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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 법사

“마음 밭 일구는 불사에는 은퇴란 없습니다”

▲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 법사는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정진한다면 항상 청년과 같은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강조했다.

“씨앗 한 알 속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고 했다. 지금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훗날 거목이 될 엄청난 잠재력과 희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 점 먼지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다 한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거대한 우주를 품은 씨앗 한 알, 먼지 한 점이지만 시절인연 도래하지 않으면 그저 한 알의 씨앗, 한 점 먼지에 머물 뿐이다. 끊임없이 가꾸고 돌보아야 본래 가진 그 무한한 가능성이 빛을 보게 되는 이치이다.

1959년 호미 든 관음상 모시고
불법 전하는 ‘포교수행자’ 발원
대한불교청년회장 등 역임하며
만해백일장 등 불교대중화 기여

김해 봉화산 꼭대기에는 호미를 손에 쥔 관세음보살님이 서 계신다. 호미는 우리 민족에게 생존의 도구이자 상징과도 같다. 그러한 호미를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님이 쥐고 계심은 필시 마음 밭 갈아 자성의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김을 매듯 탐진치(貪瞋癡) 캐내라는 메시지일 터. 그러한 가르침 받들어 관세음보살의 손과 눈이 되어 중생의 마음에 자리한 불성이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돌보는 불자가 있다. 바로 봉화산 정토원장 선진규(82·봉산) 법사다. 불 밝혀 위험을 알리는 봉화와 같이 무명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이 되겠다(烽山)는 발원과도 같은 법명처럼 선 법사는 지난 60여년간 쉼 없이 전법의 길을 달려왔다. 정토원을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는가 하면 조계종 상임포교사, 조계종 전국신도회장, 대한불교청년회장 등을 맡아 불교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앞장섰다.

삶이 이러했으니 선 법사에게서 부처님 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주변의 평가가 켤코 허언은 아닌 듯싶다. 손안식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지도위원은 “원력과 신심으로 재가불교운동을 위해 달려온 선배”라며 선 법사의 삶에 존경을 표했다. 손 위원은 “팔순의 나이에도 청년불자 못지않은 뜨거운 열정으로 포교를 위해 공부하고 정진한다”고 말했다. 관음종 총무원장 홍파 스님은 한국불교 근대사에 획을 그은 지도자라고 한 발 더 나아갔다. “무진장 스님과 함께 현대 한국불교 포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고 했다. 스스로 한 손에는 경전을 들고 다른 손에는 호미를 들어 청년불교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등 현대불교사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어린 시절 선 법사의 꿈은 출가수행자였다. 봉화산자락 장방마을이 고향인 그는 할머니 치맛자락 붙잡고 정토원을 올랐다. 부처님과 인연은 그렇게 자연스러웠다. 또래보다 큰 키에 잘생긴 외모, 공부도 잘했고 고통 받는 친구들을 형제처럼 돌봤으니 항상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북적였다. 그런 그가 돌연 속세를 떠나 출가자 되기를 발원하게 된 것은 피비린내와 죽음의 공포 가득한 전쟁을 겪으면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할머니는 대(代)가 끊길까 중학생인 그를 미군에 입대시켰다. 피난길에 죽임을 당하거나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느니 차라리 미군에 들어가면 어떻게든 목숨은 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미군 보급부대에 투입된 그는 1년간 전쟁의 한복판에서 죽음과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 역시 수십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지금도 왼쪽 볼엔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다. 귓전을 때리던 포성이 멈추고 다시 학생 신분을 되찾았지만 예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버려진 듯 방치된 시체들, 피 흘리며 고통에 울부짖던 그 끔찍한 모습들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항상 전쟁 복판에 있었던 셈이죠. 그래서인지 일상은 언제나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어요. 그러다 문득 생사를 초월해 진리를 구하는 스님들의 삶은 어떨까하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무작정 상경해 조계사로 향했다. 그리고 가장 처음 본 스님에게 출가하겠다고 발심했다. “그러자”하며 받아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스님은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뚫어지게 얼굴만 바라봤다. 그러더니 휙 돌아서며 “출가를 하려거든 하던 공부나 마치고 오라”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한 마디를 더했다. “꼭 스님이 되겠다면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해 공부하라”는 당부였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이 스님은 동국대 초대총장을 지낸 권상로 스님이었다.

 
1955년 동국대 불교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불교학과에 입학했으니 이제 스님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확신했다. 실제 출가도 감행했다. 3학년 되던 해, 합천 해인사로 입산해 삭발염의하고 강원에서 대중생활을 했다. 그러나 행자생활은 그리 오래지 않아 접어야 했다. 그를 동국대 총학생회장으로 점찍어둔 백성욱 총장이 학교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의 사회적 혼란은 대학캠퍼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선 영역별로 리더가 필요했고, 학생 중에는 ‘선진규’ 만한 이가 없다는 게 당시 백 총장의 판단이었다.

선 법사는 대학 1학년 봄 전국웅변대회에 출전해 특상을 거머쥐었다. 출가를 위해 입학한 동국대에서 불교대학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통이 터진 나머지 학내 시선을 바꾸겠다며 단행한 일이었다. 실제 이 일로 선 법사는 학교 내에 유명인사가 됐고, 불교대학을 다시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런 연유로 불교학자였던 백 총장은 그를 염두에 두었다가 그가 3학년이 되자 총학생회장으로 전격 임명한 것이다.

