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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명 이탁오가 비구니 담연에게

“사람에 남녀가 있지만 견식에 어찌 남녀 구별이 있겠는가”

25년간 관리 지내던 이탁오
“따라 짖지 않겠다” 선언
50대 중반부터 집필 작업
공자 등 유학 노골적 비판
여성차별·편견 잘못도 지적

62살 때엔 승려의 삶 시작
담연 출가도 이탁오 영향
편지 주고받으며 교리문답

불온서적 간행으로 투옥
담연과 관계도 왜곡 음해
감옥서 자결로 삶 마무리
허균 등 후대에 큰 영향

“혹독한 여름 더위를 넘기고 나면 바로 용호로 돌아갈 작정이다. 그곳에서는 오직 서방정토만을 주장하고 서방정토로 가는 공안만을 연마하며, 앞으로 더 이상은 소학생처럼 묵은 종이뭉치나 뒤적이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참선이 큰 일이기는 하나 근기가 얕고 약한 자가 아니라면 능히 짊어질 수 있는 바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질이 가장 높다는 자들조차 명성만을 최고로 치고, 진실로 생사고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해탈하길 바라는 욕심이 없더라. 하루하루 넘기다보면 장년배는 노인이 되고, 젊은이는 장년이 되며, 노인은 또 곧 죽을 지경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비구니 매담연(梅澹然, 1564?~1600)은 스승 이탁오(卓吾 李贄, 1527~1602)가 용호의 지불원(芝佛院)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곳 용호에는 이탁오에 반감을 갖는 이들이 많음은 잘 알았다. 그렇더라도 병약한 73살의 노인이 외지를 떠돌다 어떤 불상사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담연은 4년 전 용호를 떠난 이탁오가 그동안 북경의 사찰에서 ‘정토결(淨土訣)’ 3권과 ‘역경’ 관련 저술을 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뒤 남경으로 옮겨가 노구를 이끌고 강학에 참여했으며, 그곳에서 서양 가톨릭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1552~1610)를 만났음도 알았다.

담연은 스승답다고 생각했다. 학문에 대한 열정과 호기심은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다.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을 읽은 이탁오는 그가 수학, 천문학, 측량술, 지리학, 사서와 성리학에도 능통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줄곧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더니 기필코 남경에서 그의 강론을 들었을 뿐 아니라 직접 찾아가 만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담연은 마테오 리치가 이탁오에 대해 “한 중국인이 말없이 나의 강론을 듣고 갔다. 그가 고수라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고 평했으며, 이탁오도 마테오 리치에 대해 “내가 본 사람 가운데 그에 비길 만한 인물이 아직 없었다”고 칭찬한 얘기도 전해 들었다.

담연은 마테오 리치도 스승과 비슷한 사람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렇지만 어떤 성현의 말이나 다수의 주장 앞에서 “아니다”를 외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에 있어서 자신의 스승을 좇아갈 이는 없다고 확신했다.

담연이 이탁오를 알게 된 것은 부친 매국정(梅國禎, 1542~1605)을 통해서다. 그는 마성 사람으로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했으며,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는 진사에 합격한 후 어사로 발탁된 고위 관리였다. 성격이 호방해 “인생은 스스로의 길을 갈 뿐이다. 어떤 궤도나 자취를 따라 밖으로 명분이나 떠벌리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마성의 유마암(維摩庵)에서 이탁오를 처음 만난 매국정은 그에게 깊이 매료됐다. 이탁오는 박식함과 냉철함을 갖췄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도 않을 강골의 사상가였다. 훗날 이탁오는 자신의 저술에서 이렇게 선언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야말로 난쟁이가 광대놀음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잘한다고 소리치면 따라서 잘한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나이 오십 이전까지 나는 정말로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 만약 남들이 짖는 까닭을 물어오면 그저 벙어리처럼 쑥스럽게 웃기나 할 따름이었다.”

