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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를 살더라도 멸빈자 굴레 벗었으면…”

  • 교계
  • 입력 2015.08.17 09:44
  • 수정 2015.08.18 13:15
  • 댓글 56

94년 멸빈 불국사 전 주지 종원 스님

94년 종회 참석차 상경했다
무심코 빌려준 카드 때문에
폭력배 동원 의심 받아 징계

초심호계원, 조사 없이 ‘제적’
억울함 호소하며 재심 청구
재심선 ‘공권정지 1년’ 경감

징계 확정되자 주지서 면직
소송제기하자 다시 징계회부
초·재심서 ‘체탈도첩’ 확정

▲ 1994년 개혁회의로부터 멸빈을 당한 불국사 전 주지 종원 스님이 21년만에 처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말주변도 없고, 그 때 일은 잘 기억을 못해요. 괜한 분란만 일으키게 될지도 모르는데….”
불국사 전 주지 종원 스님은 인터뷰 제안에 한동안 머뭇거렸다. 자신의 일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종원 스님은 1994년 9월 개혁회의로부터 체탈도첩(멸빈)된 이후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포항의 한 암자에서 두문불출하며 기도로 삶을 이어왔다. 21년간 자신의 이야기를 외부에 공개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그랬던 스님이었기에 언론과의 인터뷰를 망설였는지도 몰랐다. 거듭된 설득 끝에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스님을 만났다.

올해로 팔순을 맞은 스님은 지금도 어디를 갈 때면 홀로 바랑을 메고 다닌다고 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물음에 “지금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새벽예불로 일과를 시작하고 하루 세 번 직접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스님이 열여섯 나이에 출가해 60년이 넘도록 거르지 않고 지켜온 규칙이기도 했다. 간단한 인사에 이어 본격적으로 1994년의 일을 묻자 스님은 깊은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한 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 때 일은 솔직히 기억을 잘 못합니다.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만, 나이를 먹다보니…. 세세한 것은 법원에 냈던 자료들을 보면 정확히 알겁니다. 이렇게 바보 같으니까 징계를 당한 것 아니겠습니까.”

스님은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자책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 일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탄식에 가까웠다. 종원 스님에게 1994년은 결코 잊어질 수 없는 과거였다. 스님으로 살고 싶어 출가를 했고, 평생 스님으로 살아왔지만 1994년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렇기에 잘못 꿰진 첫 단추를 찾아 바로 잡는 것은 스님이 삶을 회향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마지막 일이기도 했다. 스님은 애써 기억의 퍼즐을 한 조각 한 조각 맞춰나갔다.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기억의 빈틈은 소송자료로 채웠다.

▲ 종원 스님은 비록 억울한 징계를 당했지만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1952년 만암 스님에게서 받은 도첩이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되지 않게만 해주면 여한이 없겠다”고 말했다.

1994년 3월28일 오후, 그날도 스님은 바랑을 메고 홀로 상경했다. 3월30일 예정된 임시중앙종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스님은 불국사 주지와 중앙종회의원을 겸직하고 있었다. 임시종회에서는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이 안건에 올라 있었다. 종단 안팎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혼란스러웠지만 스님은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단 정치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여겼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해요. 난 머리도 나쁘고 그런 쪽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아요. 그날도 그냥 종회를 한다고 해서 갔을 뿐이었어요.”

그날 밤 스님은 조계사 인근의 서울관광호텔에서 묵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복도에서 우연히 전 분황사 주지 도오 스님과 호텔영업부장을 만났다. 도오 스님은 다짜고짜 방값에 대한 보증을 요구했다. 종회의원 스님들을 위해 방을 많이 얻어야 하는데 총무원에서 나중에 돈을 준다고 하니 우선 신용카드로 지급 보증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결제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영업부장의 말을 믿고 선뜻 카드를 빌려줬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이 카드가 스님에게 출가자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게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3월29일 조계사에서는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의현 총무원장 측이 동원한 폭력배들이 조계사에서 농성 중인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 스님들을 집단 폭행한 사건이었다. 세상은 들썩였다. 언론들은 폭력배들의 행방을 추적했다. 한겨레신문은 4월1일 이들이 서울관광호텔에서 묵었고 그 숙박비를 총무원이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종원 스님이 도오 스님에게 빌려준 신용카드가 숙박비로 이용됐다는 보도도 나왔다.

스님은 영문도 모른 채 폭력배를 동원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경찰조사까지 받는 수모를 겪었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장시간 조사를 받았지만 혐의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불국사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경찰조사 결과 종원 스님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오해가 풀렸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의현 총무원장이 물러나고 개혁회의가 출범했다. 개혁회의는 해종행위자를 색출하겠다며 대대적인 징계에 착수했다. 그 가운데 종원 스님도 포함됐다. 개혁회의는 6월8일 초심호계위원회를 열어 종원 스님에게 ‘제적’의 징계를 내렸다. 개혁회의가 스님에게 적용한 징계사유는 4가지였다. △불국사 법인카드로 폭력배들의 숙박비 지원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지지 △1991년 10월 강남총무원에 1억8000만원 지원 △1993년 7월 폭력배를 동원해 전 분황사 주지 도오 스님을 폭행한 혐의 등이었다.

▲ 종원 스님이 강모 서울관광호텔 영업부장으로부터 받은 사실확인서.

