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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불국사 금동불좌상과 최치원 찬문

명문장가 최치원이 찬탄한 걸작품 존재 둘러싼 미스터리

▲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국보 제26호, 높이 1.77m. 통일신라시대.

불국사는 석가탑·다보탑 및 청운교·백운교로도 유명하지만, 비로전에 봉안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봉안된 금동아미타불좌상도 미술사학자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국보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상은 많지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진 금동불상의 사례는 매우 드물 뿐 아니라, 그 조형성 역시 뛰어난 작품이다.

신라 불상 중 규모·수준 독보적
봉안 시기 추정 견해는 분분하나
8세기 중엽 이후 작품으로 간주

최치원 찬문과 연관되면서 주목
찬문 향한 가필·진위 논란 속
금동불상 찬탄글이란 주장 제기 
조성시기 877년 확정 근거되기도

2000년대 반론 제기되면서 전환
“찬탄 대상은 불상 아닌 벽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

그러나 이 두 금동불상이 언제 어떤 경로로 불국사에 봉안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견해가 분분하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불상이 불국사가 창건되던 시기에 함께 만들어졌을 가능성이다. 불국사의 창건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으므로 불국사의 금동불상 역시 석굴암 본존불상의 조각양식과 직접 연관될 수 있다.

▲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27호, 높이 1.66m. 통일신라시대.

따라서 이들 불상은 대략 8세기 중엽 이후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와 함께 1948년 간행된 ‘불국사사적기(佛國寺事蹟記)’ 및 조선 영조 16년(1740)에 승려 동은(東隱)이 짓고 그의 제자 만연(萬淵)이 교정한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이 찬하였다고 하는 ‘대화엄종불국사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幷序)’와 ‘대화엄종불국사아미타불상찬병서(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幷序)’가 실려있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우선 이 찬문이 정말 최치원이 쓴 것인지부터가 논란이었다. 예를 들어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 선생도 이 찬문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진위가 의심스럽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서여 민영규(西餘 閔泳珪, 1915~2005) 선생 같은 분은 이 글이 다소의 가필이 있었을지라도 최치원의 글이 맞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들 찬문을 불국사의 금동불좌상 2구와 직접 연관하여 보지는 않았다. 다만 민영규 선생은 특히 비로자나불이 취하고 있는 지권인이라는 수인은 9세기에나 들어서야 유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국사 창건기인 8세기 중반에 이와 같은 상이 봉안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 더불어 임란 등의 병화로 불국사가 수차례 불탔던 상황에서 무거운 금동불상이 살아남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들 불상들은 임란 이후 불국사가 복원되면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 불국사 사리탑. 보물 제61호. ‘불국사사적’에 언급된 헌강왕비 사리탑인 ‘광자부도’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1970년대에 들어서 새롭게 이들 문헌에 실린 최치원의 찬문에 등장하는 비로자나·아미타불상이 바로 현존하는 금동불상 2구를 지칭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문헌과 불상을 직접 연관하여 살펴보게 된 계기는 불상의 제작연대를 기존의 8세기 중반이 아닌 9세기 중후반으로 내려보고자 하는 양식적 판단에 더하여 문헌적으로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최치원의 찬문에 의하면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년)이 죽자 그의 후비로 추정되는 권씨가 출가하여 수원비구니(秀圓比丘尼)라는 법명을 얻고 헌강왕을 추모하며 불국사 강당 좌측벽에 비로자나불 및 좌우 협시인 문수·보현보살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가 887년이었고, 따라서 금동비로자나불상의 연대를 9세기 중후반으로 보려던 입장과 잘 부합되는 사료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아미타불상은 도상적으로 명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찬문의 확인으로 아미타불을 조성한 것이 확실해졌으며, 연대도 ‘불국사고금역대기’에 비로자나불과 ‘동년월일(同年月日)’에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어 두 불상이 함께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불국사 금동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은 8세기 중반으로 편년되던 것에서 887년의 정확한 기년작으로 연대를 내려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됐다. 반론의 요지는 이 찬문을 최치원의 글로 보는 것은 같은 입장이지만, 찬문에서 말하는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은 조각이 아니라 강당의 좌측벽(左壁)과 서벽(西墉)에 그려졌던 벽화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현존하는 금동불상 2구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설명했다. 비로자나불상을 제작한 장인을 평가하는 가운데 찬문 속에 등장하는 ‘호두묘수(虎頭妙手)’라는 표현에서 ‘호두’도 중국 동진(東晋)의 천재적 화가였던 고개지(顧愷之, 344~466년경)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고개지와 같이 뛰어난 솜씨”로 번역된다고 하여 화가의 기량으로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상을 찬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화상유소조(畵像踰彫塑)”는 ‘그림이 조각보다 낫구나’로 해석되고, “필단열중목 채확승사찰(筆端悅衆目 彩雘勝詞札)”은 “붓끝이 여러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하고, 채색은 이 글발보다 낫구나”로 해석되어 어디까지 화가에 대한 칭송임을 지적하였다.

