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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정주-무등을 보며

기자명 김형중

미당 스스로가 가장 사랑하는 ‘시’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현대공론, 1954년)

가시덤불에 놓일지라도
기개 넘치는 수도승처럼
지조 지키며 가난 이기는
삶의 긍정적 자세 읊은 시

미당(1915~2000)은 자신이 쓴 950편에 이르는 시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시는,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노래한 ‘무등을 보며’라고 했다. 시인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 있는 그의 무덤 시비(詩碑)에 실린 시도 ‘무등을 보며’이다.

이 시는 미당이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인 1954년 8호 ‘현대공론’에 발표한 작품이다. 경제적 가난과 궁핍함에 함몰되지 말고, 무등산의 고고하고 의연한 모습을 닮아서 이를 극복할 것을 완곡하게 설법(說法)한 시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래도 믿고 의지할 것은 부부이고,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은 우리 새끼들뿐이다. 그 어떤 가난의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가난하여 거친 옷을 입고서도 도는 가난하지 않다는 긍지를 가진 기개가 넘치는 수도승처럼 기죽지 말고, 옥돌같이 호젓이 고결한 생각이라도 하고, 푸른 이끼(靑苔)처럼 품위와 지조를 지키며 자욱이 끼일 것을 호소하며 가난을 이겨내는 삶의 긍정적 자세를 읊은 시이다.

‘무등을 보며’의 시를 살펴보면 당나라 영가 현각(永嘉玄覺)선사의 ‘증도가(證道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에 나타난 주제시어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도가’에 나오는 다음의 시구를 용사(用事)하였다.

“빈털터리 수행자가 가난하다 말하지만 몸은 비록 가난하나 마음만은 부자라네. 가난하여 옷치장은 남루하다 할지라도 도를 이루어 마음속에 귀한 보배 다 갖췄네. 값으로 다질 수 없는 진귀한 것 쓰고도 남음이 있어 인연 따라 아낌없이 모든 이익 다 베푸네.”

‘무등을 보며’는 시 전체에 흐르는 시상과 주제가 ‘증도가’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파악된다. 수행자는 가난한 빈도(貧道)이지만 그가 닦은 도는 가난하지 않고 부자이다. 그것은 마음속에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무진보배인 마니주(摩尼珠)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보배인 불성을 생활 속에서 활용하면 하루에 백만금을 쓰는 부자보다도 더 부자이다.

미당의 시에서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것은 불교 사상이다. 그는 젊은 날에 일찍이 석전 박한영 선사의 문하에서 불도를 닦는 출가 비구승이었다. 석전 박한영은 승려 학자로서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의 책 이름을 제첨(題簽)해 준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다.

올해가 미당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다. 그의 탄생을 기념하는 화려한 행사가 동국대학교 중강당에서 있었다. 기라성 같은 한국 시단의 시인과 명사들이 모여 가신 님을 기렸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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