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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국전쟁 전후의 사찰림

전쟁 혼란기에도 사찰 숲 보호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 통도사 극락암 들머리 솔숲.

광복 이후 사찰림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문서는 없다. 몇몇 단편적인 기록으로 광복 이후와 한국전쟁 전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찰림에 대한 자료가 일제강점기보다 광복 이후에 오히려 더 빈약한 형편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일제가 남겨 논 자료 보다
사료로 남은 자료 더욱 빈약

전시의 회의록과 기사 통해
사찰 숲 도·남벌 확인 가능

식민지 수탈로 피폐한 산하
그마나 보전된 목재 비축지

정부 또한 전쟁 상황에서도
사찰 숲 지키기 위해 노력

광복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의 시기에 사찰림에 관한 정부의 공식 자료는 1949년 관보, 1952년 부산 임시수도에서의 국무회의록, 1954년 정부 공문이 있고, 그 이외에는 몇몇 신문기사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 부산 대통령 임시관저에서 1952년 4월8일 개최된 27회 국무회의록.

먼저 광복 이후의 사찰림 상황을 신문기사로 살펴보자. 1947년 12월10일자 동아일보는 ‘양주군 백석면 고령산의 보광사 사찰림 도벌’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기사는 경기도 농무국장이 사찰림 벌목을 불허했는데도 수도경찰학교의 땔감용으로 보광사의 수백 년 된 사찰림이 불법으로 벌채되어, 백석면 주민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는 내용이다. 해방 후 사회적 혼란기에 사찰림을 탐내던 권력기관이 적잖았고, 오히려 면민들이 사찰림을 지키고자 발 벗고 나섰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다.

보광사의 불법 벌채와 달리, 정부의 허가 아래 사찰림 벌채가 이루어진 사례도 있다. 1949년 1월27일자 관보 2쪽에는 ‘사찰림 벌채허가 사항’이란 제목으로 수종사 사찰림에 대한 벌채허가 내용이 실려 있다. “사찰령 5조에 의하여 사찰림 벌채를 左와 같이 허가함. ‘1949년 1월11일 수종사 소유 송촌리 산26-1(20정보), 시우리 산38(138정보), 진중리 산1-1(131정보)에서 적송(20년생 이상) 255,000본, 잡목(15년생 이상) 170,000본 등을 택벌로 벌채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이다.

관보에 등재된 이 ‘사찰림 벌채허가’ 양식은 일제강점기의 벌채허가원 양식과 유사하며, 벌채허가의 근거로 ‘사찰령 5조’를 들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적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벌채 목적이나 신규 산림조성 방법 등이 첨부된 일제강점기의 벌채허가원과 달리 이 관보에는 벌채 허가사항만 기재되어 있어서 벌채 후의 조림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는 점이 아쉽다.

한국전쟁 중에 사찰림에 관한 기록은 국무회의록에서 찾을 수 있다. 1952년 4월8일 부산 대통령 임시관저에서 개최된 27회 국무회의록에는 2건의 보고안건에 이어 대통령의 첫 유시내용은 “통도사, 범어사 등 사찰림 벌목자는 엄벌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통도사와 범어사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전시 상황에 대통령은 하고많은 일들 중 사찰림 벌목자를 ‘엄벌’하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일까?

1952년 4월11일자 동아일보에는 대통령의 유시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벌목으로 또 말썽, 범어, 통도 양사에 메스’, ‘문교부 직원 등 9명을 구속’이란 제목 아래, 산불로 인해 못쓰게 된 화목의 벌채를 허가했지만, 벌목한 나무는 화목이 아니라 오히려 멀쩡한 생나무가 대부분이었고, 이에 관여한 관계자 9명(통도사 4명, 범어사 4명, 문교부 직원 1명)이 구속되었다는 기사다.

전시의 국무회의록과 신문기사를 통해 전쟁 중 혼란기에 사찰림 도벌과 남벌이 빈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통도사와 범어사에서 허가 외의 벌목행위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 통에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 온 난민들을 위한 판잣집용 목재수요가 급증했고, 부산 인근에 자리 잡은 두 사찰은 판자 공급에 필요한 울창한 솔숲을 보유하고 있었던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불법 벌채행위의 논죄는 당연할지라도,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전시 상황에서 목재 비축기지 구실을 담당했던 사찰림의 존재 가치조차 부정할 필요는 없다.