그런 성정이 이탁오와 매국정을 의기투합하게 했다. 담연은 부친과 이탁오가 교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의 글을 자주 접했고, 파란만장한 그의 삶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 모든 억압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려했던 자유인 이탁오. 그는 “나이 오십 이전까지 나는 정말로 한 마리 개에 불과했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도 따라서 짖어댔던 것이다”라고 선언한 뒤 더 이상 전통과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시대의 문제와 당당히 맞섰다. 그림은 이탁오의 초상.
이탁오는 1527년 동남 연안의 항구도시인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그는 생각이 깊었고 비판적인 성향이 도드라졌다. 12살 되던 해 그가 부친에게서 ‘논어’의 ‘자로’편을 배울 때였다. 번지가 곡식과 채소를 가꾸는 법에 대해 공자에게 묻자 “소인”이라며 꾸짖는 대목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 어린 이탁오는 밭 갈고 씨 뿌리는 법을 배우려는 번지를 칭찬한 뒤 공자가 번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인’으로 배척한 점을 비판했다. 평생 공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탁오 사상의 시작이었다.

가족과 7명의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 이탁오는 26살 때 향시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부친의 사망으로 잠시 관직을 그만두고 장례를 치러야 했으며, 보직을 못 받아 아이들을 가르쳐 근근이 생계를 유지할 때도 있었다. 1580년, 이탁오는 3년간의 요안 태수 임기가 끝난 뒤 유임을 요청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54살 되던 해였다. 조상과 일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25년간 관직생활을 했지만 더 이상 남들이 짖으면 따라 짖는 ‘한 마리 개’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떠나가는 그에게는 오직 책 몇 권과 그의 사임을 안타까워하는 백성들의 눈물이 있을 뿐이었다.

이탁오는 남경에서 사귄 호북 황안의 부호인 경정리(耿定理) 집에 머물며 본격적인 독서와 저술을 시작했다. 그는 전통과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시대의 문제를 간파해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려 했다. 치열한 사색으로 시대의 어둠과 당당히 맞서나갔다. 마치 맹자가 ‘스스로 돌이켜 떳떳하면 비록 천만의 사람이 비난하더라도 나는 가리라(自反而縮雖千萬人吾往矣)’고 다짐했던 것과 비슷했다.

명나라는 공자의 나라였다. 원에 대한 반발로 한족문화의 회복을 주창한 명은 성리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공자를 ‘최고의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중국 전역에 공자의 상과 사당이 세워졌고 학동부터 고위관리까지 그를 공경토록 했다. 국가차원에서 ‘성리대전’ ‘사서대전’ 등 성리학의 사상전집을 간행했고, 사서오경을 줄줄 꿰지 않고서는 관직에도 나갈 수 없었다. 성리학자 설선(1389~1464)은 “가르침은 (공자와 주자와 같은) 성인들이 이미 모두 밝혔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그것을 따르면 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런 시대적 풍토에서 성리학을 비판하거나 다른 사상을 말하면 이단으로 몰려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지만 이탁오는 교조화된 공자와 주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유교경전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무릇 육경이나 ‘논어’ ‘맹자’는 사관(史官)이 지나치게 추켜세워 숭배한 말이거나 신하된 자들이 극히 찬미한 말들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으면 흐릿한 문하생이나 멍텅구리 제자들이 제멋대로 자기 소견에 따라 써놓은 것이다. 후학들은 이것을 잘 살펴보지도 않고 그것이 곧 성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하여 경전으로 삼으니 그 경전의 태반이 성인의 말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칼날 같은 이탁오의 비판은 계속됐다.
“설령 그것이 성인으로부터 왔다 하더라도 필요가 있을 때 써야 되는 것으로 병에 따라 약을 쓰듯 처방해야 하는 것임에도 멍청한 제자나 흐릿한 문하생들은 오로지 그것만 원칙으로 삼으려 하니 그것이 어찌 만세의 변할 수 없는 지론이 될 수 있겠는가.”