▲ 불국사 석조사자대좌의 파편. 비로자나불의 대좌인 사자좌를 통해 불국사의 화엄도량적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이 두 상의 연대를 모두 887년으로 보는 것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앞서의 ‘동년월일’이라는 아미타불상찬문의 표현은 ‘불국사고금역대기’에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착오라고 지적하고, 대신 아미타불 찬문 뒤에 등장하는 “올 때는 계원의 행인(桂苑行人)이었고, 돌아갈 때는 상구의 사자(桑丘使者)였다”는 부분을 주목했다. ‘상구사자’란 최치원이 893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것을 의미하므로 아미타불상은 893년 이후에 제작되었다는 해석이다.

‘불국사사적기’와 ‘불국사고금역대기’의 비로자나·아미타상 찬문이 지금의 금동불좌상 2구를 지칭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지 30년 가량이 지나 제기된 이와 같은 반론에 대해 아직까지 재반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비로자나불상 찬문의 내용이 회화작품에 대한 찬문의 성격을 지녔음은 비교적 명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를 불화가 아닌 불상으로 보고자 했던 것은 찬문의 제목에서 비로자나·아미타의 존명 뒤에 “진흥왕이 주조한 것이다(眞興王所鑄佛)”란 협주가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비로자나불상이 887년에 제작되었으므로 ‘진흥왕’은 ‘진성왕(眞聖王, 재위 887~897년)’을 잘못 기록한 것일 뿐 ‘주조한 불상’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비판적 시각에서는 이 문장 전체를 명백히 잘못된 기록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찬문 중에 어디까지를 잘못된 부분으로 볼 것인가 하는 것 역시 주관적 판단이다.

특히 두 찬문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비로자나불상이 불화였다고 해서 아미타불상까지 불화였다고 볼 근거도 약해진다. 아미타불상 찬문 중의 ‘敬寫無量壽像 旣成功於畵聖’ 부분에 나오는 ‘화성(畵聖)’ 역시 회화임을 암시하는 듯 하지만, 이는 ‘무량수상을 성스럽게 초를 뜬 것(그린 것)을 상으로 완성한 후…’ 등으로 해석할 여지도 없지 않다.

조각을 만들기 전에도 그림으로 초를 뜨기 마련인데, 혹시 찬문을 부탁할 때는 상을 직접 보이거나 가져올 수 없어 이 불상초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아가 노동이 들어가는 조각가보다 화가를 예술적으로 더 높이 평가하여 조각의 완성도 역시 화가의 기량에 달려있다고 본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실제로 아미타불상이 893년 이후에 제작되었다고 한다면 기존에 제기된 887년과는 차이가 있지만 여하간 아미타불상의 상한연대로서 이 불상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논의를 조금 진척시켜 상상력을 발휘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비로자나불상의 협시보살 찬문에서 ‘조각보다 낫다’는 문장에 등장한 조각은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까? 뜬금없이 아무런 비교대상도 없이 최치원은 조각보다 그림으로 두 협시보살을 제작한 것이 잘했다고 칭찬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구체적으로 찬문 속에 등장한 그림과 비교할 조각이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림보다 앞서 제작된 조각은 얼마나 앞서 만들어졌던 것일까? 아미타불상 찬문을 굳이 불화가 아닌 불상에 대한 것으로 보았을 때 893년 이후에 만들어진 아미타불상이 비로자나불상과 양식적으로 매우 흡사하다면, 비로자나불상도 여하간 9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국사 금동불상의 9세기 중후반 설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최치원의 찬문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양식적으로 불국사의 금동불은 8세기의 조각양식에 비해 인체는 경직되면서도 세부표현은 자유로운 특징이 드러나기 때문이며, 사상적으로는 불국사가 법상종계 중심에서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는 화엄종 중심의 사찰로 변화한 시기, 지권인 비로자나불이 아미타불과 함께 조성될 수 있는 여건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역시 9세기 중반 이후가 아니면 설명이 어렵다는 정황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걸작인 비로자나·아미타불상과 명문장가 최치원의 찬문에 등장하는 두 불상의 존명이 일치하는 이 사실을 단지 조각과 회화라는 차이만으로 전혀 별개의, 혹은 우연의 일치인 사건으로 해석해야하는 것일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306호 / 2015년 8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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