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8. 작자미상, ‘화엄종조사회전 의상회’

기자명 조정육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불법을 이해할 수 없다”

▲ 작자미상, ‘화엄종조사회전 의상회’(부분), 13세기 전반, 종이에 색, 일본 경도 고산사.

사랑은 주는 것이다. 상대에게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내어주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길을 쓸어주고 물길을 열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행여 상대를 위한다는 구실로 구속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온전히 나를 다 주었는데도 돌아서 가는 사람에게 서운해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따져 묻지 않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가서 발병난다고 저주 진언을 퍼붓는 대신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도록 축원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대해 분석하려는 게 아니다. 의상(義相,625~702)대사를 사모한 선묘(善妙)낭자의 큰사랑을 들려주려는 것이다.

의상에게 마음 고백한 선묘
거절당했지만 귀의를 결심
의상이 신라로 귀국할 때
용으로 변해 귀국선 호위

의상대사는 의상(義湘), 의상(義想) 등으로 지칭한다. 그는 진평왕 47년(625)에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20세 때 경주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25세 때 중국으로 구법여행을 떠나려 했으나 실패한 후 10년 뒤에 다시 시도했다. 그 과정은 원효대사편에서 살펴보았다.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는 도중에 돌아오고 의상 혼자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양주(揚州)에서 머물렀는데 얼마 후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 중국 화엄종 제2조) 문하에 들어갔다. 의상이 지엄을 찾아가기 전날 밤 지엄은 꿈을 꾸었다. 해동에서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넓게 퍼져 중국에까지 와서 뒤덮었다. 나무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었는데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가 하나 있어 그 광명이 멀리까지 비추었다. 꿈에서 깬 지엄은 귀인이 나타날 것을 알고 청소를 하고 기다렸는데 의상이 왔다. 지엄은 의상을 반갑게 맞이했다.

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현수법장(賢首法藏)과 같이 10년 남짓 화엄학을 공부했다. 지엄은 이론적 체계화에 뛰어난 현수법장에게는 문지(文持)라는 호를, 이론의 본질적 이해에 뛰어난 의상에게는 의지(義持)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의상은 종남산에서 남산 율종의 완성자인 도선과도 교유했다. 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익힌 화엄사상의 요체를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로 정리했다. 의상이 꿈속에 선재동자가 준 약을 먹고 자신이 터득한 오묘한 경지를 정리해 ‘십승장(十乘章)’ 10권을 엮었다. 이것을 본 지엄이 너무 번거롭다고 하자 의상이 불전(佛前)에 나아가 그 책을 불살랐다. 의상은 불길 속에서 타지 않은 글자 210자를 수습해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다. 화엄경의 방대한 사상을 7언 30구 210자로 요약한 그림이자 시다. 백지에 붉은 도장을 찍듯이 각을 만들고 그 안에 길을 내고 검을 글자를 써 넣었다. 미로찾기하듯 복잡한 길은, 잘 찾아가지 못하면 미궁에 빠질 것 같아 우리네 인생과 유사하다. ‘화엄일승법계도’는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둘이 없고(法性圓融無二相)’로 시작해 ‘옛부터 변함없는 그 이름 부처일세(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난다. 즉 법(法)에서 시작해 불(佛)에서 끝나는데 그 지점이 바로 출발한 곳이다.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도 꼭 우리네 인생 같다. ‘하나 중에 일체가 있고 일체가 하나이니(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고 일체가 곧 하나라네(一卽一切多卽一)’라는 표현은 모든 대립물간의 본질적인 무차별성을 의미한다. 즉 모든 개체는 절대평등하다는 의미다. ‘화엄일승법계도’는 210자의 글자를 54각(角)이 있는 도장처럼 만든 그림이다.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 ‘화엄일승법계도장(華嚴一乘法界圖章)’ ‘화엄법계도(華嚴法界圖)’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법계도장(法界圖章)’ ‘법성도(法性圖)’ ‘해인도(海印圖)’ 등으로도 부른다. 우리가 불교의식에서 읊는 ‘법성게’가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의 내용이다.

