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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돈오와 점수의 관계

기자명 인경 스님

“심성은 본래 청정, 번뇌는 본래 존재하지 않아”

필자가 처음 불교를 접한 고등학교 시절,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이란 언구에서 의심을 했던 기억이 있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면서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면 그것은 곧 아래로 중생을 구함이 아니고, 반대로 아래로 중생을 구하면 곧 위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뛰어난 근기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랜 업장을 생각하면
점수의 방편을 버릴 수 없어
진정한 수행, 돈오·점수 통합

그래서 지도교사에게 이점을 질문했더니, 그게 가능하다고 대답해주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후에 계속적으로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나의 숙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수심결’에서도 이와 유사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어 관심이 간다. 곧 돈오이면 점수가 아니다. 반대로 점수이면 돈오는 아니다. 이렇게 보면 돈오와 점수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이다. 이런 점을 어떻게 이해할까? 자성정혜는 본래 자성에 정혜가 구족되었기에 돈오에 해당된다. 반면에 수상정혜는 다양한 상황과 근기에 따른 방편이기에 점수의 성격을 가진다. 이들은 양립할 수 있는가?

이점에 대해서 보조국사는 ‘수심결’에서 근기론에 기반해 이런 모순을 해결하고 있다. 번뇌가 많지 않은 상근기의 경우는 돈오 이후에 자성정혜에 의지해 수행하기에 모순이 없다. 반면 번뇌가 깊은 사람은 설사 깨달았다고 해도 자주 번뇌가 침몰하기에 수상정혜를 방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점수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보조국사는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기에, 수상정혜를 방편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깨닫기 이전의 점수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보여준다. 또한 진정한 점수의 수행은 오직 돈오에 기반할 때 비로소 온전한 점수로서의 닦음이 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따르면 돈오에는 두 종류의 근기가 있다. 뛰어난 근기는 곧장 돈오를 사용하지만 열등한 근기는 점수의 방편을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설사 뛰어난 근기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랜 업장을 생각할 때, 점수의 방편을 버릴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보다 큰 문화적 틀에서 보면 점진적인 점수의 정신은 인도적인 전통에서, 돈오는 중국적인 특색에서 주로 다뤄온 경향이 있다. 이들 양자를 통합한 것이 보조국사의 돈오점수 사상이다.

사실 돈오와 점수는 상호보완적이다. 돈오는 바로 점수여야 하고, 반대로 점수는 돈오여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수행이 이루어진다. 돈오만 있고 점수가 없으면 공허해진다. 현실감이 없는 이상적인 허구가 될 가능성이 있다. 현실을 벗어난 돈오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떨어진다. 진정한 돈오는 그것이 온전한 돈오라면 어디까지나 극히 현실적이고 단순한 경험이다.

반대로 점수는 바로 돈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잡다한 현실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 돈오가 없는 점수는 방향감이 없어서 어두운 골짜기를 헤매는 것처럼, 도대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돈오의 경이로운 빛이 현실에 비추어질 때 점수는 비로소 의미가 있다. 돈오와 점수는 반드시 함께 통합된 관계로 동시에 작용되어야 진정한 수행의 길이 된다.

자성정혜는 이미 성품 안에 내재된 본래적 정혜이다. 이때의 정혜는 새롭게 개발된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는 근본적인 정혜이다. 이 근본적인 정혜가 현실 속에서 작동을 할 때는 수상정혜가 된다. 수상정혜는 일상의 모양과 형상을 따르는 정혜이다.

하지만 이것이 집착이나 어리석음이 아닌 것은 대상을 따르지만, 그것은 바로 근본적인 자성정혜인 마음의 고요함과 지혜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에게 인연의 대상을 따르는 역량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심각한 장애가 된다.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은 바로 본래적인 고요함과 지혜로움이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한다.

이것이 자성정혜이고 수상정혜이다. 단지 번뇌가 많고 장애가 많은 경우에는 먼저 선정의 힘을 개발하고 나중에 통찰을 얻는 점진적인 길을 개척하는 것은 오히려 유용한 전략이 아닌가 한다.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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