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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마음-하

관성화 된 행동서 벗어나 매순간 변화시키는 것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외부에서 다가왔던 것은 지나가거나 물러서면 사라진다. 그러나 내부화된 것은 그것이 지나간 뒤에도 남으며, 물러선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겪은 마음들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기록하여 두며,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다가올 사태를 예상하고 준비한다. 기근을 겪은 태아의 유전자가 기근을 예상하여 최대치로 영양소를 흡수하고 집적하는 능력을 가동시키고, 그런 식으로 살아남으려는 마음을 신체에 담아 지속시키듯이. 빛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눈이 금방 사라지지는 않듯이. 이는 ‘마음’이란 말로 표현되는, 신체를 움직여 반응하며 작용을 하고 변화를 만드는 능력에 안정성과 지속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달라진 조건에 부적절하게 대처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궁핍을 경험한 이가 궁핍에 대비하는데 현재의 삶을, 아니 미래의 삶조차 귀속시켜버리고, 성공을 경험한 이가 그 성공에 안주하여 다른 삶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것이 심해지면 과거의 경험에 고착되어 증상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병적인 마음이 되기도 한다. 생존을 지속하려는 마음이 과거의 어떤 것에 집착하여 스스로의 작용능력을 고정하고 제한하게 되는 것이다. 내부화된 마음이 변화된 조건에서 분리된 삶을, 마음의 작용을 유지하고 지속해간다. 생명체의 마음이 종종 물리적 물체만큼이나 관성적·타성적 성향을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의 의미는
패턴화 된 행을 따르는게 아닌
외부의 연기적 조건에 반응해
관성 힘을 넘어서게 하는 마음

바깥에서 다가와 내 마음 속에 들어왔던 것들을 ‘나의 것’으로 내부화한 것이 나의 마음이다. 하여, 우리의 마음은 우리에게 다가온 외부에 내부화된 방식으로 반응하며 작용한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이라면 일종의 ‘조건반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다양한 종류의 습관이나 기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이 대단히 불확정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같은 음반에 녹음된 동일한 음악이지만, 어떤 때는 몰두하여 감동하며 듣게 되고 어떤 때는 귀에 겉도는 소리로 듣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같은 봉투에서 나온 똑같은 차(茶)이건만 어떤 때는 맛있다고 반응하고 어떤 때는 맛없다고 반응하는 게 우리의 마음이다. 마음이란 이런저런 양상으로 내부화되고 ‘고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는 어떤 자성도 없는 것이기에 이런 것이다. 그것은 연기적 조건과 함께 다가온 마음에 반응하여 작용을 만들어낼 능력일 뿐, 어떻게 반응할지는 애초에 정해진 것이 없는 것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계나 사물 또한 다르지 않다. 전에 친하게 지내던 복사점 주인 양반은, 주인 발소리만 들으면 고장 났다던 복사기가 멀쩡하게 작동한다는 얘기를 농반진반 해준 적이 있다. 컴퓨터를 많이 사용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컴퓨터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반응하지 않으며, 항상 똑같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공지능’을 제거한 채 센서로 감지되는 사물에 어떻게 반응할지만을 사전에 프로그래밍한 로드니 브룩스의 로봇들은 프로그래밍되지 않은 행동패턴들을 만들어낸다. 흔히 ‘창발’이라고 부르는 이런 현상은 자연계에도 존재한다.

이런 미결정성과 불확정성의 폭이 커서, 지나간 경험에 비추어 판단하는 능력이 과거의 패턴을 벗어날 가능성을 가진 것들에 대해 우리는 ‘생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마음이 가진 미결정성의 정도가 내부화된 것에 따른 관성적인 반응을 벗어나는 크기를 가질 때, 내부화된 주름은 예상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게 된다. 자신이 만난 조건에 대응하며 다른 주름들을 만들면서 펼쳐지는 그런 작용의 양상이 그때 나타나게 된다. 상이한 기억들 가운데서 좀 더 나은 작용의 양상을 찾아내는 학습능력이나, 기억된 것을 변형시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창안의 능력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마음에 속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만나게 되는 것들에 대처하여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은 고양될 수 있다. 관성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사고와 행동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능력은 이로부터 나온다 할 것이다.

수행(修行)이란 행(行)을 닦는다(修)는 말이다. 행이란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마음이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35억년의 역사를 갖는 과거의 ‘숙업’이 쌓여 만들어진 능력이고, 일상적인 생존을 위해 신체적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습관적인 의지들이며, 자신이 만났던 과거의 경험이 내부화되어 만들어진 마음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관성적·타성적인 성향을 갖는다. 하던 대로 하려는 성향, 하던 것을 계속하려는 성향이 그것이다. 그 관성적인 성향만을 갖고 있다면, 인간이든 생명이든 관성적인 힘에 의해 운동하는 사물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생명’이란 이름에 부합하는 것은 그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릴 수 있을 때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미결정성의 힘을 가동시켜 관성적인 선에서 벗어나는 선(이를 에피쿠로스는 ‘편위선(clinamen)’이라고 명명하고, 들뢰즈는 ‘탈주선’이라고 명명한다)을 그릴 수 있을 때,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그 마음 안에 형성된다. ‘행을-닦는다’ 함은 자신의 마음이 작용하는 양상을 지켜보면서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을 증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조 스님의 유명한 화두 덕분인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이 곧 부처고, 모두가 그런 마음이 있다는 점에서 부처라는 말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비난하는 말을 들으면 화가 나고 음식을 보면 어느새 손을 내미는 나의 마음은 중생의 마음이지 부처의 마음이 아니다. 정해진 성향에 따라 패턴화된 행(行)을 반복하게 하는 그 마음은, 아무리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을 들이대도, 부처 아닌 중생의 마음일 뿐이다. 그건 부처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도 아니다. 마음이란 매순간마다 우리에게 다가온 연기적 조건이 갖는 작용의 능력이고,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우리에게 작용하고 손을 내미는 그 마음을 부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연기법의 작용 자체, 혹은 연기법에 따라 작용하는 자연 자체가 바로 그 부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법신불’이라고 하는 부처가 바로 이를 뜻하는 게 아닐까?

부처라는 말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어떤 ‘인격’을 떠올리는 이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런 연기법의 작용을 통찰해 응하되 내부화된 성향에 머물지 않고 그때마다 적절한 대응의 양상을 찾아내는 능력에 부여된 이름이 부처라고. 어떤 결정성도 갖지 않기에 어떤 연기적 조건에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자체에, 앞서 능산적인 능력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했던 그런 능력에 붙인 이름이 부처인 거라고. 애초에 모든 마음이 그렇기에, 비록 내부화돼 안정적이지만 동시에 관성적인 그런 마음의 작용을 넘어, 관성적인 힘에서 벗어나는 이탈의 선을 그리는 능력이 바로 부처라고.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09호 / 2015년 9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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