“학교 관계자들이 동생까지 데려와 사정을 하는데 매몰차게 돌아가라 할 수가 없었어요. 사정을 말씀드린 후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해인사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죄송하다는 말씀도 드리기 전에 총장님이 너무 절절하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대학의 가장 어른이자 초대 내무장관까지 지내신 분이 부탁을 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는 거예요. 거기다 총장님이 직접 ‘금강경’을 가르쳐 주겠다 하시지 뭡니까. 그 말에 혹해 다시 대학을 다니게 된 겁니다.”

삭발한 채 교복을 입고 대학을 다니는 동국대 총학생회장 선진규는 ‘남산대사’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금세 서울 대학가에 유명인사가 됐다. 불연(佛緣)은 항상 이어졌지만 출가인연은 딱 거기까지였다. 대학총학생회장 모임에서 평생도반 ‘김기업’ 여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결혼과 함께 ‘출가수행자’의 삶은 포기했지만, ‘포교수행자’가 되겠다는 새로운 발심을 세웠다. 보릿고개를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시절, 그는 소설 ‘상록수’를 떠올렸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농촌을 계몽하겠는 발원을 세워 낙향했다.

그길로 정토원을 찾았다. 정토원은 어린 시절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였으나 활엽수 가득했던 봉화산은 풀 한포기 살 수 없는 민둥산으로 변해있었다. 백성욱 총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뻔한 살림이었지만 백 총장은 제자를 위해 선뜻 35만원(현재 가치로 약 1200만원)이란 거금을 내놓았다. 그 만큼 제자인 선 법사를 아꼈으리라. 선 법사는 그 돈으로 정토원을 비롯한 주변 토지 3만5000평을 사들였다. 그리고 봉화산 정상에 동국대 불교학도 31명과 함께 조성한 호미 든 관세음보살님을 봉안했다.

“호미 든 관음성상은 한국전쟁이 갓 지난 1959년 4월5일 봉안됐습니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사회는 혼란스럽고, 자유당 독재에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는 가난의 고통 속에 불교계는 비구·대처간 싸움이 계속될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 31명의 청년 불자들이 신심개발, 사회개발, 경제개발, 사상개발 등 4대 개발을 목표로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호미는 4대 개발 발원을 함께 일구어 캐내겠다는 다짐이며 상징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식목과 개간 그리고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정토원 개발에 동참해 식목을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어려운 형편에도 선 법사는 5차에 걸쳐 주변 민둥산을 개간했고, 24만평의 사찰 토지를 확보했다. 또 위대한 선각자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불교도들의 귀감이 되도록 서산대사와 만해 스님의 동상도 세웠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포교활동에 매진하던 그에게 더 넓은 세상에서 원력을 펼칠 계기가 찾아왔다. 1972년 조계종 중앙 상임포교사로 발탁된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에 근무하며 대한불교청년회장을 맡게 된 그는 만해 스님 선양을 통해 본격적으로 불교 저변 확대에 돌입했다. 만해백일장을 처음 기획해 개최하고 강연회와 세미나를 연이어 마련했다. 또 설법회 개최와 찬불가LP 제작 등 불교 대중화를 위한 사업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6개 지회에 불과했던 대한불교청년회는 3년만에 240개 지회로 확대됐다. 획기적인 변화였다.

1983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정토원으로 돌아온 그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불교 미래를 위한 새로운 포교에 입재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가 그것이다. 선 법사는 봉화산 청소년수련원을 건립해 어린이·청소년들을 위한 한문서당과 예절서당을 시작했다. 또 ‘봉화산 청소년 축제’를 열어 어린이·청소년들이 끼와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선 법사의 이러한 노력으로 불교에 기반한 한문서당과 예절서당은 문화관광부로부터 청소년 인성교육프로그램 최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 법사는 부처님 가르침을 나누듯 한문서당과 예절서당 프로그램 역시 원하는 곳 어디나 무료로 보급하고 있다.

항상 새로운 대중포교운동의 모델을 지향하는 선 법사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자평했다. 그저 눈감는 순간까지 발원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직접 고안해 제작한 연꽃 봉우리 모양의 배지(badge) 보급운동을 시작했다. 현재의 불교를 강렬한 믿음과 피어나는 포교활동을 통해 새로운 불교로 중흥시키자는 의미를 담았다.

“무슨 일이든 뚜렷한 목표를 세워 배우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포교의 방법도 변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공부하고 배우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죽을 수도 늙을 수도 없습니다. 항상 청년과 같은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비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우다나’에서 자신의 길을 가는 즐거움을 노래했다. ‘누구처럼 살 것도 없고, 누구처럼 되고자 애쓸 것도 없이, 다만 ‘나 자신’이 되어 나의 길을 걷는 것이 즐거움이다.’ 포교를 위해 길을 나서는 선진규 법사 뒤로 정토원 대숲이 보인다. 숲을 이룬 대나무 한 그루 한 그루는 선 법사의 마음이다. 맑은 기운 머금은 대나무 숲이 부처님 법 만나 일으킨 바람은 세상을 맑게 하고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1306호 / 2015년 8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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