지엄이 입적한 뒤 현수법장은 중국 화엄의 제3조가 되고 의상은 귀국한다. 귀국 후 자신이 체득한 화엄사상을 펼칠 도량을 찾다 동해 낙산굴에 관세음보살 진신이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관음을 친견한다. 그 후 낙산사를 창건한다. 그의 관음신앙은 현세이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구도적 신앙으로 화엄경설에 토대를 둔 관음신앙을 더욱 확실한 기반 위에 정착시키고자 했다. 이때 의상이 관세음보살에게 기도한 내용이 ‘백화도량발원문’이다. ‘관세음보살님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마 위에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것처럼 저희 또한 관세음보살님을 정수리 높이 모시고자’ 하는 의상대사의 신앙고백이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은 출가사찰인 황복사에서 화엄교학을 강론한다. 그 후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해동화엄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부석사에는 당시 폭넓게 수용된 아미타불을 모시고 화엄을 강술했다. 의상이 주도한 신라화엄사상은 중국과 달리 화엄사상과 정토신앙이 일치되어 실천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후 화엄사상을 선양하기 위해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등 화엄 십찰을 건립한다. 이 밖에도 불영사, 삼막사, 초암사, 홍련암 등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의상은 원효처럼 많은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으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원효가 세속에 들어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민중교화에 나섰다면 의상은 대조적으로 조용하면서도 차분하게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매진했다. 그에게는 3000명 이상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유명했던 사람으로 오진, 지통, 표훈, 의적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는 빈민 출신의 진정, 귀족 가노 출신의 지통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를 받아들였다. 중국에 있는 현수법장은 의상을 매우 존경하여 그의 저서 ‘화엄경탐현기’를 보내 비판을 구하였다. 의상대사는 효소왕11년(702) 3월에 입적했다.

거대한 용이 거친 바다를 헤엄쳐가고 있다. 그의 뒤로는 스님이 탄 배가 보인다.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인가? 반야용선도는 아미타여래와 권속 보살들이 왕생자를 용선에 태워 서방정토로 인도해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때 용선은 배의 앞이나 뒤에 용의 머리나 꼬리를 그리는가 하면 배 전체를 용의 모습으로 그린다. 반야용선이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 정토에 이르게 하는 배인 만큼 불보살이 함께 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창기 반야용선도에는 아미타여래와 관음보살, 세지보살, 인로왕보살, 지장보살이 함께 등장했다. 이들 권속 중 일부만 등장한 경우도 있다. 후대에는 배 중앙에 아미타여래가 앉아 있는 가운데 인로왕보살이 배의 앞에서 번이나 삿대를 들고 인도하고, 지장보살은 배의 뒤에서 호위하는 도상으로 정착된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의 배는 용선은 용선이되 불보살이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용과 배는 따로따로다. 용이 배를 호위하는 것 같다. 그렇다. 용은 선묘낭자가 변한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당에 도착한 의상은 그곳에서 선묘낭자를 만났다. 선묘낭자는 의상대사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했다. 저렇게 잘 생긴 남자와 한평생을 살 수 있다면 내 인생은 행복으로 충만하리라.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꽃이 활짝 핀 정원에서였다. 의상이 대답했다.

“나는 목숨을 걸고 계를 지키고 있소. 불법의 힘으로 중생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오. 색욕의 세계는 이미 버렸으니 부디 나를 원망하지 말기를 바라오.”

분명한 거절이었다. 그런데 수치심과 모멸감도 잠시. 선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단호함 속에 한없는 연민을 담은 의상의 눈빛을 보자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듯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꿈에서 깨어 보니 자기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스님이었다. 순간 소유욕과 갈애로 출렁거리던 마음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함의 세계는 넓고 깊었다. 허공 같은 마음에 한 조각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어른거리지 않는 적멸의 세계였다. 눈빛 한 번에 걷혀지는 번뇌의 세계라니. 묘하고 묘했다. 선묘는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고백했다.

“다시 태어나도 스님께 귀의해 그림자처럼 따르며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의상은 선묘를 뒤로 하고 장안으로 떠난다. 몇 년 후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를 마친 의상은 귀국선에 오른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전해들은 선묘는 선물을 상자에 담아 항구로 달려간다. 그러나 그녀가 당도했을 때는 배가 이미 떠난 뒤였다. 어떡해야 하나.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한동안 해변을 서성거리던 선묘는 결심한 듯 상자를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저는 오래 전에 스님께 귀의하기로 결심한 몸입니다. 그러하오니 이 몸이 변하여 용이 되어 스님이 탄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스님의 법이 전해질 수 있게 해 주소서.”

