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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이해 넘어 선정이 필수적 요소”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5.09.10 15:11
  • 수정 2015.09.10 16:19
  • 댓글 25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학 교수
현응 스님의 ‘깨달음 이해론’ 지적
‘보디사트바’라는 용어 자체에도
‘수행하는 중생’이란 의미 담겨
오비구 지도 때도 ‘선정’ 포함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이 9월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으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 가운데 초기불교를 전공한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학 교수가 9월10일 ‘현응 스님의 깨달음과 역사는 한국불교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초기불교에서 선정이 필수적인 요소이며 부처님의 녹야원에서 오비구를 아라한이 되도록 하는 데에도 선정의 과정이 포함돼 있었음을 강조했다. 편집자

▲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학 교수
‘“한국불교는 빈곤하다”고 하였는데 어떤 의미입니까?’(필자의 질문), “한국불교는 역사의식이 빈곤하다는 뜻입니다”(현응스님의 답) “역사의식이 빈곤한 것은 불교의 특징 아닙니까?”(필자)라는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현응 스님이 이해하는 불교 즉 보살의 불교인 대승불교는 바로 깨달음(보디)의 역사화(살타=중생), 역사(중생)의 깨달음화이기 때문에 두 번째 필자의 질문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현대의 한국불교가 현실 역사 인식이 빈곤하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은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에 너무 천착하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불교가 역사 즉 중생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빈곤한 입장이라고 한다. 현실의 역사의식의 부재가 한국불교의 빈곤함이라고 하는 말이다. 수긍할만한 점이 있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현응 스님은 특유의 불교관 특히 대승불교에 입각한 불교관을 펼치고 있다. 현실의 한국불교, 좁게 보면 조계종단의 문제를 들추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매년 2000명의 선승들이 안거를 하기 위해 100곳이 넘는 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는데 여전히 중생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한 모습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는 대승불교와 간화선의 입장에서 답해야 할 영역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015년 9월4일, 25년 전에 출판한 ‘깨달음과 역사’ 발간 25주년을 기념해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조성택 교수(고려대), 홍창성 교수(미네소타주립대), 정경일 원장(새길기독교사회연구원)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초청된 100명에 가까운 사부대중이 동석했다. 이 글은 세미나 자리에 참가한 필자의 소감 일부이다. 필자는 초기불교와 인도불교(부파불교와 대승불교)를 전공한 불교학도이며 테라와다 불교의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미리 말하지만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자는 아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붓다의 가르침에 가장 가까운 전승으로 존중하지만, 부파불교의 해석과 수행 전통을 초기불교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존중하고 대승불교의 이념도 초기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필자는 붓다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聲聞) 불교가 초기·부파불교의 기본적 입장이라고 이해하고 있고, 붓다의 삶을 따르려는 불교는 대승불교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현응 스님의 글과 발제를 보고 있다는 점을 미리 말해둔다.

현응 스님은 이 발제문을 역사성이 빈곤한 한국불교의 대폭적인 변화를 위한 글이라고 하며 이전의 ‘깨달음과 역사’의 입장을 정리해서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발제문은 학술적인 성격의 글이 아니라, 한국불교가 지금 이 시점에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전위적인 글이라고 조성택 교수는 평하고 있고 현응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다. 조 교수는 “학술적인 글이 아니니, 학술적으로 보고 비평하면 난센스”라고까지 하였다. 하지만 글의 내용 속에는 테라와다의 팔리 ‘율장대품(마하박가)’이라는 초기불교 문헌에 대한 현응 스님의 이해도 소개되어 있고, 불교 용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초기불교 전공자의 입장에서 따져보고자 한다.

현응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과 그 내용을 서술한 것으로는 아마 ‘마하박가(大品律藏)’가 가장 원형이라 할 것이다. ‘마하박가’는 율장의 하나이다. 율장은 경장보다 먼저 송출해 결집했다. ‘마하박가’는 그 내용으로 보면 여러 율장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송출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마하박가’야 말로 가장 앞선 시기에 결집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하박가’는 성도(成道) 직후 깨달음의 내용을 정리하는 부처님의 생각과 첫 설법(초전법륜) 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율장이 경장보다 먼저 송출되었고, 율장에서도 ‘마하박가’가 율장 가운데 가장 먼저 송출되었기에 ‘마하박가’를 가장 앞선 시기에 결집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편 일리가 있는 듯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만, 붓다 입멸 후 3개월 후에 있었던 1차 결집을 실제로 있었던 사건으로 볼 경우, ‘마하박가’가 율장의 다른 부분이나 당시 결집된 경전과 시간적인 선후를 가린다는 것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당시 율장과 경장이 현재의 형태였는지 가리는 것도 어려운 문제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율장의 ‘마하박가’가 가장 앞선 시기에 결집되었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현응 스님은 붓다는 최초의 제자들을 집중적인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설법을 했으며 듣는 이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곤 했다. 그리고 대화와 토론을 위해선 자기 생각이 정리가 되어야 하니 이를 위한 사유행위가 뒷받침 되었을 것이다.”

