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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극락의 방향과 위치

기자명 이제열

서방정토설은 마음 이치 깨닫게 하는 방편

▲ 프랑스 기메박물관 소장 아미타불도.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간 곳에 세계가 있으니 이름이 극락이요 부처님이 계시니 이름이 아미타니라. 거기서 지금도 법을 설하느니라.”

극락은 결국 마음의 현현
불성 드러내는 것이 정토
신심 있으면 단번에 도달
모든 것 중생 마음에 달려

부처님은 사리불을 향해 서쪽에 극락이라 이름 하는 불국토가 존재하며 그 곳에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이 계시면서 늘 법을 설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대승경전에 출현하는 사리불을 비롯한 십대제자들은 모두 부처님의 진리를 완전히 성취하지 못한 미완성의 존재로 그려진다. 대승불교에서 가리키는 소승은 초기 경전인 니까야 계통의 가르침들이다. 그 가르침들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대승불교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대승불교 관점에서 니까야 계통의 가르침들은 대승을 설하기 위한 전단계의 교설들이다. 산을 진리에 비유한다면 산에도 기슭이 있고 중턱이 있고 정상이 있는 것처럼 니까야 역시 진리이지만 대승불교의 가르침에는 못 미친다고 여긴다. 이에 대해 당연히 니까야만이 불설이며 그 가르침을 닦아 완성하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믿는 입장에서는 대승불교의 이런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발한다. 대승불교에는 니까야에 없는 교설들이 숱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똑같은 법을 조명하는데 있어서도 시각을 완전히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정토신앙이다. 니까야 경전에는 정토라는 용어도 없을 뿐더러 삼계 밖에 별개로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 더구나 부처님은 한 국토, 한 시대에 등장하기 때문에 석가모니 외에 다른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삼계 외에 불국토가 무수히 존재하며 그곳 마다에는 부처님들이 계시면서 중생들을 위해 법을 설한다고 가르친다. 극락은 그 가운데 하나의 불국토이며 아미타불 또한 무수한 부처님들 가운데 한분이다. 법장비구의 원력에 의해 건립된 극락은 부처님이 계신 기원정사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 존재한다. 극락을 서방정토라고 하는 것은 그곳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락은 과연 반드시 서쪽에 존재 할까? 그리고 그곳은 십만 억 세계를 지날 만큼 멀리 떨어져 존재할까? 정토는 모든 불자들이 도달해야 할 목표이며 성취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경전에는 정토라는 용어에 해당하는 말로 불국토라는 표현을 쓴다. 본래 정토는 중생들이 살아가는 예토와는 반대가 되는 세계이다. 예토는 번뇌에 의해 오염된 더러운 땅이라는 뜻이고 정토는 번뇌로부터 벗어난 깨끗한 땅이라는 뜻이다. 경전에서는 세 가지의 측면에서 정토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정토를 부처님이 성취하신 깨달음의 경지로 보는 경우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경지를 열반·해탈·보리·법계·정토라고 한다. 또 하나는 정토를 미혹과 번뇌를 떠나, 드러난 세계의 참모습으로 보는 경우이다. 중생이 바라볼 때 이 세상은 예토지만 부처님이 바라보면 이 세상 그대로가 정토이다. 끝으로 정토를 이 세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로 보는 경우이다.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떠난 다른 세상에 정토가 존재한다는 설명이다.

