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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하

“숲과 바다, 바람에 국가적 경계가 없다는 건 희망의 징표”

▲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의 티베트 고원. 그럼에도 티베트 사람들은 야크를 방목하면서 자연과 상생하는 방법을 깨달았다. 영하 15도의 혹독한 날씨에도 야크들이 한가로이 마른 풀을 뜯고 있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굶주리고 있는데 반해 선진국들은 그들의 해로운 관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행위의 전 세계적 맥락을 인식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자제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앞으로 우리가 볼 수 없는 동물이나 식물은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곰과 산여우, 늑대와 아름다운 눈표범, 스라소니 등 동물들은 불과 수십년 전만 하더라도 티베트 산하 어디에서든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애석하게 이 야생 생물들은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일부 사냥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주로 서식지의 상실 때문입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한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이전에 비해 매우 적은 일부분만이 서식지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거듭 지적하고자 합니다. 이는 반세기만에 일어난 위태로운 일입니다. 티베트는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깨끗하고 건조한 공기와 맑은 산속의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광활한 지역에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비록 인간이 적응하기에 척박하고 혹독한 자연환경이었지만 적절히 절약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부족함이 없이 적응해 동물들과 상생했습니다. 자연의 청정함에 대해 이런 순박하고도 절제된 태도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도 다람살라 망명지에서 마실 수 없는 시냇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에게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상품제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긴밀하고도 절실하게 필요하게 됐습니다. 목재와 기타 한정된 자연 자원의 사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를 실현시킬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필요한 결연한 의지와 원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만 가능할 것이라는 진리와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몇 해 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을 방문했을 때 수년 만에 처음으로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으로 물고기가 돌아오고 있다고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최근까지는 산업공해로 인해 물고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개선 효과가 그 지역의 공장을 모두 폐쇄한 결과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독일 방문에서는 오염 물질 배출이 전혀 없도록 설계된 산업개발이 제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업 생산을 멈추지 않고서도 자연계에 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 기술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술적 해결책이 개발될 것을 예상해서 파괴적인 현재의 관행을 지속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환경 자체를 고칠 필요도 없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동입니다. 온실 효과로 인해 발생하는 무시무시한 대규모 재해와 재앙의 경우 이론상으로도 그에 대한 해결책이 존재하기라도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해결책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에 요구되는 규모로,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현실적인 타당성이라도 있는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그에 소요되는 비용과 자연 자원이란 측면에서의 대가가 얼마나 될까요? 아마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아’에 대한 인도적 구호와 같은 많은 다른 분야에 있어서 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이 이미 부족하다는 점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자금을 모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분야의 부족함을 고려한다면, 도덕적으로 말해서 이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한편에서는 굶주리고 있는데 반해 단지 선진국가들이 그들의 해로운 관행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행위의 전 세계적 맥락 측면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제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필요성은 인구 증가문제에 부딪쳤을 때 더욱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모든 주요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많을수록 더 좋겠지만 그리고, 지금부터 100년 후 인구 내파(人口 內破 특정지역에 인구가 집중, 역자 주)를 예상하는 최근의 연구 결과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승려로서 이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부적절할 것입니다. 가족계획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를 갖지 말 것을 제안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은 귀중한 가치이자 자산이며 결혼한 부부는 절박한 사유가 없는 한 자녀를 가져야 합니다. 책임감 없이 풍족한 삶을 즐기기 위해서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동시에 인구수가 자연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려를 해야 하는 것이 결혼한 부부들의 의무입니다. 오늘날 현대 과학기술의 영향을 염두에 두면 특히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 건강한 장소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윤리적 규율의 중요성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재앙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인간 활동이 지구 환경에 주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문제를 주된 관심사로 채택하는 정치 정당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숨 쉬는 공기, 마시는 물, 수많은 종류의 무수한 생명체를 지탱해주는 숲과 바다, 날씨를 지배하는 풍토적 패턴, 그 모두는 국가적 경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사실이 희망의 근거가 됩니다. 이것은 한 국가가 그 얼마나 강하고 부유하건 간에, 아니면 약하고 빈곤하건 관계없이 모든 국가가 이 이슈와 관련해서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가 자연 환경을 방치함으로써 발생한 문제들은 우리 개개인 모두는 무언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일깨워 줍니다. 한 사람의 행동은 큰 영향을 주지 못할 수 있지만 수백만 개인들의 행동이 결합된 효과는 분명히 중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것은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을 바꿀 것을 심각히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이것은 윤리문제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선진국가 시민들이 아닌 세상의 나머지 모든 나라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개선시켜야 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유한 국가의 시민들이 그들의 생활 방식을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보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이로 인해서 발생하게 될 모든 부정적인 결과를 포함해서 자연계에 회복할 수 없는 폭거를 가하지 않고서도 이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더 부유한 국가들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가 부담해야 할 대가, 그래서 다시금 인류가 짊어져야 할 대가는 그야말로 너무도 거대합니다.

인류는 산업개발과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강력하게 ‘인간’ 위주로만, 지구적 자연과 환경에 대해 인간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과 집들을 봅시다. 사람들은 그곳에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온갖 벌레와 새와 일체 동식물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집을 짓습니다. 산과 들을 평평하게 고르고 경계선을 그은 뒤 여기는 ‘내 땅’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내 땅, 네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집착을 합니다. 이것은 온전히 우리 인간 입장에서만 주장하는 편견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편견은 일체의 생명들이 함께 살아 온, 앞으로 살아가야 할 터전임에도 인류보다 훨씬 앞서 존재해 온 존재들에 대해 무시하는 행위로 표출됩니다. 지구의 자연환경은 인간은 물론 일체 생명들이 공존하는데 결코 모자람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이 집착하고 소유하려 하면서, 더욱 많은 것을 얻으려 하면서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게 됐습니다. 결국 인간의 집착과 탐욕을 친환경적 인식으로 전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예전의 자연환경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그 어떤 행동을 하건 자연은 절대 평등의 가치를 매일매일 실천하고 있습니다.

<출처=달라이라마오피스 홈페이지>
번역=백영일 번역전문위원

[1306호 / 2015년 8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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