‘마하박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가 성취되었다. 내가 가르치리라. 내가 가르침을 설할 것이다. 내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면(patipajjamana), 머지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로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 목적인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abhinna), 깨닫고(sacchikatva) 성취하게(upasampajja) 될 것이다.”(전재성 역, ‘마하박가-율장대품’, 102쪽, Vin I, 9. 팔리는 필자추가)

그리고 붓다는 쾌락과 고행의 중도(majjima patipada)로서 팔정도를 설했다. 팔정도는 초기불교 수행의 결정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붓다의 실천체계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체계가 팔정도이고 팔정도에 포함되지 않는 실천법은 없다고 본다. 붓다는 중도로서의 팔정도를 설명했고 다섯 수행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납득하고 나서(이때의 납득은 일종의 기본적인 믿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천을 했다. 다섯 수행자는 붓다의 제자가 되어 팔정도를 실천한 것이 아니라, 모두 수다원과를 얻고 난 뒤에 정식 제자인 비구가 되었다.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으로 분류된다.(맛지마 니까야, 44, 교리문답의 짧은 경). 계(정어, 정업, 정명), 정(정정진, 정념, 정정), 혜(정견, 정사유)에서 정정은 바른 삼매, 바른 선정을 의미한다. 붓다는 계정혜 삼학, 팔정도를 가르쳤고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聞), 사유하고(思) 선정과 지혜를 실천해서(修) 깨달음(초전법륜에서 수다원과, 다음 법문인 ‘무아상경’을 통해 아라한과)을 얻었다는 것이 ‘마하박가’의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마하박가’에서 다섯 수행자들이 붓다의 가르침과 훈계를 받고 개인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법문으로 훈계하고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받고나서 콘단냐가 제일 먼저, 그리고 밥빠와 밧디야가 그 다음으로 마하나마와 앗싸지가 법안(법의 눈=연기와 연멸의 이치를 직접 지혜로 보는 것)이 생겼다. 법안이 생겼다는 말은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말이며, 견도(見道)라고 한다.

콘단냐, 밥빠, 밧디야가 먼저 수다원이 된 후, 세 사람이 탁발할 때, 붓다는 마하나마와 앗싸지를 가르치며 생활했다. 그리고 나서 5비구는 수행을 계속했고, 필자의 이해로는 수행이 무르익었을 때 붓다는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설명한다. 이 가르침은 문답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붓다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이 단순한 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오온에 대한 반복적인 관찰과 통찰)을 통해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서 확인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미 수다원과 아라한의 계위가 ‘마하박가’에서 정확하게 제시되고 있다.
현응 스님의 말대로 밤낮 없는 설법과 토론을 통해서 사성제를 납득해서 “이해로서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기보다는, 붓다의 가르침대로 선정삼매로 마음을 집중하는 힘을 기르고 그 집중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생멸하는 연기법을 직접 알고 보아 연기된 법들(유위법)의 소멸을 경험하는 열반을 체험했다고 보는 것이 ‘마하박가’를 포함한 초기불교의 수행과 깨달음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연기법을 이해했다는 것은 연기하지 않는 법인 열반을 체험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초기불교를 위시로 한 전통적인 불교의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해석이다.

현응 스님은 보디사트바(보살)를 깨달음과 중생, 깨달음과 역사로 이해한다. 보디사트바에 대한 전통적인 의미는 붓다의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지향하는 중생이다. 깨달음을 이룬 중생이 아니라, 붓다의 깨달음을 원해서(발보리심) 수행하는 중생이라는 의미이다. 붓다가 이룬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육바라밀이나 십바라밀을 중생의 세계에서 실천하는 자가 보살이다. 보살이 바라밀행으로 중생을 제도하며(이타행) 마지막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자리행)이 초기불교는 물론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보살의 이념이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은 중생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을 말하는데,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무명, 갈애, 집착이라는 번뇌를 없애서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 초기 및 부파불교가 이해한 붓다의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의 관점은 번뇌 즉 보리, 생사 즉 열반의 입장에서 번뇌나 생사에 대한 완전히 혁명적 시각을 강조한다. 마음과 중생과 부처가 조금도 차별이 없다고 하는 화엄경의 입장이 대승불교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보살은 중생들의 괴로움을 어떻게 제거하면서 중생의 삶-역사 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해 가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이 깨달지 못해도 중생을 구제하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현응 스님의 주장은 타당하다. 깨닫기 위해서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실수나 실패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과정일 뿐 보살은 기꺼이 이타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다.

한국불교는 이타적인 보살의 불교인가? 불보살의 가피를 빌며, 중생들을 위해 대신 기도해주는 현실의 한국불교 신행과 관광수입에 의존해서 사찰 재산관리인으로 전락한 일부 승가의 모습에서 진정한 보살은 보이지 않는다고 현응스님은 직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출가보살은 진정으로 무주의 자유로운 이타행에 전념해야 되고, 재가보살은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붓다가 되는 길로 정진해야 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라면 ‘깨달음과 역사’는 한국불교의 전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현재 세계 불교의 흐름 속에서 한국불교의 위상을 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여 성실하게 아라한의 길을 가는 테라와다 불교 전통은 잘 보존되어야 하고, 구체적 수행체계를 잘 배워야 한다고 본다. 대승불교는 초기·부파불교의 바탕 위에 붓다의 삶을 모범으로 해서 보살의 이타행을 통한 자리행의 완성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으로 검토할 부분이 많지만, 현응 스님의 고민과 한국불교에 던지는 ‘깨달음과 역사’의 메시지는 불자는 물론 진정한 종교를 고민하는 이들이 깊이 새겨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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