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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리불과 아미타경

기자명 이제열

묻기 전에 부처님이 특별히 정토에 관해 설법

▲ 일본 죠쿄지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

“그 때 부처님께서 장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소승에서 지혜제일 사리불
대승경전에선 질책의 대상
대승선 아라한도 교화대상
부처님이 스스로 법 설해

아미타경은 이렇게 부처님께서 수많은 대중들 중에서도 사리불에게 설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전 호에서 아미타경을 설할 때에 동참한 청법대중들의 종류와 성격들에 대해 설명하였다. 경전에 등장하는 청법대중의 종류와 성격을 파악하는 일은 경전의 내용과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아미타경에 등장하는 청법대중은 세 종류이다. 사리불을 비롯한 대아라한들, 문수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대보살들, 제석천을 중심으로 한 천왕들이다. 이상하게도 법회 동참자들 중에 평범한 비구나 비구니들 그리고 세속에서 법을 실천하는 우바새와 우바이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아미타경만이 아니라 모든 대승경전에 두루 나타난다.

그러나 비록 경전에서는 거론하고 있지 않지만 모든 법회는 경전에 등장하는 세 부류의 청법대중 외에도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발심한 육도의 중생들까지 모두 법회에 동참하고 있다. 다만 아라한이나 대보살을 중심에 놓고 법회를 진행하다보니 평범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등장이 생략된 것뿐이다. 이는 대승경전 끝부분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모든 경의 끝부분은 언제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환희용약하고 신수봉행했다는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대승경전의 청법대중에 있어 한 가지 눈여겨 볼 부분은 부처님과 문답을 나누는 제자들의 부류에 관한 내용이다. 대승경전에서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 두 부류의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아라한이고 하나는 대보살이다. 평범한 사람이 대표가 되어 부처님과 문답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아라한 그중에서도 부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인정을 받은 십대제자나 부처님의 깨달음 자리에서 출현한 권현보살들을 상대로 문답이 행해진다.

아미타경만해도 부처님 제자들 중 가장 출중한 지혜를 지녔다는 사리불을 향해 설법을 하신다. 여기에 눈여겨 볼만한 것은 사리불에 관한 내용이다. 아미타경도 그렇지만 많은 대승경전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사리불이다.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등 대승의 대표적 경전들을 보면 살펴보면 언제나 사리불이 그 현장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다.

왜 대승경전에는 이렇게 꼭 사리불이 등장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일까? 당혹스러운 일은 대승경전에 등장하는 사리불은 그냥 설법을 듣는 자로 그치지 않고 어리석거나 공부를 마치지 못한 미완성의 존재로 그려진다. 부처님으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듣기도 하지만 때로 문수보살과 같은 권현보살들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사리불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승불교에서는 십대제자들을 비롯한 아라한들을 똑같이 미완성의 수행자로 취급한다. 대승불교에서 사리불을 위시한 아라한들을 소승으로 보고 있으며 아직 공부할 것이 남아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아라한은 누구일까? 아라한은 무학의 경지라 부처님의 설법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라한은 남들에게 설법할지언정 설법을 듣지 않는다. 이미 강을 건넌 자에게 뗏목이 필요 없듯 그들은 어떠한 가르침도 원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리불은 이들 아라한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아라한이다. 경전을 보면 여러 출중한 제자들 중에도 사리불을 가장 총애하였고 신뢰했다. 교단에서 그를 법의 사령관이라 불렀을 만큼 행과 설법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중국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부촉받은 제자로 마하가섭을 들어 그를 가장 으뜸가는 제자로 만들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사리불이 최고의 제자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위대한 성자가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설법을 계속해서 듣는 자, 그동안의 견해를 바꾸어야할 자로 등장한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지혜이다. 물론 자비도 함께 중요하지만 그 자비는 지혜를 통해 발현한다. 지혜가 없으면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없고 남들을 열반의 세계로 이끌어 갈 수도 없다. 바로 이러한 지혜의 최고봉이 사리불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의 일인자로 사리불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대신 부처님의 권화보살들을 지혜의 성자로 만들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문수보살을 지혜의 상징으로 받들면서 대지혜라는 말로 소승의 지혜와 구분 지었다. 그 익숙한 반야심경만 보아도 사리불은 관세음의 지혜에 의해 드러난 공의 이치를 다시 깨달아야 할 수행자로 그려진다. 유마경에서는 한낱 범천왕에게조차 책망을 듣기도 한다. 아미타경의 경우도 그렇다. 아미타경 역시 아라한들을 대표한 사리불을 향해 설법이 진행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왜 이토록 사리불과 아라한들을 등장시켜 법을 설하는 것일까?

소승을 대승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소승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들을 교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사리불은 정토에 관해 전혀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그의 견해와 지혜 그리고 체험 속에 정토란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불교 경전을 보면 그 속에 정토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정토는 함께 이 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보살들만이 안다. 문수를 비롯한 대보살들은 부처님의 정토에서 출현한 인물들로 정토의 모든 면에 통달해 있다. 그러나 아라한들은 정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아미타경의 설법방식도 다른 경전들과는 구분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다른 경전들이 경을 설할만한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설해지거나 또는 제자들이 법을 물었을 때에 설해지는 것과 달리 묻지도 않았는데 법이 설해진다. 보통의 경우 부처님은 제자들이 질문하지 않으면 달리 법을 설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팔만사천의 경전 가운데에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한 경우는 몇 개 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설법방식을 십이부로 나누는 중에 무문자설(無問自說)이 있다. 무문자설은 상대가 묻지도 않았는데 부처님 스스로 설명하는 것으로 아미타경이 이에 속한다.

아미타경의 서두는 부처님이 법을 설할만한 특별한 계기도 없고 질문하는 자도 없다. 부처님이 알아서 입을 열어 극락의 존재에 대해 밝힌다. 부처님이 무문자설 하는 경우는 그 내용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다면 묻지도 않는 내용을 공연히 말할 이유가 없다. 또한 내용은 중요한데 상대가 너무 모르고 있다면 알아서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말속에는 아미타경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일반 중생들에게만 해당하는 법문이 아닌 소승들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법문임을 암시한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04호 / 2015년 7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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