이탁오는 “육경과 ‘논어’ ‘맹자’는 도학의 구실이며, 가식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연못”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역사상 어느 누구도 유학에 대해 이토록 신랄하게 비판한 적은 없었다. 어느 유학자가 “이 세상에 공자가 나지 않았더라면 천하가 깜깜했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 그는 “만약 공자가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대낮에 촛불이라도 들고 다녀야 했을 판”이라며 비꼬았다.

이탁오는 유학자들의 형식화된 사제관계도 지적하며 서로 배우고 평등한 관계가 이뤄져야할 것을 역설했다. “스승과 벗은 원래 같은 것으로 어찌 두 개의 모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벗이 곧 스승인 것을 알지 못해 수업하는 것만을 가리켜 스승이라 하고 또 스승이 곧 벗됨을 알지 못해 헛되이 친밀하게 사귀는 사람만을 벗이라 한다.…만약 스승이 될 수 없다면 벗도 될 수 없는 것이다.”

▲ 북경 교외에 위치한 이탁오의 묘비.
유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질수록 그에 대한 반감과 분노도 커져갔다. 하지만 이탁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1585년 가족을 천주로 돌려보내고 마성의 유마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3년 뒤 62살의 이탁오는 삭발하고 불문에 들었다. 세간의 일에 결단코 간여하지 않겠으며 오직 생사의 이치를 밝히고 진리의 길을 걷겠다는 굳은 결의였다.

이 무렵 매국정이 이탁오와 교유를 하게 되고 딸 담연도 자연스레 그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담연은 미모가 뛰어나고 지혜로웠다. 그러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려 친정에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당시는 성리학이 성할수록 여성들의 삶도 고달팠다. 여성은 어려서 어버이에 순종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아들 낳지 못하거나 질투하거나 말이 많으면 내쫓기는 이유가 되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 당연시 여겨졌다. 여성의 법적인 권리나 독립적인 인격조차 거부되고 그저 남성의 종속물로 전락했다. 여성을 옥죄는 '전족'의 문화는 ‘여성은 재능 없음이 곧 덕(女子無才便是德)’으로 간주하도록 했다. 또 송대까지 용인되던 여성의 재가는 명대에 이르러서 과부의 수절이 보편적인 분위기로 받아들여졌다. 30살 이전에 과부가 되어 50을 넘어서까지 정절을 지킨 여인에게는 대문에 깃발을 내걸어 표시하고 그 집의 부역을 면제토록 했다. 과부가 되면 집안사람들 모두 수절을 바라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탁오의 여성관은 확연히 달랐다. “재능과 지혜가 남보다 뛰어나면 여성이라고 해서 스스로 비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이탁오는 불경을 연구하고 그것을 학습자들에게 강의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꼭 여성 제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강요된 유교문화가 이곳 지불원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진보적 교육사상이며 실천이었던 것이다.

담연은 이탁오에게 수시로 불법에 대해 물었다. 그럴 때면 이탁오는 자신이 이해한 불교의 내용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때로는 공부법에 대한 얘기도 해주었다.
“공부는 제일 먼저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의문이 있으면 바로 그것을 풀어야 한다. 의문이 많다는 것은 곧 깨달음이 많다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의문을 갖지 않는 바로 그것이 가장 큰 병통이다. 오직 그 의문을 여러 차례 해결하면 이것이 곧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편지들이 오고갈수록 담연의 신심은 깊어졌고 이탁오에 대한 신뢰도 커져갔다. 담연은 그를 스승의 예로 섬겼으나 정작 그는 제자를 두지 않기로 했으니 서로 스승으로 부르자고 했다. 담연은 지불원에서 도를 추구하는 이탁오를 떠올릴 때면 자신도 출가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30살의 담연이 속내를 털어놨을 때 부친 매국정은 말리지 않았다. 가문의 헛된 영광을 위해 딸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1593년, 매국정은 딸을 위해 수불정사(繡佛精舍)를 지어주었다. 이탁오는 시를 지어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했다.

