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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총림 방장 지선 스님 하안거 해제법어

  • 교계
  • 입력 2015.08.26 14:17
  • 수정 2015.08.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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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경지 있어도 하심하는 수행자 돼야”

▲ 지선 스님.
“깨달음의 경지가 있다고 해도 실천의 눈높이를 낮춰서 오랜 하심으로 행세하는 수행자이어야 합니다.”

조계종 제18교구 본사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 스님은 8월28일 2015년 을미년 하안거 해제법어를 내렸다. 지선 스님은 법어에서 해제기간을 방학 맞는 학생처럼 자유로워도 실수하지 않고 하심하는 수행자가 되길 당부했다.

스님은 “선원 밖 세상은 복잡하고 어려워 모두를 받들어 모시는 자세여야지 작은 경험을 안다는 듯 여유 부리면 안 된다”며 “독재자들처럼 자기 위상만 높게 책정해 대중을 외면하는 불통자가 되면 안 된다”고 설했다. 이어 “최상의 간화선자라도 자기 위상을 스스로 훼손하면 대중과 상식도 불통하는 오만한 자가 된다”며 “청정치 못하고 말만 앞세워 군림하는 자세가 활개친다면 신행공동체는 파괴되고 민주사회도 병든다”며 “오랜 하심으로 행세하는 수행자이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지선 스님은 안거 기간 동안 흉내내기에 급급했을 수도 있는 수행자들 자세를 경계했다. 스님은 “수행과정도 없는 우리가 선각자들 깨달은 결과나 행적을 또는 제자들이 기록한 서적들을 자습서처럼 보고 베끼고 외우고 흉내 내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며 “하물며 시공을 초월한 창조적 변용으로 요익중생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럴 때 일수록 근원적 공부에 충실해야 한다”며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며 그대로가 부처라는 가르침에도 우리는 믿음이 적고 교리행과를 지식으로만 느끼고 자증자오(自證自悟) 하지 못했기에 실천 원력이 없거나 미약해서 문제”라고 덧붙였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다음은 을미년 하안거 해제법문 전문.
 

영산회상에서 대중들에게 연꽃을 들어 보이심이여!(靈山會上擧拈花)
다자탑 앞에서 자리 한 켠을 나누어 앉으심이여!(多子塔前分半坐)
입멸직후 두발을 곽 밖으로 내 보이심이여! (沙羅雙樹下槨示雙趺)

이를 두고 세존께서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하신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타고 있는 현실 세계 속에서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는 고통 앞에서 삼처전심이 무슨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그래서일까 역대 선지식들 중에는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이와 같은 전법수수가 없다고 하시며 조사스님들 역시 법을 받거나 전해 주신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역시 지금 받고 있는 온갖 고뇌와 고통스런 삶속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신비스런 얘기로만 들립니다.
이 두 가지 불신(不信)의 의미가 각기 다른 내용이니 전자는 깨침으로 알고 믿으면서 부정하는 또 다른 가르침이며 후자인 우리는 삶에 어떤 도움도 느끼지 못하면서 모르니까 그냥 부정하는 생각입니다.

어디 전법 계승일 뿐이겠습니까? 지금까지 내려오는 선서(禪書)내용들 중에 엉뚱한 역설적 문답이라던지 방과할 눈을 껌벅이고 미간을 찌푸리는 등등의 모습들이 초록은 동색 이듯이 한 내용 한 모양으로 통하는데도 본색종사들의 그와 같은 근원적인 소식을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우리네 삶과 무관한 것입니다. 게다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각 종파들의 상업적 홍보 경쟁 같은 모습도 혼란스럽기만 하고, 경제와 민주화 종교까지도 동의어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종교 앞에 청정화합 수행승단이 되지 않고 상벌이 분명치 못한 종단 현실 때문에 참선 수행자들과 깨달음에 대한 반감마저 생겨나고 있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각자의 욕망성취에 끝없이 바쁜 세상입니다.
수행과정도 없는 우리가 선각자들의 깨달은 결과나 그분들의 행적을 또는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서적들을 자습서처럼 보고 베끼고 외우고 흉내 내는 것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하물며 시공을 초월한 창조적 변용으로 요익중생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자습서 베끼는 어릴 적 공부가 생각납니다.

이럴 때 일수록 근원적인 공부에 충실해야합니다.
깨침은 있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자각각타 각행원만(自覺覺他 覺行圓滿)은 대승불교의 핵심이 아닙니까?
일체중생 실유불성이며 그대로가 부처라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이 적고 교리행과를 지식으로만 느끼고 자증자오(自證自悟)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천하는 원력이 없거나 미약해서 문제입니다.

해제기간이라해서 방학을 맞는 학생들처럼 자유로워지는 것은 괜찮지만 실수해서는 안 됩니다. 선원 밖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 모두를 받들어 모시는 자세여야지 작은 경험을 안다는 듯이 여유 부리면 안 됩니다. 독재자들처럼 자기 위상만 높게 책정하여 대중을 외면하는 불통자가 되면 안 되듯이 설사 최상의 간화선자라 할지라도 자기 위상을 스스로 훼손하면 전대중과 상식도 불통하는 오만한 자가 됩니다. 청정치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면서 말만 앞세워 삼보정재만 축내는 자가 된다던지 어떤 조직의 계파나 수장이 되어 개인의 권위와 권력으로 군림하는 자세가 활개친다면 신행공동체는 파괴되고 나아가 민주사회도 병들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가 있다고 해도 실천의 눈높이를 낮춰서 오랜 하심으로 행세하는 수행자이어야 합니다. 세간의 일체 현상은 고이고 무상무아가 근본입니다.
그러나 자기 숙습으로 얼룩져서 여러분의 진여자성이라는 순수성의 농도가 이미 비자연산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얼마나 많은 실험을 통해야 수많은 고뇌를 염화미소로 해결해 버리는 진공묘유의 불생불멸인 에너지 바다, 순수성이 회복될까요?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종지(宗旨)를 체득해야만 되는 본질적인 공부 참선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일체고를 벗어나고 나와 인류가 공동발심으로 행복해지는 삶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이 열반이고 해탈입니다.

혁범성성(革凡成聖) 부처님의 삼처전심이여! 우리도 자기 개조가 됐습니까?
혁명할 수 없는 사람은 혁명을 못합니다. 자기개조 없이는, 개혁할 수 없는 사람은 개혁을 못합니다. 개선도 못합니다. 크고 넓고 깊고 영원한 순수는 통찰력의 힘입니다. 아 ~ 또 이 산승이 사람들을 피로하게 합니다.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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