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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극락과 즐거움

기자명 이제열

감각적 기쁨과 초월적 즐거움 어우러진 세계

▲ 우학문화재단 소장 아미타불도.

“사리불이여, 저 세계를 어째서 극락(極樂)이라 하는 줄 아는가? 거기에 있는 중생들은 아무 괴로움도 없이 즐거운 일만 있으므로 극락이라 하는 것이다.”

해탈 관점에서 살펴보면
감각적 기쁨 또한 괴로움

감각적 기쁨 발심케 해
초월적 기쁨으로 이끌어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해 건립한 서방 정토를 왜 극락이라 하는지에 대한 정의를 설명하고 있다. 극락세계는 어떠한 괴로움은 찾아 볼 수 없고 순전히 즐거움만 존재하기 때문에 극락이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바라볼 때에 이 세상은 괴로움만 가득 찬 곳이다. 일찍이 부처님이 설하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삼법인(三法印) 중에 일체개고가 들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향해 괴로움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상의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진리를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자들은 괴로움에 대해서 말할 때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로 이해한다. 생(生)노(老)병(病)사(死) 네 가지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더해 여덟 가지 고통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중생들이 느끼는 괴로움만 괴로움으로 보신 것이 아니다. 중생들이 즐거움이라고 느끼는 것까지도 괴로움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즉 중생들의 육근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향긋한 냄새를 맡고 경쾌한 음악을 듣는 것도 결국 괴로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고와 팔고가 중생들에게 알려진 괴로움이라면 육근의 감각에 의해 만들어진 즐거움들은 중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의 해탈이란 이런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렇게 설명하면 ‘해탈한자는 무슨 재미로 사는가’라는 의혹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탈한 사람은 감각에 의존해 즐거움을 얻는 중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린다. 중생들의 기쁨과 행복은 모두 육근과 육경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중생들의 눈과 귀와 코는 끊임없이 대상을 향해 열려 있고 그 곳에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중생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감각적 즐거움이 괴로움의 또 다른 얼굴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해탈은 바로 이러한 즐거움까지도 괴로움으로 보고 거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즐거움을 누리는 경지이다.

그래서 극락세계는 중생들에게 두 가지의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해 준다. 하나는 중생들이 원하는 감각적 행복이고 또 하나는 감각을 벗어난 해탈의 행복이다. 불교에서는 감각적 행복을 세간락(世間樂)이라 하고 해탈의 행복을 출세간락(出世間樂)이라고 한다. 극락은 세간락과 함께 출세간락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는 극락세계가 단순히 무형의 세계가 아닌 갖가지로 장엄된 유형의 세계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본래 부처님이 누리는 깨달음 속에는 일체의 모습과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반해 극락정토가 갖가지로 장엄되었다는 것은 극락세계는 유형의 세계이고 한편으로는 무형의 세계임을 전한다.

극락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은 갖가지 형상장엄들을 통해 감각적 기쁨을 만끽하고 더 나아가 형상과 감각적 기쁨에서 벗어난 해탈의 즐거움을 성취하게 된다. 극락은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아라한들만이 머무는 세계가 아니다. 극락세계는 중생들이 태어나는 장소이다. 이곳의 중생들은 비록 아미타불의 원력과 자신의 신심에 의해 극락에 태어났지만 감각적 기쁨을 추구하는 욕망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미타불은 이들에게 감각적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 온갖 장엄된 모습으로 극락세계를 건립하고 종국에는 일체의 형상과 감각적 기쁨을 초월한 해탈과 성불의 세계에 들게 한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중생의 감각적 행복을 지나치게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생들이 추구하는 일체의 욕망은 모두 윤회를 초래하고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라고 가르친다. 소승의 가르침대로라면 맛있는 음식도 경계해야하고 꽃향기 하나라도 마음껏 맡지 못한다. 항상 갈애(渴愛)와 집착(執着)을 끊는데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중생의 감각적 즐거움을 충족시켜 삶의 곤란을 없애는 것도 소중한 일이라고 보았다. 아름다운 환경과 풍족한 환경을 통해 중생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도 불법의 가르침이며 일체의 감각적 기쁨을 초월하여 해탈의 기쁨에 드는 것도 불법의 가르침이다. 극락세계에 고통은 없고 순전히 즐거움만 가득하다는 것은 그 세계는 물질적·정신적 풍요가 가득하여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만약 극락세계가 아무런 장엄 없이 텅 빈 허공과 같다거나 그냥 땅으로만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해도 달도 없고 아름다운 나무도 없고 깨끗한 연못도 없는 적막 그 자체라면 극락세계라 할 수 있을까? 아마 그 세계에 가고 싶어 염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무리 극락세계가 고통이 없는 즐거움의 세계라 할지라도 물질적 장엄이 이루어져 있지 않다면 그 세계는 중생의 입장에서 삭막하기만 할 것이다.

소승불교의 해탈은 물질계의 초월에서 이루어진다. 열반을 실현하고 해탈한 성자에게 물질계는 속해있지 않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의 해탈은 물질계를 떠나지 않는다. 중생들에게 있어 생존의 기반이며 탐욕의 대상인 이 세계를 대승불교의 해탈은 그대로 포용한다. 아미타불이 극락세계를 장엄하는데 갖가지 아름다운 물질계를 나타낸 것은 대승불교의 이러한 해탈의 관점 때문이다. 극락이 극락일 수 있는 것은 그곳이 감각의 기쁨을 초월한 해탈의 세계여서만이 아니다. 중생들이 겪고 있는 감각적 괴로움이 사라지고 대신 풍요로운 물질들이 중생들을 만족시키기 때문에 극락이라 이름한 것이다. 중생들이 바라는 바는 물질을 떠난 정신적 행복만이 아닌 물질과 정신이 함께하는 행복이다. 감각적 기쁨에 빠져있는 중생들에게 감각적 기쁨을 떠난 해탈을 이야기한다면 해탈을 동경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감각적 기쁨과 초월적 기쁨이 함께 하는 세계, 그곳이 곧 아미타불이 데려가고 싶은 극락정토인 것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10호 / 2015년 9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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