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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아미타불과 불성

기자명 이제열

정토는 마음의 방편이며 하나의 세계

▲ 일본 조쿄지 소장 아미타팔대보살도.

정토는 모든 부처님이 누리시는 장소이며 동시에 모든 중생들이 태어나야 할 장소이다. 이 세계에는 한량없는 수효의 부처님들이 계시고 그 부처님들마다 각각 자신의 정토를 지니고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수많은 정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정토는 모든 부처님의 정토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한량없는 수효의 부처님이 곧 아미타불이며 아미타불이 곧 한량없는 부처님들이다. 동서남북에 정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동방정토가 서방정토이며 서방정토가 동남북의 정토이다. 정토는 방향을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청탁(淸濁)에 따라 정해진다.

아미타불의 본질은 불성
중생본성이 그대로 부처
법장비구 사십팔대원은
내면의 자비능력 일깨워

마음을 떠난 정토를 말하거나 정토가 각각 다르다고 여기면 진정한 정토의 의미는 상실되고 만다. 정토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정토는 마음의 발현이며 하나의 세계라는데 있다. 진정한 정토는 특별한 방향에 위치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들마다 따로 누리는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부처님과 정토가 평등하여 한 부처님이 모든 부처님이며 하나의 정토가 한량없는 정토이다. 따라서 아미타경에서 혹 서방에 극락정토를 설정하고 아미타불을 교주로 삼았다하더라도 이를 다른 정토와 다른 부처님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체의 부처님들과 정토는 청정한 마음에 의해서 드러난 일진법계의 모습들이다. 일진법계란 무명을 비롯한 일체의 번뇌와 분별들이 끊어진 불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불성에는 나와 남이 없고 주관과 객관이 없으며 과거와 미래가 없다. 불성은 중생 마음의 본성임과 동시에 모든 부처님이며 또한 이 세계 그 자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와 중생과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의 진실한 불성만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중생들이 무명과 번뇌에 가려 불성을 보지 못한 탓으로 마음과 세계, 주관과 객관, 예토와 정토, 부처와 중생이 갈라져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무명과 번뇌를 타파하여 불성을 보면 이런 차별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부처님 세계만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부처님 세계만 있을 뿐 어떤 차별이나 대립은 있지 않다는 것이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의미다. 일진법계의 시각으로 보면 서방의 극락이 중생계이며 아미타불이 중생의 마음이다. 우리가 아미타경을 비롯한 정토경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그 핵심을 잘 파악해야 한다. 아미타경에서 목적하는 바는 중생을 서쪽의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데 있지 않다. 서쪽을 방편으로 하여 불성을 깨달아 일진법계의 정토를 이루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만약 누가 글자에만 집착하여 일진법계와 불성의 이치를 망각하고 정토를 서쪽에서만 찾는다면 진정한 정토를 만날 수 없다. 물론 글자 그대로만 믿고 염불을 했어도 불성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일진법계의 도리를 알 수는 있겠지만 일단은 정토에 대한 바른 소견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몇 번에 걸쳐 설명해왔듯 정토경의 주체이신 아미타불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불성은 빼놓을 수 없다. 불성을 논하지 않고는 아미타불의 본질은 파악되지 않는다. 아미타불, 더 나아가 모든 부처님들까지도 불성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모든 교설이 공(空)사상과 불성사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은 누구나 시인하는 바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공과 불성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수행한다. 공은 일체만법의 본성이 실체가 없다는 교설이며 불성은 모든 중생의 마음의 본성이 그대로 부처라는 교설이다. 특히 이 둘 중에 불성사상은 대승불교의 교리 가운데에서도 요의(了義)라고 불리는 최상의 가르침으로 불교의 궁극을 삼고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과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깨달아 열반을 실현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을 깨달아 열반을 실현한다. 대승불교의 성불이란 불성의 완전한 발현이며 부처란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인격화 된 사람이 아닌 불성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불성은 모든 중생의 무명과 망상 속에 들어있는 대지혜, 대광명, 대해탈의 근본성품으로 어느 중생이건 이를 갖추지 않은 중생은 없다. 아무리 죄업이 수미산처럼 높다해도 중생의 마음은 부처님과 같은 고귀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성은 무명 속에서도 한결같이 빛나는 광명체이며 생멸 속에서도 생멸하지 않는 영원체이다.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수명을 지닌 존재가 곧 불성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불성은 중생의 마음속에 아무 하는 일 없이 정지상태로 고요히 숨겨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불성은 움직임이 없는 듯 하지만 능동태로서 끊임없이 중생의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까지 활동한다. 중생 개개인과 이 세계가 하나의 부처세계인 일진법계이며 정토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불성은 쉴 틈 그 힘을 방출하고 있는 것이다. 불성은 중생의 내면에 깃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세계에 두루하며 부처님이면서 동시에 중생의 마음이기도 하다. 중생들이 보리심을 일으키고 수행을 하는 것도 실상에 있어서는 불성의 작용이며 가피이고 인도함이다.

불성은 무엇보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강력한 원과 방편들을 구족하고 있다. 우리가 마음으로 성불의 원을 세우고 중생구제의 원을 세우기 이전 이미 불성에는 온갖 원들이 깃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중생의 깨달음과 해탈은 중생의 의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불성의 오묘한 힘과 자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불성은 부처님이고 부처님은 일진법계로 언제나 이미 갖춘 공덕과 원력으로 지금도 중생들을 끊임없이 인도하고 계신다. 법계에 부처님이 상주하여 지금도 법을 설하고 중생을 제도하여 정토에 나게 한다는 말씀이 곧 불성으로 말미암아 나온 가르침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제 불성의 이러한 원리에 맞추어 아미타불을 대비한다면 우리는 아미타불의 본질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아미타불은 불성을 인격화한 존재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만들어 낸 방편의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의 본질은 불성인 것이다. 아미타불을 무량광불, 무량수불이라 하고 사십팔원의 성취를 통해 성불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불성의 원리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중생들은 아미타불을 통해 불성을 깨닫고 서방 정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일진법계의 소식을 알게 되며 법장비구의 사십팔대원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갖추어진 본래의 자비능력을 세상에 구현한다. 정토경의 모든 교설이 불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08호 / 2015년 9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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