광을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곰과 산여우, 늑대와 아름다운 눈표범 그리고, 스라소니 등 그들은 평범한 농부 또는 순박한 사람들을 겁먹게 만들었으며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 지역에 고유한 자이언트 팬더와 마주했습니다.

애석하게도 이 풍부한 야생 생물들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사냥이 부분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주로 서식지의 상실 때문입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전에 비해 매주 적은 일부분만이 서식지로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30~40년 만에 다시 티베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티베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예외 없이 모두 야생 생물들이 놀랍도록 사라져버렸다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야생 동물들이 종종 마을의 집 근처로 다가오곤 했지만 이제는 그런 곳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티베트의 숲을 대대적으로 파괴해버린 것도 똑 같이 문제가 됩니다. 과거에 산들은 모두 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늘날에는 승려의 머리처럼 말끔히 깎여져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이징의 중국 정부는 “서부 중국과 더 외곽지역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홍수는 부분적으로 그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목재를 티베트로부터 동쪽으로 수송하는 트럭의 호송대가 24시간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지속적으로 듣고 있는 비관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지방의 산악 지형과 혹독한 기후를 생각하면 이것은 특히나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는 나무를 이식하는 데는 지속적인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행히도 보살핌과 관심에 의한 행동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찾을 수가 없습니다.

위의 어느 것도 역사적으로 “우리 티베트인들이 의식적인 산림 보호론자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염’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에겐 아예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는 오히려 엉망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여지가 없습니다. 깨끗하고 건조한 공기와 맑은 산속의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광활한 지역에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청정함에 대해 이런 순박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망명지에서 마실 수 없는 시냇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마치 외동아이의 경우처럼,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건 대지는 그 모든 것들을 받아주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청결과 위생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거리낌 없이 침을 뱉거나 코를 풀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캄파(티베트 캄(Kham)지역 주민을 일컫는 말, 역자 주)의 한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에 경호 업무를 담당했었는데 다람살라에 있는 저의 관저를 돌기 위해서 매일 왔습니다. 그것은 대중적인 기도법의 하나였습니다. 불행히도 그는 매우 심한 기관지염을 앓고 있었습니다. 병세는 그가 들고 있는 향 때문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코너마다 쉬면서 격렬하게 기침을 하거나 가래를 뱉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심해서 저는 때때로 그가 기도를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가래를 뱉기 위해서 온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인도의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 온 이래 저는 환경 문제에 대해 계속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티베트 망명정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매우 민감해서 쉽게 균형이 깨져버리는 이 지구의 거주자로서의 의무를 가르치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왔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는 이 문제를 주제로 법문을 하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의 행위가 타인에게 환경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 지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항상 강조해 왔습니다. 이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예를 들어 산림 벌채가 지구의 기상 체계에 주게 될 영향은 차치하고라도 토양과 국지적 강우에 미치게 될 최종적인 영향이 무엇인지도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알다시피 우리 인간만이 지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종(種)이라는 사실입니다. 조류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고, 곤충도 그렇고, 포유류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구를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또한 지구를 보호할 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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