전쟁이 끝난 후 사찰 숲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고 있는 기록 역시 많지 않다. 문교부 장관이 서울특별시장과 각 도지사에게 보낸 1954년 8월24일자 ‘사찰림 벌채허가에 관한 건’ 공문을 통해서 그 당시의 사찰림에 대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조금 길지만, 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사찰림 벌채허가에 관하여는 현금(現今) 일반 사유림 벌채허가와 동일히 먼저 임야 시업안을 제출한 후 시업안에 대한 농림부장관의 승인이 있는 것에 대하여 서울특별시장 및 각 도지사가 그 벌채를 허가하고 있는데 원래 사찰재산(임야 및 입목포함)은 문교부장관의 허가 없이는 이를 처분 못하도록 되어 있은즉슨 황폐독산(荒廢禿山)화 한 우리나라 임야 중에서 겨우 사찰임야 만은 이제까지도 울창한 호 임상을 보유하고 있음은 오로지 사찰의 특수성과 사찰재산에 대한 행정감독청의 엄격한 감독에 유인(由因)한 것으로 사료하는 동시에 더욱 그 보호유지가 요청되는 것”이다.

각 도에 하달한 문교부 장관의 공문을 통해서 1) 사찰림 주관부처가 1954년도에도 일제강점기처럼 문교부였고, 2) 벌채는 시업안 승인 절차가 필요하며, 3) 농림부 장관의 시업안 승인만으로 벌채가 빈번했고, 4) 전화(戰禍)로 국토가 헐벗었을 때, 사찰림 만이 잘 보전된 이유는 사찰과 행정관청의 노력 덕분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이 공문을 바탕으로 강원도지사가 각 지방 교육감에 보낸 1955년 4월10일자의 공문, ‘사찰림 벌채처분에 관한 건’도 그 당시의 상황을 참고할 수 있다. “금후로는 사찰 재산의 소모방지와 임상 보호유지를 위하여 사찰림 벌채처분 허가는 극도로 제한하여 좌기 요건에 해당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불허 방침”이며 “사찰 풍치림으로 사찰건물 중심으로 20정보는 원칙적으로 벌채 처분함을 금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공문에 언급한 좌기의 요건은 첫째 전화(戰火), 산화(山火)에 의한 고사목 및 송충의 피해를 입어 소생할 가능성 없는 임목, 둘째 사찰 건물과 지정 국보·고적이 심히 퇴락 또는 파손되어 이의 보수에 있어 사찰림을 벌채하는 이외에는 도저히 보수비를 염출할 방도가 없는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풍치보전을 위해 사찰 주변 20정보의 벌채금지 원칙이 세워졌고, 전쟁이나 병충해로 인한 고사목과 사찰 건물과 국보·고적의 보수비 충당을 위한 벌채는 예외적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에 비추어볼 때, 환금성 자산인 사찰림을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욕구가 전후 궁핍했던 시기에 상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세태를 반영하듯 사찰림 벌채에 대한 신문 기사는 계속 이어진다. 동아일보 1955년 5월19일자는 청도 운문사 사찰림을 벌채한 목재업자가 부서진 다리 수리를 위해 면민들을 강제 부역시킨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같은 신문 1955년 6월19일자는 사찰림 일부에 대한 위조 벌채허가 서류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사찰림에 대한 도남벌이 난무했던 시대상을 반영이라도 하듯, 1956년 1월7일자 동아일보는 ‘치안국에서 사찰림에 대한 무허가 벌채를 막고자 전국 사찰의 산림조사를 실시한다’는 기사도 실려 있다.

일제강점기 비상금고 구실을 했던 사찰림은 식민지 수탈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하에 그나마 온전하게 보전된 목재 비축기지였다. 온갖 부정부패가 난무하던 사회적 혼란기에 사찰 숲이라고 해서 그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숲을 만들고 지킨 주체도 사람이었고, 그 숲을 옳게 또는 그릇되게 이용한 주체도 사람이었지 숲의 의지는 아니다.

사찰림의 존재 덕분에 피난민들은 그 엄혹한 시기에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사찰 역시 퇴락한 건물이나 유서 깊은 문화재를 보수 유지할 수 있었다. 가난하고 궁핍했던 시절, 국가가 감당해야 할 책무의 일정 부분을 사찰림이 감당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전영우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ychun@kookmin.ac.kr


[1305
호 / 2015년 8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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