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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가 멀리 있을까

기자명 함돈균

내가 참여하고 있는 작은 인문공동체가 있다. 책상 위의 인문학을 이웃과 사회와 나누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매년 방학 기간에는 지역에 가서 그곳 시민들과 함께 시민인문학교를 연다. 올여름에 찾아간 곳은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 해남·강진이었다.

해남·강진이 어떤 곳이던가. 어떤 유명한 여행기의 저자는 이곳을 ‘남도답사 일번지’라고 했지만, 옛날 관의 입장에서 보면 이 동네는 도성인 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 그러므로 조선의 변방이었으며 유배지였다. 그런데 ‘남도답사 일번지’는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로 가능하게 됐다. 한 사회가 더 이상 생산성과 자기 확장성을 가지지 못해 몰락할 즈음, 깊은 통찰력과 삶의 비전을 가진 지식인들은 사회의 주류로부터 밀려나고 그들의 정신적 능력은 지배계층에게 도리어 배척의 대상이자 위험한 대상이 된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가 이 동네에 있었던 것이며, 젊은 추사 김정희가 이 동네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 기간에 묵은 대흥사 일지암은 조선 후기 지성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신의 만남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젊은 초의를 제자로 길러내고, 초의는 그 문하에서 깊은 통찰력과 미의식을 지닌 고승이 된다. 초의는 대흥사 본사 깊은 산에 있는 작은 암자 일지암에서 40년을 묵으며 그곳을 조선 차 문화의 성지로 만든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로 유배가면서 초의를 만나고, 제주도에 가서도 늘 초의와 초의가 만든 차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변방에서 이루어진 이 만남과 교류들이 이미 쇠퇴해가는 나라를 구원하지는 못했지만, 좀 더 유구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제도 세계가 포괄하지 못하는 변방에 오히려 쇠퇴하지 않고 면면히 흐르는 각성된 정신의 흐름이 존재함을 알려준다.

해남·강진 땅의 이 남도이야기는 단순한 교양역사학과는 달리, 매우 남다른 점이 있다. 외형의 문리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사회갈등과 정신적 미성숙과 정치적 후퇴를 겪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 왠지 모를 격려와 뭉클한 감동과 용기를 준다. 이들은 명민한 정신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힘을 자기 이익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쓰려고 애썼던 사람이며, 그 사회의 주류에서 도려질 때조차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자신의 정신적 힘을 사회 구원을 위해 쓰려고 애썼던 이들이다. 또 그들은 자기 사회의 문제를 힘센 나라나 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주체적인 이들이었다. 그들에게도 시대적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적어도 그들은 완고한 지적 식민주의로부터 해방된 이들이었다.

남도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몇 번의 시민인문학교를 열면서 감동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들이 전문 지식인 사회가 아니라 ‘시민’의 삶에서 꿈틀대며 살아 흐름을 느끼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번에 시민인문학교에서는 일반 시민들의 자율적인 ‘시민 테드(시민 미니강연)’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다니고 싶은 학교는’ 이라는 주제로 이뤄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학교 1학년 학생은 우리 시대의 학교가 ‘함께 살아 가야한다’는 기본적인 사회 원리를 가르쳐주는 데에서조차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단 10분의 시민강연을 통해 감동적으로 보여주었고, 강연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우리는 어린이나 어른이나 지식전문가나 촌부나 모두 각자의 ‘테드’를 가지고 있다. 누구나 자기 문제를 통찰하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정신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 방법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발하지 않거나, 용기를 갖지 못할 뿐이다.

남도에 와서 시민들과 대화하면서, 일지암에서 며칠 묵으면서 불국토가 특별히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 부처가 있음을 깨닫는 각성된 정신이 그를 부처로 만드는 것이라면, 그 각성된 정신들이 모인 나라가 불국토가 아닐까. 오늘날의 불국토란 각성된 정신과 실사구시의 삶을 실천하려는 시민의 지혜와 용기를 갖춘 나라가 아닐까. 남도의 만남에서 언뜻 그런 나라의 실루엣을 본 듯도 하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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