아미타경은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설하고 있는 정토 가운데에 마지막 타방 정토설을 제시한 가르침이다. 사실 경전의 이 같은 다양한 정토설은 정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큰 혼란을 준다. 마음 한번 깨달으면 그대로 정토라는 견해. 이 세상이 정토니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는 견해. 이 세상 아닌 서쪽에 별개의 정토가 있으니 죽어서 가야한다는 견해. 이 세 가지의 견해는 중생들이 정토를 찾고자 하는데 방향성을 모호하게 한다. 예를 들어 유마경에서는 ‘정토는 곧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곳에서 찾아야 하나니 만약 이 곳에서 정토를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은 허공에 집을 짓는 일과 같다’고 하였고 혜능선사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못하여 자기 몸 가운데에 정토가 있는 줄 모르고 혹은 동쪽나라를 원하고 혹은 서쪽나라를 원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있는 곳마다 모두 안락하여 동일하니라’ 하였다. 이 내용만 보아도 지금 설하고 있는 서방정토설과는 일치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경전의 다양한 정토설에 대해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일심(一心) 즉 한 마음으로부터 교설이 펼쳐진다. 즉 하나의 마음으로부터 중생과 부처, 예토와 정토, 생사와 열반, 무명과 진여, 지옥과 극락이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모든 세계는 일심의 현현이며 일심의 소작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화엄경에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능히 세간을 그려낸다. 중생과 부처도 마음과 더불어 한결같다’고 하였다. 이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세간과 출세간, 부처와 중생의 세계가 갈라지는 것으로 결코 마음을 떠난 세계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미타경의 서방 정토설은 이러한 이치를 깨닫게 하기위해 극히 방편의 성격을 지닌 교설임을 알 수 있다. 그 방편은 서방 정토설을 통해 결국은 사바 즉 정토임을 실현케 하려는 데 있다. 중생들마다 지니고 있는 스스로의 마음을 깨닫게 되면 이 세계와 더불어 차별 없는 일법계의 정토를 이룬다. 이를 일진법계(一眞法界)라고 하며 이 일진법계를 대승불교의 진정한 정토로 보고 있다. 사바세계가 곧 깨달은 청정한 마음과 하나가 되어 그대로 정토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에 수많은 종류의 타방 정토설이 나오고는 있지만 지금 말한 일진법계의 이치를 저버리면 정토의 진정한 의미는 왜곡되고 만다. 이미 밝혔듯 타방 정토는 서쪽의 극락세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서쪽 외에도 동·서·남·북·중앙 모든 곳에 한량없이 많은 정토가 있으며 서쪽만 해도 아미타불이 정토를 건립하기 이전부터 무수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서 극락이 있다함은 서쪽에 이미 십만 억의 부처님과 정토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일진법계의 정토관에 의거하면 아미타불의 극락은 반드시 서쪽 먼 방향에 있는 곳이 아니고 십만억 불토를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든 부처와 국토는 동일하며 그 부처와 국토는 중생의 마음에 의해 나타난다. 마음을 깨달으면 서쪽이 곧 이 자리이며 십만 억 세계를 찰나 간에 통과한다. 동서남북 중앙의 모든 세계가 마음과 더불어 하나의 정토이며 일체의 부처님들이 한 몸을 이룬다. 대승불교에서의 깨달음은 무명 속에 가려진 불성의 완전한 발현이다. 중생에게 불성이 발현될 때 이 세계는 정토로 변화하고 일체의 제불들이 하나의 광명으로 모습을 나툰다. 그러나 중생들이 자신 속의 무명을 타파하고 불성을 드러내어 일진법계의 정토를 보기란 쉽지 않다. 일진법계의 정토는 십신과 십행과 십회향과 십주와 십회향 같은 무수한 바라밀을 닦아야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아미타경에서는 그와 같은 난행들이 보다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친다. 단순히 서쪽의 아미타불을 믿고 극락에 태어나고자 염원하면 마침내 일진법계의 이치를 구현하여 성불하게 되는 것이다. 혹 누가 말씀 그대로 서쪽에 아미타불이 존재한다고 단순하게 믿고 극락에 태어나고자 염한다고 하자. 그 결과 그가 도달하는 곳은 서쪽이 아니며 이 땅이고 친견하는 것은 아미타불만 아니라 모든 부처님이다. 십만 억 국토를 지난다는 것은 사람의 신심 정도에 따라 찰나에 도달 할 수도 있고 미진겁에 통과 할 수도 있으므로 멀고 가까운 곳이 아니다. 모든 말씀이 마음을 근본으로 나왔다는 점을 알지 않으면 미혹에 떨어진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06호 / 2015년 8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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