‘듣건대 담연이 이날 태어났다는데/ 이날 되려 불문에 들어오는구나/ 담연 같은 승보(僧寶)가 아직 세상에 있으니/ 이제 보니 수불정사의 등불이 바로 불보(佛寶)로구나/…뛰어난 용왕의 딸(용녀)이 부처님이 되어 지금 또 오는구나’

수불정사에는 담연을 비롯해 그녀의 자매와 동서인 선인, 명인, 자신, 징연도 머물렀다. 그녀들은 정토왕생을 발원하며 염불을 하고 불경을 탐구했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이탁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불법을 주제로 숱한 편지들이 오고갔다. 담연이 경전을 읽는 것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인 견해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이탁오는 이렇게 답했다.

“부처님 심법은 전부 경전에 실려 있다. 경전 중의 한 글자를 터득하지 못함은 바로 자기의 생사를 터득하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글자를 모르는 문맹만이 어찌할 수 없을 뿐이다. 경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책 또한 보존될 필요가 없고 부처님 역시 경전을 남기실 이유가 없었다. 옛 사람은 경전을 읽어 세 가지 이익이 생긴다고 말했다. 바로 지혜가 계발되는 이익, 깨달음을 얻는 이익, 또 인증(印證)을 얻는 이익이 그것이다. 그러니 어찌 경전을 읽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이탁오가 상류층 집안의 여인들과 서신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온갖 음해들이 나돌았다. 심지어 그와 가까운 이들 중에도 여인은 도를 공부해도 별 수 없는데 왜 헛수고를 하냐고 핀잔했다. 이탁오는 곧바로 그의 견해에 대해 전면 비판했다.

“사람에는 남녀가 있다고 하면 옳지만 견식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고 하면 어찌 옳겠는가? 견식에 뛰어난 것과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하면 옳지만, 남자의 견식은 모두 뛰어나고 여자의 견식은 모두 미치지 못한다고 하면 이 어찌 옳겠는가?…하물며 출세간의 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탁오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또 다른 글에서는 “부부가 사람의 시초”라며 “부부가 있고 나서 부자가 있고 형제가 있으며, 부부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만사가 바르게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수불정사에 편지를 보내 “온 세상을 통틀어 진짜로 도를 공부하는 자가 없던 판에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대들 모두 진심으로 도를 갈망하니 내 기쁨이 어떠하겠는가”라는 마음을 전했다.

그러나 합리성이 관습의 무게를 뒤엎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교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에 이어 여성에 대한 평등 주장은 유학자들의 분노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더욱이 담연의 시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낙엽이 뜰과 계단에 가득하고/ 가을바람이 다시 이는구나/ 거닐며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니/ 이 적막함을 어찌 참을까’

유학자들은 담연의 시 ‘기외(寄外)’가 이탁오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의혹까지 덧씌우면서 파장은 더욱 확산됐다. 어떤 관리는 “이탁오가 마성에 있는 것은 지방의 풍속과 교화를 해치므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이탁오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까지 공공연히 나돌았다.