그러나 스님은 징계사실을 알지 못했다. 얼마 뒤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개혁종단으로부터 제적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뭘 잘못했는지 몰랐다. 경찰조사에서 무혐의로 밝혀진 카드문제도 그렇고, ‘강남총무원’과 ‘도오 스님 폭행사건’은 자신과 무관한 일들이었다. 모두 불국사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A스님이 주도한 것들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A스님은 불국사의 맹주로 불렸다. 조실 월산 스님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종원 스님은 월산 스님의 맏상좌였다. 그러나 스님이 줄곧 해인사 등 다른 문중의 사찰에서 살았던 탓에 월산 스님은 A스님을 더 의지했다. 그 스님은 불국사 인사와 재정, 행정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종무행정을 움켜쥐고 있었다. 종원 스님이 1985년 불국사 부주지, 1988년 중앙종회의원, 1991년 불국사 주지 등을 차례로 맡게 된 것도 모두 A스님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런 까닭에 종원 스님은 비록 주지였지만 권한이 별로 없었다. 불국사 안팎에서는 ‘명자 주지’ ‘원주 주지’라는 조롱 섞인 말들이 회자될 정도였다. 강남총무원 지원금도 당시 A스님의 요구에 의해 분담금 명목으로 납부된 돈이었다. 그럼에도 개혁회의는 이 모든 책임을 종원 스님에게 돌렸다.

징계 소식을 접하고 스님은 뭐부터 해야 할지 망설였다. 카드 사건부터 해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서울관광호텔 영업부장을 만났다. 억울함을 호소하자 영업부장은 ‘도오 스님이 숙박료 보증을 요구해 카드를 빌려준 것’이라는 사실확인서를 써줬다.

스님은 사실확인서를 재심호계원에 제출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재심호계원은 7월15일 종원 스님의 징계를 ‘공권정지 1년’으로 감경했다. 형량이 줄어든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자신이 왜 ‘공권정지 1년’을 받아야 했는지 알지 못했다. 종원 스님의 재심징계결의서는 초심징계결의서와 토시하나 틀리지 않았다. 똑같은 징계사유인데도 초심에서는 ‘제적’, 재심에서는 ‘공권정지 1년’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불국사 주지를 바꾸기 위한 의도적인 징계라는 얘기도 나왔다.

실제 종원 스님은 재심호계원의 징계확정으로 불국사 주지에서 물러나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개혁회의는 즉각 설조 스님(개혁회의 부의장)을 주지로 임명했다. 하지만 종원 스님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임기 6개월여를 앞두고 징계로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여기저기 얘기했지만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스님의 억울함을 들어줄 곳은 결국 법원밖에 없었다. 스님은 ‘주지직권면직 무효확인’ ‘주지지위보전가처분’ ‘사찰진입금지가처분’ 등을 제기했다. 소송은 상좌이자 재무국장이었던 삼현 스님 등이 중심이 돼 진행했다.

징계의 덫을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칼날은 더욱 스님을 옥죄였다. 개혁회의는 종원 스님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다시 징계에 회부했다. 징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8월24일 초심호계원은 스님에 대해 승가의 최고 징계이자 세속의 사형제도에 해당하는 ‘체탈도첩’을 선고했다. 곧이어 재심호계원도 9월15일 초심과 같은 ‘체탈도첩’을 결정했다.

스님은 망연자실했다. 어떻게 이런 일로 체탈도첩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간 스님은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 금정선원을 찾았다가 월산 스님을 만나 출가했던 일, 금정선원에서 금오, 청담, 효봉, 성철, 홍경, 석주 스님 등을 시봉했던 일, 성철 스님으로부터 ‘종원’이라는 법명을 받았던 날 너무 좋아서 껑충껑충 뛰던 일, 운허 스님과 지관 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배웠던 일, 만암 스님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은 일 등 행자 때부터 스님으로 살았던 45년의 출가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러나 체탈도첩이라는 징계는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승려로서 살아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소송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새 주지 측은 불국사를 접수하기 위해 용역을 동원했다. 폭력사태가 예견됐다. 스님은 더 이상 버틸 의지도 여력도 없었다. 후임 스님이 자신보다 불국사를 더 잘 운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종원 스님은 개혁회의 측에 사퇴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10월 초 스님은 상좌를 통해 ‘10월30일부로 주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사직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새 주지 측은 “지금 당장 물러나야 한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리곤 10월12일 밤 새 주지 측은 100여명에 가까운 용역을 앞세우고 불국사를 강제 접수했다. 폭력배들의 진입에 놀란 스님은 불국사를 빠져나왔다. 그것이 불국사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종원 스님이 1952년 당시 종정 만암 스님으로부터 받은 도첩. 스님은 이 도첩을 자신의 몸처럼 아낀다고 말했다.

스님은 인터뷰 내내 긴 한 숨을 내쉬고는 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21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 건 팔순 노스님에게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한참 만에 다시 말문을 열었다.

“다 지나간 일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는 않아요. 제가 어리석어 그런 것 아니겠소. 그렇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제게는 제 몸처럼 아끼는 것이 하나 있어요. 1952년 만암 스님에게서 받은 도첩이 쓸모없는 종잇조각이 되지 않게만 해주면 여한이 없겠어요. 그렇게 해 줄 수 있을까요?”

1994년 종단개혁은 종단의 곪은 상처를 덜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덜어내지 않아도 되는 살점까지 베어내 더 큰 상처를 남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법장 스님과 지관 스님 등 여러 총무원장 스님을 거치며 여러 차례 사면 논의가 있었던 것도 그 상처를 감싸 안고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94년 멸빈자들 중 일부는 세상을 떠났으며, 남아있는 이들도 세수로 80을 넘기고 있다. 그들 생전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번 사면논의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 지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 종원 스님은 자신의 도반이자 1994년 함께 멸빈된 전 원로회의 사무처장 원두 스님과 사진촬영을 했다.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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