이것이 사랑을 거절당한 여인이 할 수 있는 기도일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사랑이다. 기도를 마친 선묘는 바다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녀의 기도에 하늘도 감동한 것일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그녀의 몸이 용으로 변한 것이다. 그녀의 도움으로 의상이 탄 배는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한 후 영주에 화엄도량을 세우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방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의상 앞에 어느 날 다시 선묘가 나타났다. 선묘는 큰 돌이 되어 공중에 떠올라 방해자들을 쫓아버렸다. 그 모습에 놀란 방해꾼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의상은 무사히 도량을 완성한 후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지었다.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 ‘의상회(義湘繪)’는 일본에서 제작된 에마키(繪卷:가로로 긴 두루마리 그림)다. 고산사(高山寺)를 창건한 묘에(明惠,1173~1232) 스님의 지도로 제작되었다. 묘에 스님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묘에 스님은 1206년에 고산사를  화엄종 사원으로 부흥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화엄종조사회전’을 제작하게 된 것도 고산사 부흥의 일환이었다. ‘화엄종조사회전’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현재는 모두 7권으로 복원되었는데 화엄종을 중국에서 신라에 전한 의상대사의 ‘의상회’ 4권과 원효대사의 ‘원효회’ 3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의상회’와 ‘원효회’는 그림을 풀어가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원효회’가 원효대사의 생애 전반에 걸친 구법과 전법 활동에 맞춰 전개된다면 ‘의상회’는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낭자의 숭고한 사랑이 중심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선묘낭자가 의상대사로 대표되는 화엄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산사의 별원인 선묘사가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을 위한 비구니 절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구니들이 선묘처럼 수행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 묘에 스님이 ‘의상회’를 선묘낭자 중심으로 꾸몄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선묘낭자는 지금까지도 부석사의 선묘각과 고산사의 선묘사에서 의상대사와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선묘낭자의 설화는 지어낸 이야기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허구적인 이야기라도 산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허구가 아니다. 선묘낭자의 헌신적인 사랑은 의상대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문무왕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완성하자 그 공을 치하하여 토지와 노비를 주고자 했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이 모든 배려를 물리치고 청정한 수행자로 살았다. 청렴한 수행자는 재물을 탐하지 않는다. 사랑받는 사람은 함부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빈민 출신 제자 진정(眞定)이 모친상을 당하였다. 진정은 집이 가난하여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했는데 출가한 지 3년 만에 부고가 날아왔다. 슬픔과 추모의 마음을 견디기 힘들었던 진정은 7일 동안 선정에 들어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선정에서 나온 후 그 일을 의상대사에게 아뢰니 의상은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에 가서 진정의 어머니를 위해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했다. 제자의 마음을 헤아린 배려다. 사랑받는 사람은 남의 슬픔을 모른 체하지 않는다. 사랑받는 사람은 동체대비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강의를 다 마치자 진정의 어머니가 진정의 꿈에 나타나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했다”고 말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설법하는 모습으로 끝나는 ‘의상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불법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사는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생각하면 두 사람이 남긴 업적보다 요석공주와 선묘낭자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두 사람이 여인을 대하는 태도는 극과 극이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를 만나 파계하고 설총을 낳았다. 의상대사는 선묘낭자를 만나 파계 대신 지계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다. 한 사람은 움직였고 한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한 지점에서 만났다. ‘법(法)’으로 시작해 ‘불(佛)’로 끝난 ‘화엄일승법계도’가 한 지점에서 만난 것과 같다. 왜 그럴까. 원효대사는 파계를 했으나 법을 떠난 적이 없었으니 파계라 할 수 없다. 의상대사는 욕정은 거부하되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알게 했으니 그녀의 부처가 되었다. 원효대사도 의상대사도 모두 ‘불’과 ‘법’ 안에서 살았다. 두 사람의 삶은 ‘진리의 성품은 깊고 지극히 미묘하여(眞性甚深極微妙) 자성을 지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不守自性隨緣成)’는 ‘화엄일승법계도’ 안에 있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두 사람이 모두 불법의 진리를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인 진리 말고 진짜 진리 말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5
호 / 2015년 8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