▲ 북경 교외에 위치한 이탁오의 무덤.
이탁오는 잠시 마성의 용호를 떠나있기로 했다. 때마침 북경에서 새로운 학문도 접하고 마테오 리치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런 이탁오를 바라보는 담연은 괴로웠다. 세상의 잘못과 허위의식을 벗겨내려는 그에게 자신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행여 스승이 외지에서 세상을 떠나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곳은 부친 매국정이 있기에 그가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담연은 1599년 이탁오에게 편지를 보내 용호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고, 이에 이탁오도 답장을 통해 용호가 돌아가 염불에 전념할 것과 그곳이 자신의 서방 극락정토의 발원지가 될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탁오가 돌아온지 오래지 않아 그들에게 비극이 찾아왔다. 다음해인 1600년 겨울 매국정이 외지로 떠나갔을 때 그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마성의 관리들과 선비들이 주동이 돼 “음란을 조장하는 요망한 중”이라며 지불원에 불을 지르고 탑을 때려 부쉈다. 다행이 이탁오는 제자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하나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탁오가 담연에게 불교를 가르친 것을 트집 잡으며 “여승의 음탕한 행동”이라고 비방함으로써 매국정의 명성까지 끌어내리려 했다. 담연은 더 이상 자신이 살아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떳떳함을 증명해야 스승과 부친의 명예를 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탁오가 부친 매국정에게 “매담연은 여자의 몸이나 어느 남자도 쉽게 그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외다. 지금 그녀는 도를 공부해 올바른 지혜와 식견이 있어 나는 전혀 그녀의 학문을 걱정하지 않소이다”라며 극찬했던 비구니 담연. 그녀는 37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탁오는 통탄했다. 자신을 존경하며 따르던 제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담연을 위해 제문을 지은 그의 사촌 매장공(1575~1641)에게 편지를 보내 “그녀는 참으로 총명하며, 참으로 맹렬하며, 참으로 바르고 원대합니다”라며 깊은 애도의 말을 전했다.

지불원이 불타기 몇 해 전 한 제자가 앞으로 무엇을 하시겠느냐는 물음에 “나는 마땅히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어, 감옥에 불려가 영광스럽게 죽는 것이, 바로 이 한 평생을 이루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탁오는 자신의 말처럼 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1602년 2월 예과급사중 장문달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로 탄핵됐다. 죄목은 벼슬을 지낸 유학자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승려가 되어 못된 서적을 간행했으며, 공자를 비롯한 역사적인 위인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담연 등 여성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아 간행한 ‘관음문(觀音問)’을 언급한 뒤 남녀의 벽을 무너뜨렸다는 죄도 추가시켰다.

감옥에 수감된 이탁오는 왜 그리 책을 많이 썼느냐의 심문관의 질문에 “내 저서가 많지만 모두 성현의 가르침에 합당해 이익은 돼도 손해는 없다”고 답했다. 병으로 앓던 그는 심부름 하는 사람들을 불러 삭발을 하도록 했다. 그런 뒤 돌연 칼을 빼앗아 자신의 목을 찔러 이틀 뒤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방법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실현하겠다는 ·이탁오의 결연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는 생전에 태워 버려야 할 책이라는 의미로 이름 붙인 ‘분서(焚書)’ 6권, ‘속분서’ 5권, 산중에 꼭꼭 묻어버려야 할 책이라는 의미로 ‘장서(藏書)’ 68권과 ‘속장서’ 27권 등 많은 저술을 펴냈다. 그의 말년에 이들 저술 모두 황제의 명으로 금서로 지목돼 불태워졌지만 개혁을 꿈꾸는 이들 사이에서 오랜 세월 은밀히 읽혀졌다. 이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조선의 허균(1569~1618), 이언진(1740~1766), 정약용(1762~1836), 이건창(1852∼1898) 등 권위와 통념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이들 사이에서 이탁오는 여전히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과감하게 벗어나려했던 자유인 이탁오가 애제자 담연에게 보낸 편지는 ‘분서’에 수록돼 있다.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분서Ⅰ·Ⅱ·속분서’(이탁오 지음·김혜경 옮김, 한길사),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신용철, 지식산업사), ‘이탁오 평전’(엔리에산·주지엔구오 지음, 홍승직 옮김), ‘이탁오의 여성관 연구’(김지희, 경희대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탁오의 교육사상’(신용철, 동양학연구4), ‘한국에 있어서 이탁오 연구’(신용철, 한국사상사학 4·5합집), ‘탁오 이지의 불교관-분서를 중심으로’(이정수, 불교학보 42집), ‘이탁오의 출가와 그 배경’(김혜경, 중국학보 제47집)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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